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real Time Video

한·유럽의 비디오 작가展   2001_0928 ▶ 2001_1020 / 무휴

김수자_바느질하며 걷기-이스탄불_비디오영상_1997

참여작가 David Claerbout_Laetitia Benat_Dominique Gonzalez-Foerster Marine Hugonnier_Ange Leccia_Georges Tony Stoll Marcel Odenbach_Rosemarie Trockel 김수자_김영진 Darren Almond_Annika Larsson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0번지 Tel. 02_760_4608

비디오/비실제적 시간의 담론

시간은 비밀이다 - 실체가 없으면서 전지전능하다_토마스 만 시간은 단지 시간과는 무관한 어떤 것을 파악하려는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_페르난도 페쏘아

시간이란 무엇인가? 철학이 생겨난 뒤로 철학은 계속 이 문제를 다루어 왔으며 오늘날도 여전히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최고로 복잡한 수수께끼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시간을 탐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과의 만남을 위해 우리 스스로를 탐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시간 의식은 주위 세계의 발전과정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전개된다. 우리는 과거의 관점에서 확실성과 질서를 창조해 낸다. 우리가 측정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변화, 원동력, 과정을 측정하면서 이것을 시간이라 칭한다. 시간은 대상이 아니라 변화하는 세계에서 안정성을 획득하고 만들어내기 위해 방향을 정해주는 수단이다. 우리는 시간으로 인간의 체험을 규범화한다. 시간을 통해서 질서를 만드는 모든 사람들은 개인과 공동체와 사회에 부분적으로는 극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시각적 사건을 창출해낸다. 그래서 시간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그물망이며 동시에 인간을 가두는 그물망이기도 하다. 이미 존재하며 우리가 그것에 따라야만 하는, 객관적으로 확고부동하며 불변의 시간구조란 없다. 우리는 스스로 시간 구조를 만들어 낼 능력이 있으며 이런 능력을 활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나의 시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시간들이 있다. 모든 시간은 동일하지 않다. 우리는 빠름, 느림, 활력, 평온, 변화, 안정성 등을 구별할 줄 안다. 사건, 과정, 체계 등에 각자 그들 고유의 시간이 있다. ● 일출과 일몰 사계의 변화 등 자연현상을 바탕으로 일정한 주기의 반복이라는 자연섭리에 입각해 정립된 근대 이전의 시간관념은 시, 분, 초를 물리적으로 나누는 근대 이후의 시간관념과 같지 않다. 농업이 지배하던 근대이전의 시간은 자연의 운행과 관련하여 대체적인 단위로 측정하였으나 르네상스 이후 나타난 근대적 의미의 추상적 시간은 분, 초도 모자라 초 이하 단위로 재고 이를 통해 인간을 통제한다. 근대의 자연과학은 시간의 개념을 물리적 실체로 파악하려 하였고, 절대적 시간을 규명하려는 사고가 우세했다. 뉴우튼은 시공간은 절대적인 것이며 또한 각기 독립적 차원을 가지고 있다고 규정하였고 시간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일반적으로 물리학적 시간이란 주기적 과정을 세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적 거리를 측정하는 것이다. 물리학은 시간의 균일성에 대한 정의를 위해 자연적 사계에 의한 정의, 역학의 법칙에 의한 정의, 그리고 빛의 운동을 이용한 정의를 사용한다. 그러나 시간은 절대적 단위로 구명되어질 수 없다. 아인쉬타인에 이르면 시간과 공간은 서로 결부되어 비선형적(非線型的)으로 상호변화하는 하나의 계를 이루며 이로써 시·공간과 물질은 새로운 방식의 관계를 맺는다.

