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방에 의한 풍경

김보중 회화展   2001_1106 ▶ 2001_1130

김보중_3개방에 의한 풍경-1층 화가의 방 1_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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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곡미술관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02_737_7650

1층 화가의 방 1 ● 방 _ 그리는 일의 정체성이 담겨있는 화가의 공간을 지향했다. 인간과 자연은 상호반영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 자체만으로 독거(獨居)함에서 벗어나 자연을 그 상대로 하는 상호적 교감을 다루고 있다. 인간들이 모여 사회화되는 단계 이전 인간이 자연을 상대로 공동체 삶의 미덕을 발견하는 시원(始原)적 심성을 그림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그림이 하나의 생명체의 기표(記標)로써 서로가 서로를 비춰주고 생명을 전이(轉移)하는 생명공간으로 충만하다. 그림이 섬(島)으로 남아있길 원치 않는다. 아무도 살수 없는 풍경 속에 섬(島)처럼 말이다. 그림과 그림끼리 영향을 미치고 교류할 수 있는 장(大陸)을 꿈꾸며 추구한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함이 우리의 영혼 안에 자연법칙을 수용하고 우리의 삶이 자연과 동등 됨을 취할 그런 체계를 우리내면안에 배양코자 한다. ● 中平 형님께 드린다. _ 말기 암 지친 몸을 휘적휘적 저으며, 마지막 생의 애착을 포천 어느 이름 모를 오솔길에 묻혔다. 사람은 떠나면 그만인 것을 우린 살고 있다는 업보로 삶에 천착한다. 생의 끝 무렵, 지쳐 찾은 무심한 산길은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안식을 권하였다. 산다는 일에 슬픔보다 기쁨을 우리에게 권유하며 어느 날 홀연히 떠난 그의 영면을 빌며 햇빛 눈부셨던 이름 모를 오솔길을 그에게 바친다. ● 집 _ 고향은 기억의 출발이자 종착지이다. 나는 지리적 형태의 고향이 없다. 그건 실향민세대 대대로 겪는 정서적 목마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지연, 혈연 등등... 연으로 철옹성처럼 똘똘 뭉친 반도 땅에서 구체적 고향 없음은 정서적 갈증이다. 명절이라는 축제의 동참도, 그런 저런 구락부형태의 사회적 이익집단관계에서도 무심한 정서적 소외감에 한동안 노출된 적이 있었다. 나에게 집의 개념은 그런 목마름을 보상(報償)하여주는 심리적 대체개념이 아닌가 여겨진다. 고향이라는 정서적 언어가 집이라는 의미로 시각화하고 있다. ● 숲 _ 내 삶에 상당부분은 도회지 변두리에서 보냈다. 도회지 변두리 잡목수풀 구릉지대는 개발논리의 최대피해자로 여겨진다. 유심히 보지 않더라도 한 계절이 채 지나기도 전 아파트단지나 묘지지역으로 변해 가는 자연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는 개발을 혐오하는 극단적 자연회귀논자는 아니다. 다만 여태까지 있어왔던 선진국의 이기적 자연파괴역사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좁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무자비한 반환경적 발상을 자제하고 자연의 순리에 귀기울이는 체계를 우리내면에 작동되길 원한다. 개발, 선진화라는 냉혹하고 무자비한 자본의 탐욕적 욕망에서 벗어나 자연이 주는 따뜻한 감성에 귀기울이길 권한다. 보잘 것 없는 나무줄기, 풀썩이는 낙엽과 마른 흙바닥에서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생명의 경이 그것은 내예술의 동기이며 마음의 집이기도 한다.

