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각기행|먹판화의 아름다움

홍선웅 판화展   2001_1128 ▶ 2001_1211

홍선웅_강화장터2_먹판화, 천연염색 무명(쪽), 먹, 목판_25×23cm_2001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B1 제1전시장 Tel. 02_736_1020

자연, 생명, 그리고 홍선웅의 먹판화 ● 정말 값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맑은 햇살 아래 벼가 온통 누렇게 익어가는 9월, 홍선웅의 작업실을 둘러보고 놀랍고도 반가웠다. 1980년대 민중목판화가의 한 사람인 그가 우리의 전통목판화와 전통회화를 다시 탐구하며, 그것을 새로운 자기 형식으로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조선 닥종이나 천연염색을 한 무명에 먹으로 곱게 찍은 판화가 그랬고, 은행나무에 새긴 목판을 옛목판처럼 좌우에 마구리를 붙여 지성스레 보관하고 있는 그의 자세가 아름다웠다. ● 홍선웅은 한강 하류 강화도를 마주하는 김포의 서쪽 끝자락 보구곶리 마을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의 말대로 강화도가 너무 좋아 이곳을 찾았다. '넘실대듯 황해바다로 넘어가는 붉은 석양에 익숙해지고, 철따라 피는 야생화 군락의 수다떠는 소리를 들으며, 매미소리와 철새떼의 울음소리에 귀기울이며', 강화의 고려산과 한강 하류가 내려다보이는 문수산 자락에 터를 잡은 지 7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보구곶리는 문수산성 성문 밖 서북쪽 자락의 자연과 삶이 어울린 소담한 마을이다. 또한 강 건너 북녘의 벌건 민둥산과 강가를 따라 철조망이 분단의 아픔을 알려주는 땅이다. ● 작업실은 보구곶리의 50여 호 되는 마을 가운데 마을회관으로 쓰던 2층짜리 건물이다.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있는 네 개의 방은 그야말로 판화공방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라 생각되었다. 1층 왼쪽 방은 원판보관실이고, 오른쪽은 판화를 인출하거나 천연염색을 하는 방이다. 2층은 왼쪽 방을 생활공간으로 사용하고, 오른쪽 방을 판각실로 쓰고 있다. 성격 탓이겠지만 모든 방을 정갈하게 정리정돈해놓은 작업실은 그의 말대로 선방(禪房) 같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홍선웅은 구도자적 자세로 자신을 다스리고, 이 땅과 사람들을 목판에 새기며 작업을 해온 것이다. ● 홍선웅은 80년대 목판화가로 민중미술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1985년 미림여고 교사로서 이른바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해직된 뒤, 민족미술협의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이후 총무와 사무국장으로 살림을 도맡았었다. 또한 1988년 복직되었으나 1989년 전교조 파동으로 다시 해직되어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결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국제국장을 맡으며 해외전시와 공연을 추진하면서 민예총과 제3세계 국가와의 문화연대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생활과 작업을 희생할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한편 1990년대 들어서는 개인적으로 병마와 싸워야 했고, 또 다시 복직이 되었으나, 교직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작업에 매진하기 위해 이곳 보구곶리 마을회관에 정착한 것이다. ● 1층 원판보관실 문 앞에는 손바닥만한 판화 장서표가 붙어 있다. 흰 새를 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그 아래 붕어 한 마리를 담은 것으로, 화면의 가장자리에 '자연·생명·홍선웅'을 새겨 넣었다. 그의 작업실을 들어선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었다. 그렇다. 그 지난했던 1980년대를 통과해오면서 집약해놓은 홍선웅 나름의 지향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과 생명, 그리고 홍선웅 자신'을 먹맛, 곧 우리의 전통적인 고판화와 옛그림에서 찾은 것이다. 그것도 민중의 삶 속에 자연과 생명이 살아 있는, 분단이 만들어낸 통일의 땅인, 특히나 외세의 침략에 맞서 대장경을 제작하던 고려인의 강화섬을 바라보는 보구곶리에서. 역사의 아픔과 자연이 그렇게 조화된 이곳은 홍선웅의 예술의지를 펼칠 수 있는 최적의 터전이고, 홍선웅을 위해 준비된 땅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홍선웅_사인암(舍人巖)_다색 먹판화_37×32cm_2000