김영진_천체 Globe_비디오 영상_00:12:00_2001

서구의 철학은 근대 과학의 성과를 영유하게 되면서 과학에서 객관화된 실재였던 시간의 문제를 현상과 더불어 주관 내부로 끌어들였다. 근대 과학이 제안한 외재적인 시간을 이제 주관의 내부에까지 끌어들임으로써 현상은 물론 경험과 판단의 주체를 그 절대적 시간구조 속으로 끌어들인 것을 뜻한다. 칸트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은 경험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경험 이전에 이미 있어야하는 조건이며 직관형식이었다. 후설과 베르그송, 하이데거 등에 의해 시간성의 문제는 더욱더 개념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 후설은 주체와 대상의 이분에 따른 철학적 난제를 넘어서기 위해 양자의 관계를 지향성으로 개념화하며, 그 지향성의 메커니즘 안에서 지향된 대상(noema)과 지향작용(noesis)를 통해 사물의 의미를 포착한다. 그는 시간이 경험하는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 체험되는 가를 통해서 시간의 의미를 추출하려 했다. 베르그송은 금세기 모든 예술가들에게 시간개념에 관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시간을 형이상학의 중심에 놓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실재는 흐름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기본적으로 시간의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그는 「물질과 기억」(1896)에서 '시간의 본질은 흘러간다는 것'으로 보았다, 내가 나의 현재라고 칭하는 것은 나의 과거의 한 족적이며 미래에 있어 또 다른 것이다. 이러한 명제는 작가들과 비평가들을 사로잡았다. 하이데거나 프랑스 구조주의 자들의 입장에 따르면 인간이란 어느 경우이든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특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 '세계-내-존재(In -der -Welt-Sein)' (하이데거)인 것이다. 인간이나 개인, 자아라는 범주를 설정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특정한 역사와 사회의 규정성이 새겨진 특정한 역사적 존재이며, 그런 점에서 '불순한' 존재요 주체다. ● 그렇다면 순수주체와 세계, 순수자아와 시간/공간 간의 관계를 설정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자신의 전제를 부정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피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세계, 환경, 시간/공간과 관계를 맺는 한 어떤 단일한 주체나 인간이 아니며, 이미 다수의 이질적인 개인들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언제나 개인들 간의 충돌과 섞임, 혹은 침투와 교차, 그리고 개인들의 특정한 배열들이 불가피하다. 이런 점에서 순수주체 순수자아 개념이 전제하는 인간과 시·공간의 관계란 불가능한 것이거나 특정한 인간을 순수자아에 대입하는 자의성을 감수해야한다. 결국 시간이란 그것을 영유하는 사람들 개개인의 지각과 판단 및 활동에 일정한 효과를 갖는 다는 점에서, 불순하고, 복수적인 속성이 되고 만다. 현대에 이르면 단일한 시·공간성이 해체되고 시·공간의 복합에 의한 체험의 복수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시간이란 사회의 외부적 강제를 내부적 규제로 전환시키는 일종의 사회적 제도로, 또 사회구성원들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회적 상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간은 급속도로 권력화, 제도화 되어감으로써 많은 일반인들의 시간을 제도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속성이 되기까지 이르렀다.

