새_기지旣知와 미지未知의 유희

이영학 조각展   2001_1210 ▶ 2001_1224

이영학_새_철_32×12×36cm×2_2001

박여숙화랑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7-41번지 Tel. 02_549_7574

1981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올해로 17회의 개인전을 갖는 이영학은 늘 관객이나 평자를 놀라게 하고 또 즐겁게 한다. 지난 2000년도의 개인전을 찾은 사람들은 두 번 놀랐는데, 우선은 전 시장에는 여느 시냇가에서나 볼 수 있는 범상한 돌덩이들이 놓여져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놀라움을 감추고 그 범상한 돌덩이들이 기존의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인위성을 극소화, 재료가 가진 질료성의 극대화, 근원성으로의 회귀 등을 추구하던 작가의 노력이 끝닿은 점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이 놀라움은 예견된 놀라움이었다. 그러나 진짜 놀라움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끼도 끼어 있고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돌들은 모두 청동 주물이었던 것이다. 이영학의 작품은 으레 그럴 것이라는 어떤 예측도 허용하지 않았다. 여기에 이영학의 이중 전략이 있다. ● 이영학은 자기에 대한 모든 규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유유히 전복하고 초월해 버린다. 작품 세계에 대한 인식 뿐 아니라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도 이영학은 이러한 이중 전략을 구사한다. 그는 철저하게 우리의 기성 지식(旣成知識)에 근거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친숙하고 위험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친숙함, 안도감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미지(未知)의 것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난다. 흔히 난해한 추상과 완전히 낯선 형상을 통해서 폭발적인 인식의 전환을 의도하는 여느 현대 미술과는 반대로 감상이 역방향으로 진행된다. 기지의 것에 근거하여 작품이 수용되고, 거기서 비롯되는 친숙함과 편안함은 미지(未知)의 것에 의해서 전복됨으로써 기지의 것은 더욱 풍부하고 너그러워진다. 왜냐하면 이 전복과 초월은 유머와 유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영학_새_철_35×16×10cm_2001

그의 작품 어디나 이런 유머와 유희 정신이 스며들어 있다. 치마를 두른 호랑이의 모습, 머리 위에 크고 작은 돌멩이를 얹어 놓은 입상들, 청동으로 된 돌멩이들이 이룬 무지개 다리는 이런 유머와 유희 정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는 내용에서 뿐 아니라 재료, 형식을 가지고 유희를 벌인다. 그가 벌이는 흥겨운 유희는 재료와 형식의 성격을 완전히 장악하여 말 그대로 그것을 손끝에서 가지고 놀 수 있는 경지에서 만 가능한 것이다. 그가 장악하고 있는 재료도 전방위적이다. 지금까지 그는 돌 조각에서나 청동 주물 작업에서나 무쇠 주물 작업에서나 그 재료의 특성을 가장 멋지게 자기화한 작품들을 보여 주고 있다. 돌 조각에서는 원래의 돌의 질감을 돋보이게 한다면, 청동 조각에서는 청동의 무궁 무진한 변신 가능성을 즐기게 해주는 것이다. ● 경지에 오른 장인인 이영학은 왜 가위며, 호미며, 문쩌귀 같은 것으로 새를 만들고 있는 것일까? 가위를 가위에 그치지 않고 새로 환생시키는 작업에는 이영학의 유머와 장난기가 놓여 있다. 가위에서 새를 읽어내는 것은 노동의 도구라는 무거운 본질을 거두어 내고 형태의 유희를 즐긴 결과이다. 가위나 돌쩌귀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기성의 것을 버리고 미처 인식되지 못했던 것을 찾아냄으로써 작품이 시작된다. 한 마리의 새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스케치와 예비 작업이 이루어진다. 전국의 골동품상과 고물상을 돌며 구해온 농기구들은 그의 작업실에 놓여져 있다가 어느날 그에게 말을 건다. 어떤 결과를 예측하고 그가 이 재료들을 대하는 것은 아니다. 작업의 순간 순간에 작가는 이것들이 가지고 있는 형태로 유희를 벌이고 이 과정을 작가 스스로가 즐기는 것이다.

이영학_새_철_47×11×24cm_2001

이영학의 새를 보면 우선은 범상한 한 마리 새가 나타난다. 흔히 알고 있는 새에 대한 상식으로 보기 때문에 호미가 새로 보이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 새가 몸통은 가위요, 주둥이는 돌쩌귀라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의 최초의 상식이 여지 없이 깨어져 버린다. 그 다음 순간에는 그 가위로 된 새는, 아령을 몸통으로 한 새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진 살아있는 새가 되어 다가온다. 때로는 고독하게 나뭇가지에 앉아 있기도 하고 때로는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물을 마시려다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홰를 치며 덤벼들기도 한다. 그리고 문득 우리는 무슨 마법에라도 걸린 듯 이 부엌칼로 된 새가 느끼는 고독에 동감하게 되는 것이다. 전생에 가위였던 혹은 호미였던 새들은 살아 우리에게 저들의 이야기를 지저귀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미지의 것이 지각됨으로써 기존의 것이 더 풍부해지는 즐거운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릇 예술 작품은 현생과 영원이라는 후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영학의 손을 통해서 작품은 이렇게 전생까지 가지게 된다. 기지와 미지의 유희 속에서 탄생한, 전생을 가진 그의 새 들은 우리를 이러한 즐거운 체험으로 이끈다. ● 새 연작(철 조각)은 이영학이 대학 시절부터 관심을 보여 왔던 분야이다. 2001년도의 새들은 이전의 새들과 같으면서도 또한 다르다. 이전의 새들이 볏과 방울로 요란하게 치장을 했었다면, 올해의 새들은 그러한 치장을 벗어 던진 더욱 단아하고 간결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이전의 새들에서는 구성 요소들의 오브제적인 성격을 더 강조하여 여러 종류의 오브제가 혼재되고 중첩되어 역동적인 형상을 이루고 있다만 올해의 새들에서는 오브제적인 성격이 극도로 배제되고 형태의 흐르는 선이 강조되고 있다. 최근의 그의 작품을 보면, 가장 정확한 조준을 위해 가장 낮은 호흡을 고르듯, 이영학은 형태 유희의 마지막 순간에 변형을 최소한의 변형만을 가한 것 이 느껴진다. 이것은 최소한의 변형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재료가 가지고 있는 형태의 유희가 극대화 될 수 있는 최고의 변형이다. 상상의 유희 속에 가볍게 넘나들기 위해서 인지 이번 이영학의 새들은 조각적인 양감을 배제하고 선의 흐름이 중심 언어가 되고 있다. 30년 동안 이영학의 손끝에서 자라난 새들은 날아갈 듯 고운 선의 아름다움으로 완결되었다. ■ 이진숙

Vol.20011216a | 이영학 조각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