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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정지된 것들, 그러나 ● 숨가쁘고 분주하기만 일상의 한 복판을 잠시 비껴 가끔씩 마주하게 되는 작은 숨돌림과 멈춤의 순간들. 엇갈린 체로 돌고 도는 세상의 틈바구니 속에서 잠깐씩 꿈꾸게 되는 이런 순간들이 때론 권태와 나른함의 감성을 수반하는 매혹의 시간들로 혹은 그렇게 정해지고 고정된 관계들을 일탈시키는 순간들로 다가오곤 한다. 나른한 일상의 오후라는 몽상이 꿈꾸어지는 계기들인 것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잠시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를 마주하게 되는데, 현실의 시공간을 비껴서는 이 순간은 물론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어쩌면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우리가 부단히 꿈꾸려 하는 현실 속의 또 다른 시공간, 세상과의 새로운 만남을 맺게 하는 순간들일지도 모르겠다. ● 나른한 일상의 공간 속에서 바라보는 ● 최홍구의 작업들은 바로 그런 나른한 일상의 한 복판 위에서 우리가 새롭게 마주하는 것들이다. 찌그러진 침대와 책상, 의자, 창문틀과 주전자와 변기와 조명등이 흐물흐물한 형태로 일상의 안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마치 현실 속에서 현실의 공간이 아닌 것처럼 자리하는 그곳은 작가의 상상력과 사유가 꿈틀거리는 공간인 동시에 그가 이번 전시에서 보이려 했던 탄력적인 사유의 공간들이다. 이 묘령의 공간 속에 그가 주조해낸 낯선 사물들은 마치 꿈틀되다 다시 흐늘거려지는 형태들로 혹은 어떤 미동의 움직임과 낯선 몸짓으로, 잠시 동안이지만 인위적으로 정지시킨 시공간에 널 부러져 있다. 그리고 그렇게 뒤틀리고 변형된 형태들로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바삐 돌아가는 세상을 뒤로 한 채, 한낮의 권태롭기만 한 일상의 순간들을 느끼려 한다면 우리는 작가의 야무진 음모에 얼마간은 빠져든 셈이다.
낯선 순간, 낯설은 시선들 ● 이 순간 익숙한 것들이라 믿어졌던 사물들이 낯선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작가의 출발지점은 이처럼 익숙하지만 낯선 시선들,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를 이끌어내는 시각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비롯된다. 그의 말처럼 "우리가 보는 것들은 과거에 보았던 것에 의해 미리 조건 지워져 새롭게 보는 것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에 박힌 어구처럼 익숙하지만 의미 있는 심줄로 엮어진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의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미지를 둘러싼 현대의 지형 속에서 빈번하게 확인할 수 있는 본다는 것 혹은 보이는 것에 대한 고집스러운 문제설정이다. 본다는 것에 대한 자명성이 알리바이를 상실해버린 지금 여기, 보이는 것 역시 보이지 않은 것들, 혹은 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 새롭게 관계 지워진 보이는 것들에 대한 관심들로 얼룩져 있다. 최홍구의 작업은 이러한 밑그림으로부터 형상들을 구축해내고 있다. 자명하게 보여지는, 정해지고 고정된 형태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은 관계들에 의해 변형되어진 형상들을 주조하려 하는 것이다. 「나른한 오후」와 「사유의 탄력성 시리즈」와 같은 작품들은 공간 속에서의 어떤 형태의 움직임과 정지를 담고있는 순간들을 표현하고 있다. 더구나 그 이미지들이 일상에서 관습적으로 굳어진 형태들과 이미지들의 변형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시선은 다시 현대 미술의 오래된 루머인 재현에 대한 불신들로 이어진다. 그의 변형되고 찌끄러진 일상의 잡동사니들은 고집스러운 재현의 형태들에 머무르지 않는다. 관습적으로 굳어진 정해진 이미지들을 벗어나려 애쓰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순간은 작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정지시킨 낯선 시공간 속에서 새로운 감성들을 맛보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 일상의 오브제들이 현실 속에 이미 배치된 것들(일상의 사물들)과 닮아야 할 아무런 이유를 못 느끼게 된다. 현실 속의 사물들과 닳고닳은 방식으로 비슷해지기, 닮아가기라는 오래된 이야기들(narrative), 다시 말해 유사성(Resemblance)의 그물 속에 놓여있지 않은 새로운 형상들과 만나게 하기 위해 최홍구의 오브제들은 고정된 이미지들로부터의 고립, 변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오브제들이 자리하는 공간이 앞서 말한 나른하고 권태롭기만 한 일상의 틈바구니일수도 있고 동시에 일탈의 시선을 욕망하게 하는 변형의 공간이며 이번 전시의 공간이자 그의 작품세계가 구축되는 사유의 공간이다. 그것들을 서로 또아리 틀 듯 꼬인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보이지 않은 것들의 몸짓 ● 그렇다면 작가의 시선이 단순히 이러한 시공간에 대한 것들에만 놓여 있을까? 