로제마리 트로켈_이본느_비디오 영상_00:14:00_1997

시간의 문제는 현대예술의 중심과제이며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매체예술인 비디오 아트에 오면 그 중핵을 이루게 된다. 안-마리 뒤게(Anne-Marie Duguet)는 "20세기 후반의 미술에 있어 시간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로서만이 아니라 예술작품 본성을 구성하는 매개변수로 등장하였다"고 언급한 바 있다. 퍼포먼스와 이벤트, 해프닝, 설치미술과 함께 비디오 아트는 시간의 문제를 본질로 하는 중심적 예술형식이 되었다. 또한 최근 컴퓨터를 기조로 한 인터액티브한 예술은 관람자와 작품 사이의 시간의 지연을 제공하고 있다. 미디어 아트는 금세기에 걸친 사진술의 발달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개인적이며 동시에 역사적인 속성을 가진 시간과 그 기억은 사진의 실체가 된다. 정지영상과 동영상의 이미지를 가진 이 사진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시간의 이미지를 시각화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소개해주었다. 사진을 통해 인간은 시간을 파악하거나 재구성하거나 그것에 관한 다양성을 창조함으로써 시간 자체의 복수성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 1878년 에드워드 머브리지(Edward Merbridge)가 말의 동작을 찍어 동작의 시퀀스를 재창조한 최초의 사진은 이후 미래파의 작가들과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1913)에 영향을 주었다. 다다와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있어서도 시간에 대한 연구는 작품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영화의 출현으로 시간에 대한 탐구는 더욱더 활성화되기 시작하는데, 특히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시기의 아이젠스타인(Sergey Eisenstein)의 작품은 역동적 상호작용의 분명한 산물로서 예술과 테크놀로지 그리고 생활 사이를 연관짓는 새로운 타입의 미디어 아트를 탄생시켰다. 수학과 엔지니어링과 예술을 훈련받은 그의 작업의 역동적인 이미지는 다양한 카메라 앵글과 철학적인 몽타주 편집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후 플럭서스의 예술가들을 거치며 1960년대 중반 텔레비전과 1/2인치 포터블 비디오 카메라의 등장으로 영화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비디오 아트가 등장하게 된다. ● 샌프란시스코 근대미술관의 큐레이터인 크리스틴 힐(Christine Hill)은 "비디오 아트의 일세대들에 의해 만들어진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텔레비쥬얼한 사회와의 비평적 관계를 가지기 위한 것이었다."고 언급했다. 비록 정확한 비디오 아트의 기원에 관한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초기에는 두 타입의 비디오가 실현되었다. 하나는 대안적인 다큐멘터리 뉴스 리포트와 연결된 행동주의적 다큐멘터리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적인 비디오작업이 있었다. 전자는 소위 정치적 성향이 강한 게릴라 비디오그래퍼들에 의해 추진된 작업들이었으며 후자는 예술적 기원을 가진 순수 비디오였다. 순수 비디오 예술은 상업적인 TV의 전반적인 기술을 사용하고 있지만, 상업TV의 기본적 법칙과 원칙들의 상당부분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예술로서의 순수 비디오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1965년 한국출신의 플럭서스 그룹의 백남준이 처음으로 소니 폴타팩(Sony Portapak) 비디오 셋트를 구입하여 뉴욕 5번가를 따라 벌어진 교황의 수행자들의 행렬을 촬영한 뒤, 그 날 저녁 카페 고고(the Cafe a Go Go)에서 이 결과를 상영한 사건에서 비롯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 백남준(Nam June Paik), 댄 그래험(Dan Graham), 부르스 노만(Bruce Nauman), 조안 조나스(Joan Jonas), 그리고 죤 발데사리(John Baldessary)등과 같은 초기 비디오 아티스들에게 있어 비디오가 지닌 이미지의 즉각적 전달능력은 가장 어필하는 요소였다. 