김보중_3개방에 의한 풍경-2층 화가의 방 2 _2001

2층 화가의 방 2 ● 적신(赤身) _ 산림 속을 부유하며 온몸으로 직접 자연의 힘을 체감하며 닳아보린 원초적 감성을 열어주는 감각의 해방구로써 산림을 좋아한다. 자본의 맹종과 권력지향 사회구조에서 적신으로 행한 예술행위가 비록 험악할지라도 자본의 야만속에 매몰된 이기 보다 광대(廣大)노름의 진정성을 택하였다. 한세기전 그림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야심에 찬 화가들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적신으로 다가가는 그림이 세상을 변화시킬 힘이 비록 없을지라도, 긍지에 찬 삶을 바라는 절실한 몇몇 개인들의 삶을 변화시킬 힘은 여전히 유효하기에 그림이 삶의 중심에 여전히 버티고 있다. ● 그림자-풍경 _ 예술가는 고독을 노래하고 소유한다. 그림자는 그런 것을 감정화한 것이다. 원만치 않은 성장고통으로 야기된 자폐적증상들이 인간관계와 사회에 대한 부적응이 관계의 어려움으로 나타났어다. 사람과 사람사이, 한 개인의 과거와 현재사이 그 간극들 사이에서 하나의 전망- 즉 풍경을 보게된다. 아픈 기억, 혼란중인 지금, 두려운 내일 또한 사람사이를 가르는 애증의 관계를 주시하며 중첩되는 갈등과 화해가 빛과 그림자처럼 명멸하는 풍광 속을 거닌다. 그것이 내자신과 내안에 나 그리고 또 다른 이가 진정 화해하는 해원(解寃)의 도상적 방법이길 바란다. 그 도상들을 통해 어제의 시간들에서 현현하게 실재하는 슬픔, 고독, 분노 등을 풍경의 과정을 거치며 하나의 해답을 만들어본다. 그 해답은 자신을 신화화하고픈 부질없는 욕망을 이기고자하는 나에 대한 경고이다. ● 풋것 _ 그림자는 본체의 이면이다. 그림자를 본체에서 해체하려할 때 존재는 무의미하여진다. 본체가 그림자와 화해할 때, 기쁨이 슬픔과 화해할 때, 본체가 이면의 깊이에 진정성을 갖는다. 1993년 미국 버뱅크 크리에이티브아트 화랑과 1995년 나무화랑에서 "The raw where the place is"(풋것이 있는 곳)란 주제의 전시를 가진 적이 있다. 가공되지 않은 것, 조형의 세련성이 추구되지 않은 상태를 가지고 거리낌 없이 전시장으로 가져갔던 적이 있어다. brain storming단계에서 마구 굴렸던 이런저런 생각을 속셈 없이 늘어놓는 널널함에서 생동감을 발견하였다. 5, 6년전인가 독일에서 공부했던 박ㅇㅇ 라는 친구녀석이 금호미술관에서 가진 개인전 카다록에다 쓴 넋두리中 "골치 아픈 예술 그만하고 히말라야산맥이 보이는 지점에 엠포리엄(구멍가게)이나 하나 차려놓고 넉넉한 여자와 더불어 히피처럼 살고 싶다고" 되지도 않는 썰을 푼 기억이 난다. 지금은 독일여자를 데리고 살지만... 그 녀석에 엉뚱한 썰을 당시에는 무심히 지나쳐지만, 나는 이 "화가의 방 2"를 생각하면 그 녀석의 심정에 동감함을 발견한다. 이런저런 생각의 피부껍질을 벗겨내면 그 가벼움에 위탁하는 즐거움을 말이다.

김보중_3개방에 의한 풍경-3층 회상의 방_2001

3층 회상의 방 ● 회상의 방은 화가의 방 1,2에 근거가 되었던 모습을 드러내었다. ● 땅 _ 파괴의 힘에 대해 한때 열띤 즐거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또한 그 파괴가 새로운 지평을 제공하리라 믿었다. 민중에 대한 자각이 열리고 그 열림은 분명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다가왔음을 회상한다. 닫혀지고 주변적 상태였지만 주체적 의식을 각성하고, 패권의 횡포에 분노하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 흔적들은 기름진 우리 땅을 쓰다듬는 농부의 억센 손으로 칭송하였다. 외세에 사로잡혀있는 땅에 대해 분개하였고 각성된 그 땅을 염원하였다. 회의에 찬 파괴적 힘을 탐미했던 시절, 지금도 그런 힘들이 내안에 여전히 남아있는것인가 자문한다. 그것은 화가의 방1,2를 있게 한 터전 이였다. 회의와 파괴에 경도되었고 신지적(신을 아는 태도)자세에 회의를 가졌던 방황하던 청년시절 모든 사물을 초점이 흐린 풍경의 관점에서 보았다. 배양을 그친 황량한 대지의 파괴적 풍경이 그 시절의 풍경이었다. ● 종교 _ 예술을 함에 있어 신앙은 나에게 불가분의 내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젊은 시절 잠시 티벳불교를 기웃거린 적이 있었다. 오도(悟道)의 원형에 대한 탐닉이라고 보여진다. 원시불교형태의 티벳불교는 제도에 의해 점차 눌려지는 오도(悟道)의 원형을 오랜 세월 변방에서 유지하고있었다. 그러한 사상이 내 초기 그림 속에 일종의 혼합적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누구나 익히 알던 80년 그 시절의 대세인 역사참여냐 관조냐 하는 이분법의 숨막힘에서 흔들리는 나를 노래 부르게 충동했던 그런 격렬함이 또한 초기 그림의 읽힘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오랜 방황이라고 생각된다. 고교교사시절, 유학생시절 도합하여 10수년이 그렇게 흐르던 세월을 접고, 어느 날 문득 예수라는 살아있는 말씀의 현현(顯現)이 격랑 하는 고독한 영혼에게 댓가없이 주는 구속의 기독신앙이 내영혼의 숨결을 결정하였다. 나는 이런 마음의 순례가 풍경이라는 형태로 그 흐름을 그리고 있다. 그 마음을 부르는 그 청정한 신앙적 갈구가 내 그림의 저변이다. 내게 간절한 것은 이런 모든 과정의 요란함에서 나를 묻고 스며들길 간절히 바란다. 이 모든 과정에서 티끌에 준한 존재가 나이기 때문이다. 답답한 이분적 사고에 의해 정처 없이 흔들리는 절망의 심연에서 나를 따뜻한 체온같이 감싸주는 그림에게 감사를 보낸다. ■ 김보중

Vol.20011116a | 김보중 회화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