그가 포착하고 주조하려 했던 것은 어쩌면 그러한 변형과 일탈의 형상을 가능케 하는 관계, 조건들에 대한 것들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의 오브제들이 그렇게 보여지도록 하는 보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문제의식들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시각상의 변형된 형태와 이미지들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말 그대로 찌그러지고 뒤틀려진 것에 대한 것들이다. 구구절절하고 구체적인 것들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그의 작품 속에서 어떤 힘들의 작용에 의해 짓눌려진 형상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간간이 이름짓는 작품들의 제목들(수취인 불명, 무기력, 멈출 수 없는 반복, 진행)과 집을 다루고 있는 작품(수취인 불명, 빈집 한 채, 낯설은 기억, 무기력)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제목에서 풍기는 직선적이고 단선적인 의미화를 피하고 있는 대신 작가는 형태들의 일그러짐과 그 변형에서 바로 연상되는 일방적인 힘의 행사(말 그대로 권력)에 대한 것들을 조심스레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숨막힘일 수도 있고(무기력, 멈출 수 없는 반복, 진행) 안락한 공간으로 대표되는 집이라는 형상의 붕괴「수취인 불명」와 과도한 변형「빈집 한 채」, 몇 번이고 인화시켜 덧붙인 일그러진 집을 합성수지에 담아놓은 「낯설은 기억」과 일그러진 침대가 합성수지에 고정되버린 「무기력」등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 것들이다. ● 그러나 작가가 매혹적인 물성이라 칭한 고무의 사용은 여기에 새로운 의미화의 국면을 부가시키고 있다. 고무가 갖는 탄성은 힘들의 작용에 의해 짓눌려진 이런 형태들이 갖는 반대급부를 의미화시키는 물성으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 힘의 작용이 일방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고무라는 물성이 갖고있는 꿈틀거리는 탄성은 공간 속에서의 움직임을 표현하기에도 적당하지만 동시에 공간 속에서의 힘들의 상태, 힘들의 작용에 대한 형상화를 가능케 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효과적으로 자신의 사유의 공간들을 형태 짓고 있다. 고정된 의미와 시선들을 벗어나려 하면서도 작가에 의해 새롭게 주형된 의미와 시선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보이려 했던 탄력적인 공간의 모습이다.
고무를 닮은 공간 ● 재현으로부터의 탈피는 단순히 재현에 대한 거부의 몸짓만은 아니다. 최홍구의 이중전략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그것은 닮지 않은 방식을 통해 닮아지기라는 경구와 유사한 전략을 취함으로써 의미를 획득하는 것인데, 이번 전시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두 층위로 분절시키고 있다. 그 한 무리가 앞서 말한 일상의 변형된 오브제들인 「나른한 오후」와 「사유의 탄력성 시리즈」들이고 다른 무리가 그가 구체적인 제목을 붙인(가끔 무제도 섞여있지만) 작품 군들이다. 전자가 일상 공간 속에서의 형상의 문제를 고민한 것들이라 한다면 후자의 무리는 그러한 형상을 가능케 하는 힘 관계, 좀더 구체적인 의미화에 관한 것들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전자의 닮지 않은 방식(변형된 형상들)을 통해서 후자의 닮아지기(「사회의」 힘 작용의 관계들을 보이려 하거나 좀더 의미화를 시도하는)가 이번 전시 공간 속에서 서로 이접된 체 결합되는 셈이다. 이런 설정은 이번 전시에서 1층과 2층이라는 구체적인 공간 속에서 분리되며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고무로 뒤덮음으로써 인위적이긴 하지만 양자의 공간의 대비와 그 결합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공간 전부가 작가가 유인하는 사유의 공간으로 변모되는 것이고, 여기서 전시공간은 실제의 현실 속에서 잠시 발길을 멈춘 체 바라보게 되는 일상 이탈의 공간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 공간 속에서 우리는 잠시동안이라도 고정되고 굳어진 것들로부터 일탈된 시선의 순간들,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의 색다른 관계를 맺어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최홍구가 전하려하는 것들은 그에 의해 새롭게 탄생된 공간 속의 탄력적인 물성의 이미지인 동시에 숨막히고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우리의 상황을 다시금 반추하게 하는 아찔한 감성과 동의어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이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라는 사실들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 민병직
Vol.20011022a | 최홍구 조각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