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삶을 아우르는 치열한 정신 ● 박영택_ 이번 관훈갤러리 초대전은 지난 작업을 정리하는 의미 있는 개인전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 번째 개인전이신가요? 김진열_ 15회예요, 관훈갤러리는 제겐 무척 의미 있는 공간입니다. 1981년에 이곳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죠. 당시 전시 오픈날 집사람과 친구 4-5명이 함께 해주었는데 그 차분하고 쓸쓸하면서도 조용하게 이루어지던 전시가 언제나 마음에 새롭습니다. 평생토록 미술은 할만한 것이구나. 계속 이런 개인전시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씨끌벅적 하지 않은 자체가 내가 미술과 긴밀해질 수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 자신과의 약속을 다시 이곳에서 이루게 되어 감회가 깊습니다. 박영택_ 홍익대와 대학원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회화작업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김진열_ 마포에 있는 광성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미술선생님이 이건용선생이었습니다. 당시 이선생님은 이대앞에서 동양미술학원을 하고 계셨는데 제가 그곳에서 그림도 배우고 일종의 조수역할도 했죠. 대학은 응용미술과를 선택했지만 그 당시부터 저는 회화작업과 병행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편협했던 디자인 개념, 도안 개념에 대한 불만도 한 이유가 되었지요. 박영택_ 아무래도 이건용선생의 영향도 있었겠군요? 김진열_ 당시 선생님은 매우 실험적인 작업에 힘을 쓰고 계셨습니다. S.T.활동을 하시면서 논리적이려고 노력하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엇보다도 저는 그분이 '작업은 힘이다'라는 말씀에 공감했습니다. 박영택_ 어떤 힘일까요? 김진열_ 논리적이기도 하지만 압도하는 것,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힘이겠죠. 다만 그 논리성이 자연스럽게 풀리기보다는 대단히 의도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박영택_ 김선생님이 대학을 다니실 때가 마침 한국현대미술의 움직임들이 발아되던 그런 시기로 여겨지는데 어떤 영향이 있었나요? 김진열_ 당시 70년대 초의 분위기가 그랬죠. 제가 서양화과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 그들의 작업을 많이 보게 되었고 당시의 흐름에도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대미술을 이해 할려면 작가들의 사고, 생각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그게 좀 답답하고 너무 이기적이다 라고 느꼈죠. 약간의 거부감을 갖게 된 겁니다. 사실 제가 화가가 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어릴적 '플란다스의 개'를 읽고 나서였습니다. 불쌍한 네로에게 위로가 되는 루벤스의 그림, 뭉클하고 감동적인 그런 이야기를 통해 그림이란 것이 바로 그래서 소중한것이 아닌가 여긴 거죠. 저는 이 정서와 감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당시 현대미술은 언어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에서만 이루어지고 접근되는데 따른 건조함, 그렇게 접근되는 미술이 체질적으로 나와 않맞는다는 생각을 한 겁니다.