나는 그동안 홍선웅과 각별한 교분을 나눈 적이 없었다. 1980년대 후반 인사동에 있던 '그림마당 민'을 방문할 때마다 그는 좁은 사무실에서 뭔가 말없이 안내문이나 대자보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또 전시를 기획하고 뒤치닥거리에 늘 바빠 있었다. 그렇게 홍선웅은 민족미술협의회의 가장 큰 일꾼의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리고 민중미술관련 전시회에서 통일이나 교육운동을 주제로 한 그의 판화들을 만날 수 있었다. ● 민중미술운동에 뛰어든 이후 홍선웅의 회화작업과 판화는 이미 1980년대 중반 '민중미술의 새로운 정형'(유홍준, 『마당』, 1985;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 열화당, 1987)으로 평가를 받았다. 이는 조선시대 민화나 전통회화의 형식에 대한 관심과 재창조를 시도했던 「신새벽」(1984), 「민족통일도」(1985), 「지신밟기」나 「비나리」(1987), 「장산곶」(1991) 등에 잘 드러내었다. 굵은 선묘의 이들 목판화는 둔중한 묵언의 '대담한 생략미와 구성미를 중시하는 경향'(원동석, "3인의 판화모음집에 부치어", 『갈아엎는 땅―홍선웅·김준권·유연복 3인의 판화집』, 학고재, 1991)을 보여준다. 특히 미림여고에서 해직된 직후에 새긴 「선생님」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학교건물을 배경으로 어이없이 강제로 교단을 떠나며 하늘을 응시하는 선생님과 그 품에 안긴 학생의 모습은 그야말로 간명한 묵언의 안타까움을 느끼게 해준다. ● 한편 홍선웅은 초기 민중미술에서 목판화 운동의 '신새벽의 텃밭을 일군 사람'(라원식, 『갈아엎는 땅』, 학고재 앞 책)이다. 5년 동안 미술시간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공동체 정신과 민족적 감수성을 일깨우기 위하여 노력했다. 판화동화책이나 달력 꾸미기, 벽화 그리기나 그림놀이, 깃발 만들기 등 공동작업을 주로 진행했고, "창 아래 쏟아지는 햇살도 좋지만 세상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학생들을 일깨웠다. 그리고 학생들의 잃어버린 민족정서를 고양시키기 위해 직접 풍물을 치고 춤과 노래, 탈춤놀이 등을 함께 진행하며 미술시간을 운영했다. 그런 수업과정을 정리한 '통합정서로서의 미술'이라는 글을 『민중교육』(1985)에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그는 해직당했다. 결국 참다운 교사로서의 뜻은 펼치지 못했지만, 그 덕분에 1980년대 민중미술운동은 강직한 일꾼을 얻은 셈이었다. ● 교직생활과 동시에 구로공단의 노동자들을 위해 야학교사로 활동하면서 같은 방식의 미술교육을 펼쳤다. 또한 1984년부터 '판화를 통해 건강하고 풍부한 미적 감정을 개발하고 표현하는 마당'으로서 명동청년미술학교, 성남시민미술학교, 연세대 판화강좌를 맡았다. 이들은 우리의 척박한 교육풍토에서 라원식의 표현대로 '신새벽의 텃밭'을 이룬 미술교육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에 걸맞게 홍선웅은 「민주교육만세」(1987), 「해방의 노래」(1990), 「우리집 아이만은」(1985), 「민주교육」(1987), 「통일교육」(1988), 「전교조의 깃발 아래」(1989) 등 교육운동과 관련된 목판화들을 꾸준히 제작했고, 교육운동의 선전매체로 활용되었다. 이 외에도 노동운동, 통일운동, 민중의 삶과 역사 등을 형상화하면서 1980년대 목판화운동을 이끌어온 한 사람이다.

