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1_1010_수요일_05:00pm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Tel. 02_735_4805
정은정의 정물, 혹은 죽음에 관한 유머 ● 해골, 깨어진 그릇, 모래시계, 시든 꽃 등을 메타포로 하여 성경의 한 구절인 '헛되고 헛된' 삶을 재현하는 정물의 한 양상이 있다. 17세기 이후 풍미한 이러한 정물의 한 분파를 미술의 역사는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라는 현학적인 라틴어를 사용하는데, 이 말은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를 갖는다. 영원한 젊음과 사랑, 명예와 풍요로움을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을 비웃으며, 덧없는 삶의 운명을 환기시키는 메멘토 모리는, 그러나 어차피 조만간 사라질 삶은 양껏 즐겨야 한다는 억압된 쾌락주의의 이면(裏面)이기도 했다. ● 그런데 정물로서의 이 메멘토 모리의 융성은 독일어의 정물이라는 용어를 축어적으로 번역한 영어, '스틸 라이프 still life'로서의 정물, 다시 말해 '움직이지 않는 정적인 생명'의 묘사로서의 정물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불어, '나튀르 모르트 nature morte'의 확립을 가져온다. 이것은 '죽어서 움직이지 않는 자연'이라는 뜻으로, '여전히 살아있음'을 강조하는 영어의 '스틸 라이프'와는 달리 사물의 죽음을 강조하는 장르로서의 정물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 정은정의 정물은 '스틸 라이프'와 '나튀르 모르트'의 사이를 오가며 엮어내는 복잡한 의미망이다. 우선 닭, 오리, 돼지, 젖소, 생선 등, 그녀가 연출을 행할 정물의 대상들은 모두 다 '죽어서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이다. 그것들은 모두 다 죽음의 시각적 기호를 지니고 있다. 가금류와 돼지는 털이 말끔히 뽑혀 있으며, 젖소의 머리는 몸통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생선의 몸통은 잘려나갔거나 혹은 물고기의 호흡공간인 물이 부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의 기호 곁에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연출하는 기호들이 항상 존재한다. 닭들은 눈을 뜨고 있으며, 눈을 감았다면, 사람처럼 잠자는 모습을 연기한다. 그렇지 않으면 줄에 목을 매 자살을 꾀하고, 검게 타버린 따라서 죽음의 기호를 육화한 닭은, 살아 있음으로, 검은 알을 낳는다. 젖소의 머리는 트랙터가 있는 제 살던 초원에서 하늘을 응시하고, 커다란 물고기는 수초가 있는 물위로 머리를 드러낸다. 돼지는 정면을 응시하고, 빨간 별 무늬 소파에서 힘껏 기지개를 켠다. 죽음의 기호를 간직한 동물들이 삶의 기호를 연출하는 모습은 한편으로 유머로 충만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섬뜩하기도 하다. ● 사실, 죽음을 잉태한 삶의 메타포는 '메멘토 모리' 이후 상투적인 것이 되었다. 1930년대 미국의 농업 안정국 Farm Security Administration 소속의 러셀 리가 찍은 농촌 아낙네의 거친 손, 도로시어 랭이 포착한 시름에 찬 얼굴, 그리고 워커 에반스가 찍은 비참한 무덤들도 경제 사회학적 문맥을 제거한다면, 죽음을 내재한 삶의 이미지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삶을 잉태한 죽음의 메타포는 부활, 순교자의 죽음이라는 종교적, 문학적 메타포 외에는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특히 시각적 이미지에서는 더욱 희귀하다. 이 희소성 때문에 정은정의 정물은 우리에게 유머러스한 섬뜩함을 전폭적으로 안겨준다.
그러나 정은정의 섬뜩한 유머는 전적으로 삶을 간직한 죽음이라는 이미지의 희귀성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주검의 불쾌감을 맛보면서, 죽음이 안겨주는 긴장감에 몰입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죽음의 고통을 이겨내려는 무의식적 선택에서 연유한다. 어린 시절의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주검을 마주 대하며 행하는, 범상치 않은 의지적인 연출 행위에서 비롯된다. 프로이드는 유머를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적대적인 힘을 무화시키려는 본능의 지적인 발화행위로 해석했다. 다시 말해 유머는 죽음과 같은 고뇌의 시련을 거부하려는 자기보존 본능을 지적으로 계발된 언어로 포장하는 것이다. 정은정의 정물이 갖는 섬뜩함과 유머는 죽음과 같은 보편적이고, 본능적인 두려움을 고도로 연출된 시각 언어를 통해 길들이고, 이겨내려는 시도에서 비롯한다. ● 유년시절, 뇌막염을 앓은 작가는 줄곧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고, 완치가 된 후에도 그 강박 관념적인 두려움에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벗어날 수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죽음을 앞둔 사람이 받는 천주교의 대세를 받았고, 5학년 때 뇌막염은 재발한다. 유머라는 지적 행위로 죽음의 고뇌에 대처할 수 없었던 소녀는 그녀의 곁에 있는 죽음이라는 현실에 애써 눈을 감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주로 다니는 길 어디에 장의사가 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가 그곳을 지날 때면 한참 전부터 다른 곳을 보거나 눈을 감아버리곤 했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어릴 적 정신적 외상을 '여전히 살아있음'을 표상하는 '스틸 라이프'의 유머로써 극복하게 된 계기는 "미국에 간지 4년" 되던 해였다.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 "차이나 타운을 걷고 있던 내게 길거리에 털이 뽑힌 채 쌓여있던 닭들은 그렇게도 무서워하던 죽음의 모습이 그렇게 비관적이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그 홀딱 벗고 누워있던 닭은 이전에 죽으면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끝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생생하게 떠있는 닭의 눈에는 어떤 나이브한 영혼이 머물러 있는 듯했다. 그후로 죽은 동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것들에게서 아직 남아 있는 어떤 기운을 찾는 것이 내 작업의 시작이 되었다. 그러면서 가끔은 생선의 강한 눈빛에서 언젠가 지하철에서 느꼈던 사람의 시선을 볼 때도 있고, 돼지머리를 보면 마치 돼지가 'Don't worry, Be happy'하는 것만 같았다." ● 정은정이 죽음이라는 숙명적인 위협을 거부하기 위한 방책으로 택한 유머러스한 발화행위는 다름 아닌 "죽은 동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것들에게서 아직 남아 있는 어떤 기운을 찾는 것"이었다. 작가는 주검 속에 있는 생명의 기운을 유머러스한 이미지로 연출하기 위해 주검을 치장하고 조작했다. 죽은 동물을 매만지면서, 'Don't worry, Be happy'라는 팝송의 충고를 유머러스한 시각언어로 집요하게 전이시켰다. 유머는 '메멘토 모리'로서의 정물을 '스틸 라이프'의 정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 그 사이에 언제나 개입했던 것이다. ● 정은정의 유머러스한 주검들의 정물은 따라서 엽기 취미도, 지적 유희도 아니다. 그것은 유년시절에 입었던 정신적 외상의 상흔을 지우는 작업이며, 삶과 죽음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무의식적 사유행위이다. 죽음의 두려움을 거부하면서, 죽음을 공포를 길들이려는 이중적 욕망의 산물이다. 정은정의 정물에는 죽음의 고뇌를 자기에게서 내쫓으면서, 죽음의 불안에 익숙해지려는 모순된 욕망이 깔려있다. 예술을 성적 욕망의 승화 sublimation라고 프로이드는 말했지만, 정은정에게 있어서 예술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두려움 없는 죽음을 향유하려는 욕망의 승화인 셈이다. ■ 최봉림
Vol.20011008a | 정은정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