박영택_ 당시 선생님의 그림은 어떤 것이었나요? 김진열_ 하이퍼리얼리즘이 유행하던 시기였고 일정하게 영향을 받은 저는 전기코드 같은 것들을 확대해서 그리거나 저의 자취 가방을 흰 평면에 옮겨 그리는 그런 작업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가 군대를 갖다 온 후에 장석원씨를 만났습니다. 장석원선생은 그때 S.T.활동을 하면서 그림도 그리고 평론활동도 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열정을 갖고 작품에 있어서의 진실성, 정직성 같은 측면을 강조하면서 작가들의 의식을 존중해주는 그런 글들을 썼었습니다. 박영택_ 변화가 생겼군요? 김진열_ 그렇습니다. 내 자신의 체험, 어떤 절실함에서 나오는 그림을 원했는데 당시 70년대의 모노크롬이나 개념적인 미술들은 그런 차원에서 맞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장선생과 자주 만났고 그와 함께 80년도에 그룹 횡단을 창립하면서 작업을 같이 했습니다. 박영택_ 80년대 초는 새로운 미술운동들이 일어나던 중요한 시기였었는데 당시 횡단전을 창립하신 계기, 이유 같은 것이 있었나요? 김진열_ 무엇보다도 70년대 한국현대미술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당시 현대미술에 반해 미술이 사회적인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횡단전은 작가가 갖고 있는 진실, 영혼, 이런 측면을 작품에 반영시키고자 노력 한 것이고 이는 사회적인 현실에서 출발하기 보다는 미술이라는 현실에 바탕해서 사회를 바라보는 그런 입장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횡단창립전은 문예진흥원에서 가졌으며 저와 장석원, 함연식 이렇게 3인이 참여했습니다. 박영택_ 당시에 작업만 하셨나요, 그리고 그 횡단전을 계기로 어떤 변화가 초래되었는지 궁금하군요. 김진열_ 당시 저는 조선일보 편집부에서 미술기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참 어려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근무했던 기간이었는데 만4년만에 그만두었습니다. 횡단전은 그 이후 매년 지속했습니다. 김보중, 정복수, 고경훈, 안경희, 송심이, 이갑열, 박건 등이 함께 했죠. 82년부터 구체적인 형상이 작품 속에 등장했습니다. 사람들 시리즈인데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그 일상의 틈바구니를 들여다 보며 사회적인 억압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앨범의 갈피 속에 깃든 사진들, 우리집 식구들을 그리거나 혹은 사진을 직접 찍어 그리기도 하고 스케치도 하면서 일상적인 모습들을 그렸죠. 그런데 그 일상 속에 내재된 불행한 예감들에 주목한 편이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가해지는 불행이지요. 아마도 당시 80년대 초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횡단전을 통해 집단적으로 반영되었습니다.
박영택_ 첫 개인전으로 다시 돌아가 보죠. 당시 제목이 '자르기'였습니다. 기법이 그랬습니다만 선생님 작업은 항상 주어진, 정형화 된 화면을 탈피해 자르고 붙이고 과감하게 변형해서 전시장 벽면과 바닥 모두를 적극적인 관계의 장으로 설정하는 작업을 지속해오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아마도 사람들간의 관계, 소통이라는 측면과 함께 디자인을 전공한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김진열_ 디자인을 전공한 도움을 많이 받죠. 작품을 계속 할 수록 디자인적인 경험을 작품에서 살려내야 할 이유가 강해지는 편입니다. 무엇보다도 전 작품이 작가 중심적인 것보다도 소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인들이 문화와 시대의 중심에 서야한다고 생각하는데, 따라서 미술 역시 낮은 곳에 있어야하고 그럴려면 소통,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고 그런 측면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것에 도움을 많이 받고 있죠. 그래서 전 시민운동, 환경운동, 문화운동 등이 결국 하나로 불거져야 하고 그래서 현재 그 모두를 나의 삶에서 아우르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박영택_ 자르기 기법 이후 전개된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눠볼까요? 김진열_ 처음 자르기 기법으로 작품을 할 때는 아무것이나 다 잘랐죠. 나무, 헝겁, 포스터, 금속 등을 한 방향으로 자르고 한쪽이 누적되도록 했어요. 자르고 파괴하고 해체시킨 것들을 다시 배접해서 두툼하게 붙여나갔죠. 이후 그 위에 물감으로 형상을 그려나가는 작업이었는데 웬지 그 볼륨이 좋았습니다. 또한 종이에 날카로운 함석판 등의 금속성을 대비시키면서 인간의 내면에 깃든 양면적인 속성(일상에 깃든 폭력성, 잔혹성 등)을 은연중 대비시키고자 했죠. 우리의 몸 속에 내재하는 대치적이고 대립적인 갈등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이를 들추어낼 수 있도록 의도한 것입니다. 그랬을 때 작품을 바라보는 자신이 편해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83년도 부터 형상이 두드러지는 한편 금속판과 종이 배접으로 이루어진 다소 뜨겁고 거친 화면을 통해 사람들의 삶의 얘기를 진솔하게 전달해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그것은 아마도 80년대 라는 사회현실의 얘기일 겁니다. 박영택_ 부정형의 화면도 흥미롭습니다만 제가 김선생님의 작업에서 중요하게 보는 것은 신체의 과감한 절단, 파편화 된 신체입니다. 이 절단된 신체는 무엇일까요? 김진열_ 무엇보다도 해방의 욕구 같은 것이 있었어요. 정형화 된 화면을 쓰지 않은 것은 규격화된 것의 부자연스러움, 강요된 것에 대한 거부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틀을 깨고 싶어서 거칠게 뜯겨져 나간 틀을 활용했습니다. 이는 신문사에 근무하면서의 경험, 이후 광고를 제작할때 '누끼작업'에 영향을 많이 받은 거죠. 또한 공간 전체를 실제 공간처럼 연출하고 싶었어요. 이는 개별작품들이 현실공간 처럼 관계성을 맺어 서로 자연스럽게 소통하고 만날 수 있는 그런 적극적인 공간 연출이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표현에 대한 욕구가 강해서 그 욕구를 분출하는 과정에서 그런 것들이 필연적으로 나온 것들이라고 봅니다.