홍선웅_금강화곡4_한지에 먹판화, 먹, 천연염색(쪽), 목판_37.5×29.5cm_2001

홍선웅이 어느날 판화전을 준비하며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고 글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 "80년대와 90년 초까지는 민미협과 민예총의 여러 직책들을 맡느라 작업량이 극히 미비합니다. 90년대 중반부터 이곳에 터를 잡으며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고판화들에 매력을 느껴 그동안 칼쓰는 법을 다시 배우고 먹판화 작업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프레스기로 인쇄한 듯 세밀하게 20-30도씩 찍어내는 현대판화보다도 오히려 거칠고 투박하지만 고졸한 멋을 풍기는 고판화나 먹판화에 더 애착을 느낍니다. 아마 현대적인 것보다도 옛문화 속에서 더 많은 정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제 자신의 변화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90년대의 활발했던 한국미술사 학자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동안 연재했던 판각기행 글과 먹판화들을 모아서 「홍선웅의 판각기행」이란 제목으로 단행본을 내기로 했습니다. 판화가들과 또는 혼자서 이곳저곳 답사다니며 느꼈던 것을 쓴 산문집입니다. 아직 제 자신이 판각문화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어 단순히 겉핥기 식으로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만 공부가 더 되고 기회가 또 주어진다면 판각기행 2집에서는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입니다…."● 편지의 내용처럼 홍선웅이 보구곶리에 터를 잡고 작업한 결과는 1990년대 초반까지 민중운동의 최전선에서 작업했던 의식을 토대로 새로운 변신을 보여준다. 힘차고 거친 선, 분노에 찬 표정들, 할 얘기가 많았던 꽉 찬 화면 등의 묘사방식에서 벗어나 유연하고 간명한 선묘의 불교적 색채와 다색목판 풍경화에 심취해 있다. 더불어 홍선웅 자신의 예술적 방향을 그렇게 찾은 것이다. 그의 변신은 창비시선을 비롯한 시집이나 책표지의 장정용 목판화로서 인기를 얻기에 충분했다. ● 보구곶리에서 제작한 「판문점」(1995), 「김지하의 춘란에서」(1998), 「보구곶리 사람들」(1998, 2001)과 「강화장터」(2001), 「선암사」(2001) 등이 그러한 홍선웅의 변모를 잘 보여준다. 이들 작품은 얼핏 오윤(吳潤)의 목판화 형식에서 박수근풍(朴壽根風)의 구성과 선묘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아직은 각선이 딱딱하고 자기 개성이 또렷하지 않지만, 홍선웅이 보구곶리와 강화도 땅의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융합된 화면을 보여준다. ● 또한 「선재동자 구도기 Ⅰ―선재동자가 보현의 행을 구하다」, 「선재동자 구도기 Ⅱ―문수보살이 보현의 행을 게송으로 구하다」, 「선재동자 구도기 Ⅲ―갖가지 수승한 염불문을 찬탄하다」, 「선재동자 구도기 Ⅳ―보리심을 내는 데 필요한 세 가지에 대하여」(1996, 『화엄』지에 연재), 「추만호의 번뇌의 詩에서」(1997) 등 불교적 주제의 판화나 신동엽의 시를 내용으로 한 연작판화 「錦江畵曲」 (2001) 등은 지극히 압축된 형상미를 창출해낸 것 같다. 이들 선미가 감도는 정제된 칼맛의 판화들은 홍선웅이 꾸며놓은 작업실의 정갈한 분위기에서 새겨진 것으로, 특히 차분한 홍선웅의 심성이 수묵의 감각과 잘 맞아떨어진 작품들이다. 이들 판화는 그림에 어울리게 곁들인 글씨에서 홍선웅의 정감넘치는 필세를 엿볼 수 있다. 옛한글 서체의 고졸한 맛을 자기화한 각진 서체는 마치 조선시대 16∼17세기 부모은중경의 변상도와 글이 함께 한 목판본을 연상시킨다. ● 이들 먹판화가 보여주듯이, 최근 홍선웅은 목판화에서 유성으로 찍어온 습성을 버리고 먹으로 찍는 수성목판화의 그윽한 맛에 흠뻑 젖어 있다. 이처럼 홍선웅이 먹판화에 심취하게 된 것은 전통목판화를 만나면서부터이다. 규장각에서, 해인사 팔만대장경에서, 병산서원이나 고산서원에서 만난 경판과 목판본 문집을 통하여 우리 나라 목판화의 장점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전통목판화에 담긴 자연과 생명을 찾았다. ● 우리 나라는 목판화의 나라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양과 뛰어난 새김기술의 불교 및 유교서적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고려불경이나 조선 18세기 오륜행실도 등 몇 사례를 제외하고, 번지거나 먹의 농담이 고르게 찍히지 않는 약점들을 홍선웅은 나름대로의 먹판화 찍는 방식을 개발하여 이를 보완했다. 단순히 먹으로만 찍는 것이 아니라 먹을 갈 때 한약재인 천궁을 다린 물을 쓰는 기술을 터득했다. 그렇게 찍은 판화들은 농담이 균일하면서 흑연 맛이 돌고, 먹의 윤기와 그윽한 깊이를 담아내고, 희끗희끗하면서 부드러운 먹선을 연출하게 되었다. 시커멓게 찍히는 유성목판화가 흉내낼 수 없는 감성을 실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먹선묘의 그 맛을 한껏 살리기 위해 홍선웅은 좋은 조선 닥종이나 천연염색한 무명천을 선택하고 있다. 여기에 간혹 배경에 투실한 화강암의 탁본을 활용한 점도 멋스럽다. ● 한편 홍선웅은 서원과 사찰답사를 통하여 그곳에 보관된 목판원판들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판화를 일정량 찍고나면 판을 버리는 현대적 개념의 목판화 관행을 반성하고, 목판화가로서 찍어낸 판화뿐만 아니라 원판의 중요성까지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판이 잘 뭉개지지 않는 은행나무를 쓰고 판 자체를 보관하기 위해 전통목판처럼 판의 좌우에 별도의 두터운 나무를 대는 마구리형식을 모방하고 있다. 역시 전통목판처럼 판은 앞뒷면을 모두 새긴다. 다색판화의 경우 앞판은 먹선묘를 찍고, 뒷판은 채색면을 찍어내도록 하고 있다. 투박한 대로 원판 자체를 남기려고 그 원판들을 시렁에 차곡차곡 세워놓은 목판보관실의 모습은 차라리 경건하기까지 했다. 또한 홍선웅은 판각답사를 하면서, 사찰이나 서원의 목판들을 먹으로 찍어내는 과정에서 고목판들이 소홀한 관리 속에 다루어지는 풍조를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홍선웅_조정래 소설 『태백산맥』 표지 목판_1998