이 예술가들은 대부분 시간과 관련된 주제들에 몰두하였다. 비디오는 즉각적으로 녹화하며 투사하는 반면, 영화는 조작을 가해야하며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험에 따르면 비디오는 자생의 자료를 즉시, 그리고 현재적 환경 하에서 피드백 한다. 영화는 묵상적이며 '거리가 있다'. 그것은 관객들을 현재의 실재로부터 격리시키며 그를 방관자로 만든다. ● 비디오는 본질적으로 사실성, 즉각성, 반사성, 녹화와 투사의 동시적 피드백 등의 특질을 가진다. 비디오 모니터에 나타나는 이미지의 비물질화된 즉시성과 매체의 생생한 피드백 체계가 가지는 반사적 특성은 비디오 아트를 인식하는 대표적 방식이다. 초기 비디오 예술가들은 비디오를 하나의 기록 매체로 사용하거나 추상표현주의 이후 새로운 회화적 도구와 같은 하나의 새로운 표현매체로 인식되기도 하였는데, 대체적으로 모더니즘적 문맥에서 비디오 매체자체의 본질적 탐구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탐구는 개념예술과 관련을 맺으며 동어반복적인 특질을 보이기도 했다. 동시에 비디오 퍼포먼스와 같이 비디오아트에 매개되는 신체성의 문제를 통해 확대된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인식함으로써 비디오의 나르시스적 미학과 자기분열적 특질을 통해 심리적 차원의 어법을 심화 확대 하기도하였다. 비디오 아트는 퍼포먼스나 인스톨레이션 등 좀더 확대된 어법들과 만남으로 비디오 아트가 추구하던 시간성의 개념들도 커다란 변화를 겪게된다. 이성적 사유에 의한 비디오매체의 탐구로부터 비이성, 반이성, 탈이성적 어법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성적인 것은 대부분 가속, 시간통제, 시간 압축으로 이끌린다. 그러나 비이성적, 반이성적 사유 하에서는 환상성, 무의식, 감속, 이탈, 우회의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어법상의 변화는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으며, TV라는 전자적 거울에서 생성되는 이미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통해 그 지경이 심화·확대되어졌다. ● 일부 1970년대 예술가들은 개념주의와의 관련하에 언어에 대한 의미를 결부시키는 작업을 한다. 게리 힐(Gerry Hill )은 언어와 텍스트들을 다른 작가들이 비디오 아트에서 음악을 사용하는 것처럼 완전한 양식으로 사용한다. 1980-90년대 비디오 아티스트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정체성(특히 문화적 혹은 性的)을 질문하는 개인적 서사성과 정치적 자유에 대한 관심으로 경도되고 있다. 특히 빌 비올라(Bill Viola)에게 비디오는 다른 작가들보다는 더욱더 개인적인 매체로 의미를 가진다. 1990년대의 젊은 비디오 아티스들 사이에서 특히 피필로티 리츠스크(Pipilotti Ristsk), 필리스 발디노(Phyllis Baldino)등과 같은 여성작가들은 1970년대 로우 테크 행위예술 스타일로 회귀하는 경향이 짙다. ● 종래의 비디오 아트에 대한 접근 방식은 대체로 비디오를 비평하기 위해 매체를 탐구하는 입장, 비디오의 심리적 지속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비디오 메카니즘에 대해 물리적 공격을 가하는 입장, 매체를 회화나 조각처럼 하나의 재료로 사용하는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입장들은 이성적 사유를 근거로 실재의 구현, 매체의 자기 검증과 분석적 사유를 근간으로 하고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종래의 접근 방식을 탈피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종래의 접근 방식을 중첩시키거나 비디오가 드러내는 이미지의 문제들을 탈실제, 기호, 상징으로 이해하기도하며, 정치적, 성적 문제 등과 같은 총체 문화적 차원으로 이를 풀어가기도 한다. 또한 광고나 영화, 애니메이션 등 대중예술과의 상관성을 통해 비디오 아트의 새로운 영역과 의미를 구축해 가기도 한다.