박영택_ 원주에 가신 이후로 작업의 방향이 좀더 심화, 압축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원주와 그곳에서의 작업은 어떤 관계가 있었나요? 김진열_ 80년대 중, 후반 원주에 있는 대학으로 옮겼습니다. 무엇보다도 원주에 가서 정체성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또한 자연스럽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왔죠. 원주사람들의 삶과 문화, 생태와 환경 등이 한데 불거져 다가왔습니다. 또한 원주라는 지역적 공간의 특성도 눈에 들어오고 그곳의 문화적 환경과 분위기 등을 알게되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제가 할 일이 조금씩 부각되었습니다. 박영택_ 원주에 가신 이후 발표된 작업들에서 눈에 띄는 것은 무엇보다도 몸입니다. 환경과 몸이 오버랩되는 작품이었는데 그러니까 몸에서 무엇인가가 돋아나고 있는가 하면 몸과 공간이 분리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김진열_ 당연히 원주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갖다 보니까 그들의 몸 속에 있는 생각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과정에서 나온 방법이었습니다. 모를 심는 농부, 생선을 팔고 있는 할머니의 생각 등을 충실하게 표현하려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박영택_ 이른바 원주시외버스터미널 시리즈를 얘기해 봐야겠군요. 오랫동안 그곳을 소재로 해서 많은 그림을 그려오셨는데 그 장소가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김진열_ 무엇보다도 그 장소는 가장 '원주적'입니다. 원주는 세상의 변방입니다. 원주문화의 빈곤은 원주가 머무름, 고여있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지고 찢어지는 동네이기 때문입니다. 정신없이 질주하는 산업사회의 현상에서 소외되어 있되 결국 그들이 우리사회의 중심축이고 요새 말로 느림이 있는 그런 장소이지요. 그들은 바로 우리들의 외삼촌,나와 무척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그런 친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존재들이고 경제적으로도 잘나가는 사람들이 못된다는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노인들, 여자들이기도 하죠. 제 생각에는 이들이 행복해져야 세상이 풀리고 이들이 깨우쳐야 세상이 깨우쳐진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 현실의 모든 모순을 총체적으로 집약하고 있는 존재들이 아닐까 생각하죠. 그리고 그것은 결국 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박영택_ 항상 사람에 대한 관심을 지속해오고 계십니다만 사람을 표현하는 일과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갖는 문제, 그리고 미술의 문제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김진열_ 내가 갖고 있는 삶의 이유와 세상, 그리고 그림, 이 세 가지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과정에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발언하고 표현한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그들이 가장 사랑스럽기 때문에 그립니다. 애정을 포기 할 수 없죠. 박영택_ 지나치게 특정한 지역, 원주라는 공간과 그 속의 사람들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까요? 김진열_ 제가 이 지역에 사니까 나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문제와 결부되어있습니다. 저는 원주에 살면서 실천적인데 관여할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일상 생활에서 그 실천적인 태도와 연관지어 그 의미가 진전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환경운동, 교수협의회, 출판, 시민대학, 지역문화 등에 관여하면서 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민간인들이 생활현장에서 미술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생명시민작가회'를 지도하고 있으며 최근 평론원주라는 책의 발행에 관여하면서 지역문화운동을 벌여 나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같은 활동을 하면서 이를 그림과 병행하고 있습니다. 