새로운 다색먹판화의 진면목은 홍선웅이 가장 의욕을 보인 '진경판화(眞景版畵)'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작년 월간 『우리교육』지에 연재한 「진경판화기행」이 그것인데, 단양의 사인암과 울진의 성류굴, 그리고 합천 해인사 등 겸재나 단원이 그렸던 현장을 포함하여 자월도, 문수산성, 상당산성, 쌍계사, 미황사 등을 담은 것이다. 이들은 산의 미점, 바위의 준법형태의 각진 선묘, 나무 표현에서 특히 겸재식 화법을 중심으로 하여 나름대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법을 자신의 먹판화법으로 재창조하려는 의도를 뚜렷이 보여준다. 그는 해인사, 성류굴, 월송정 구담 등 겸재가 그린 현장을 직접 답사하며 겸재의 시점과 변형방식을 탐색해오고 있다. ● 이러한 다색 진경판화는 그가 포착해온 풍경 먹판화에서 변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홍선웅은 간결한 선묘와 구성의 단색 먹판화로 「마리산」, 「염하강」, 「하리포구에서 본 미법도」(1995)과 같은 강화의 주변풍경과 조정래의 『태백산맥』 표지화(1998), 「병산서원」이나 「고산서원」(1999) 등을 새겨왔다. 옆으로 긴 화면에 새긴 이들은 이미 겸재나 단원 같은 옛진경산수의 방식과 만날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병산서원」이나 「고산서원」은 건물을 평면도식으로 나열하는 전통 기록화의 방식이다. 특히 선각의 굵기에 변화를 준 「마리산」과, 근경의 짙은 산능선 위로 솟은 선묘의 산주름을 묘사한 「태백산맥」에 그러한 전통화법의 변용이 뚜렷이 드러나 있다. 이처럼 홍선웅은 옛전통의 장점을 오늘의 시대형식으로 창출하는 판화예술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 7년 동안 전국에 걸쳐 판각기행을 하며 보구곶리 작업실에서 제작한 홍선웅의 목판화는 해결해야 할 과제도 없지 않은 것 같다. 먼저 고려나 조선의 다양한 목판화 전통을 폭넓게 학습하는 일일 게다. 분명 홍선웅의 목판화가 옛고판화보다 새김이나 찍는 기술에서는 진일보해 있다. 그러나 조방한 것은 조방한 대로, 섬세한 것은 섬세한 대로 현대 판화에서 차용할 요소가 풍부한 점을 감안할 때, 대상과 주제에 따른, 또는 시대변화에 따른 고판화의 선묘방식과 화면구성, 그리고 새김기술 등을 눈여겨 살폈으면 싶다. ● 다음 진경판화의 과제이다. 홍선웅의 다색 진경판화는 나름대로 겸재식 진경산수화법을 토대로 개성적인 판화형식을 창출했다. 그러나 대체로 화면이 답답하거나 실경에 얽매여 있다. 그도 인정하듯이 아직은 풍경이 주는 울림과 진수를 충분히 소화해내지 못한 것이다. 이는 겸재가 실경의 현장에서 풍경이 주는 감명과 모티프를 살리기 위해 무엇을 고민했을까를 염두에 두면 해결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겸재는 폭포물이나 바람과 같은 소리를 형상과 조합하여 단순화와 변형으로 자신의 시대에 걸맞는 진경산수화법을 창출한 점이 그렇다. 홍선웅의 진경판화가 우리 시대 풍경화로 우뚝서기 위해서는,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자연·생명·홍선웅을 이루기 위해서는, 홍선웅이 실경현장에서 어떤 고민을 했는가를 강렬하게 표출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 민중미술운동에서 시작하여 전통목판화와 겸재 진경산수화법을 재해석한 홍선웅의 먹판화는 그가 말하는 대로 지금은 학습기간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 시대 판화가 가야 할 참모습을 보여준다. 세계적인 인쇄문화를 발달시킨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판화가가 적은 현실에서, 나아가 목판화가가 드문 현실에서, 더욱이 먹으로 찍는 목판화가를 찾기 힘든 실정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어떤 예술형식보다 거의 완벽에 가깝게 철저히 단절되다시피 한, 전통목판화의 현대적 계승은 정말 빛나고 값진 일이 될 것이다. ■ 이태호

Vol.20011201a | 홍선웅 판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