결국 내 자신의 깨우침에 따라서 얼마든지 내 작품의 가치는 확장된다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그릴 여지는무궁무진하다는 느낌입니다. 소재주의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지만 원주시외버스터미날을 통해 세계와 만나고 싶습니다. 박영택_ 자신의 작업을 말씀하실 때마다 정직성이나 진실성이란 말씀을 자주 하시는데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김진열_ 정서적 체험, 양심의 회복같은 것이겠지요. 박영택_ 최근 원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그린 그림들은 어떤 건가요? 김진열_ 요새는 버스터미널에서 직접 드로잉을 합니다. 스케치를 해서 붓질이나 염색한 원주한지에 복사를 해 붙여나가죠. 자연스럽게 그 형태들이 엉켜서 만들어내는 구성이 흥미롭습니다. 대강 갖다 붙이는 데서 연유하는 그 편안함, 집착에서 해방된 느낌이 좋습니다. 그것이 세상 사는 이치인것 같아요.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의 정서 중에 어긋나면서도 하나로 결합되는 그런 우연적이고 무리없는 결합이 대단히 자연스러운 미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최근에 갖게 됩니다.
박영택_ 무엇보다도 선생님의 작품은 매체와 매체를 다루는 방법론등에서 자신의 체질, 메시지를 적절하게 조화해내고 있다는 생각인데, 내용과 형식의 결합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김진열_ 저는 나의 작업에서 무엇보다도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가위로 자를 때 나의 몸의 리듬, 호흡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랄까. 클리어하고 날카로운 분위기와 느낌, 동시에 덕지덕지한 느낌이 별개가 아니라 내 몸 속에서 기묘하게 어우러지는 반응을 하죠. 그것을 그림으로 풀어나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를 때 통쾌한 느낌, 두툼하게 붙여나갈 때 내 몸의 체적과 비슷하게 두툼해지는 만족을 경험합니다. 산다는 것이 세상과 소통해 가는 일이고 나를 세상에 던지며 그 반응을 풀어나가는 것 아닙니까. 나와 비슷한 사람들, 나의 진실성에 적합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얘기를 하고 싶은 거죠. 그리고 저는 작업하는 이유, 살아가는 이유가 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일치가 않되면 부자연스런것 아닙니까. 박영택_ 이런 시대에 그림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진열_ 끊임없이 나를 되돌아 보면서 용기있게 밀고 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의 그림은 나의 거울이자. 나의 무덤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끊임없이 위로하면서 살아가야 하듯이, 그림을 따뜻하게 밀고 나가면서 세상과 사람들을 보듬어 나가야겠죠. 삶을 얘기하면서 소년기 때의 충격, 프란다스의 개에 등장하는 네로의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공교롭게도 청소년기에 내가 만난 네로는 억압과 광기의 또다른 네로였습니다. 나는 내 작품에서 두 얼굴울 한 네로를 그려내고있습니다. 박영택_ 첫 개인전 자리로 20여년 만에 돌아오는 감회가 궁금합니다. 또한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지요? 김진열_ 첫 개인전을 할 때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지키게 되어 기쁩니다. 갈채가 없어도 진정함이 있는 이길로 나아가겠다던 나와의 약속을 지키게 되어 자랑스럽습니다. 초심자의 입장으로 돌아온 것에 자부심을 갖습니다. 이제는 자연스럽고 부드러워진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것이 최고의 덕목 아닐까요? 사회와 현실을 보는 눈도 여유가 생긴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작품하고 내 삶이 함께 진전되는 그런 식으로 해나가고 싶어요. 같이 일체화 되면서 나가는 것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고독하게 해나갈 일들입니다. 항상 새로운 지평에 서고 싶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은 거죠. 저는 그런 감회가 좋아요. 20년 뒤에도 역시 이곳 첫 개인전 때의 쓸쓸한 신선함을 회고하고 싶습니다. 집단은 활기차되 개인의 삶은 고요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박영택·김진열 대담
Vol.20011004a | 김진열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