앙쥬 레시아_바다_비디오 영상_00:10:00_2001

이번 전시는 비디오 아트의 중심문제인 시간성에 초점을 맞추어 최근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는 비디오 아트의 대표적 성향들을 살펴보기 위한 목적에서 기획되었다.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10인의 작가들과 한국작가 2인의 작품들은 모두가 비디오 아트의 확장된 개념을 탐구한다. 유럽적 정서를 기반으로 한 이번 전시 작품들은 대체로 싱글채널 비디오나 비디오 인스톨레이션의 형식을 가지는 것으로서, 종래의 '실시간(real time)'의 개념에 반하거나 종래의 개념을 유보하는 공통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앙리 르페브르(Lefebvre H.)는 시간과 공간을 '사회적 권력의 원천'으로 명명한 바 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획일적인 개념은 사회를 통제하는 권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점인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작가들의 다양한 접근 방식은 사회적 권력으로 작용하는 관습적이고 제도적인 시간개념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행위이기도 하다. ● 작가들의 작품들은 현실과 비현실의 중첩,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혼재, 시간의 흐름에 대한 역전, 파편적 시간들의 직조 등 리얼타임에 대한 의문과 의도적인 모호함을 드러내거나 영화 등 기존 영상이미지의 패러디를 통한 현재적 시간성의 재해석 등을 그 특성으로 한다. 이들 작품들은 규정적이며 실재적인 시간 개념인 '리얼 타임'에 대해 시간의 비규정성과 비실재성을 표방하고 있다. ● 초대된 작품들은 몇 개의 범주로 대별해 보면, 우선 괴기성이나 환상성, 무의식과 상상의 세계 등 같은 초현실적 이미지들과 관련된 작품들을 들 수 있다. 대런 알몬드(Darren Almond)의 「유령열차 Ghost-train」는 블랙홀과 같은 공간을 통과하는 열차의 움직임이라는 실시간의 흐름을 흑백의 콘트라스트가 강조된 비유클리드적 공간개념과 연결시킴으로 현실 속에 잠재해 있는 환상성과 괴기성을 들추어냄으로써 비실재적 시간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으며, 래티시아 베나(Laetitia Benat)는 「검은 사나 Black Sanna」를 통해 개인이 체험한 특정한 자연의 미세한 시각적 이미지를 바람소리라는 청각적 요소와 결부시킨 세밀한 지각적 이미지를 통해 묘한 환상성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아니카 라손 (Annika Larsson)의 「개 Dog」는 개와 함께 산보하는 인물과의 우연한 조우에서 드러난 관찰자의 시각을 통해 작가의 무한한 상상력과 무의식적 상황들을 느린 촬영 기법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사소한 일상 속에 내재된 우연성과 함께 실재의 시간을 비틀거나 어긋나게 하고 있다. ● 둘째로 서로 다른 시공간의 혼융 및 파편화된 시간의 병치를 통해 정상적인 시간의 개념을 흐트러뜨리는 작업들을 들 수 있다. 다비드 클래르부(David Claerbout)의 「회상 2000 Retrospection 2000」은 재생사진의 기법을 통해 아날로그적 시간과 디지털적 시간을 혼융시켜 정태적 이미지의 과거를 현재 속으로 생생하게 복원시킨다. 박제된 과거에 대한 회상이 현실로 되살아났다 다시 과거의 시간 속으로 사라져 간다. 마르셀 오덴바흐의(Marcel Odenbach)의 「집단본능 The Herd Instinct」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등을 대고 붙어있는 하나의 스크린에 서로 다른 방향에서 두 개의 프로젝터로 터널을 통과하는 짐승의 무리들의 이동모습을 터널의 입구와 출구에서 포착한 장면으로 동시에 투사한다. 이를 통해 두 스크린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간격과 동일 공간에서 경험하는 비실재적 시간의 경험을 제시함으로 시간을 공간화한다. 또한 소 떼 이미지와 함께 간헐적으로 오버랩이 되고 있는 정치와 역사적 사건들의 이미지는 현재 속에 내재된 집적된 시간성과 그에 내재된 집단성의 본능의 문제를 드러낸다. ● 김수자와 도미니크 곤잘레즈 포스테르의 작품들에서는 이질적인 시·공간의 혼융을 통한 동일공간의 괴멸을 꾀한다. 김수자는 「바느질하며 걷기 Sewing into Walking」을 통해 두 개의 모니터로 행인들의 이동을 주시하고 서있는 관찰자로서의 작가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러나 하나의 모니터에서는 거리의 소음이라는 실시간적 음향이, 다른 하나의 모니터에서는 수도승의 찬송소리라는 비실제적 음향이 결부되어있어 시공간에 대한 교란이 일어나게 하고 있다. 서로 다른 시간들을 바느질하듯 그 심리적 궤적을 꿰매어 제시함으로 시공간에 대한 동양적 환상의 세계를 제시한다. 이에 반해 도미니크 곤잘레즈 포스테르의 「리오 Riyo」는 도쿄의 장면과 리오 강의 뚝방 길을 이동 촬영한 화면 위에 장면과는 무관한 일본 소녀들의 대화를 음향으로 병치시켜 서로 다른 시공간을 연관시킴으로 관습적 시간개념을 무화시키고 있다. ● 셋째 영화의 이미지들을 활용한 작품들이 하나의 영화적 시간의 차용을 통한 새로운 시간의 창출을 꾀하고 있다. 영화적 시간이나 기법의 차용은 이 전시의 중요한 기획동기 중 하나인데, 최근 비디오 아티스트들이 영화적 기법을 통해 영화의 어법과는 다른 자신들의 비디오 아트의 독자적 어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환영과 비디오 아트의 실재성 사이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미학적 문제들은 오늘날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마린 위고니에(Marine Hugonnier)의 「충격 21.05.99, 11:02 Impact 21.05.99, 11:02」은 과속의 위험성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 촬영장면을 자신의 작품에 활용하고 있다. 장면과 장면사이에 음향만이 존재하는 검은색 화면을 배치하고 다음 화면에는 이전 화면의 음향과 연관된 이미지를 배치하여 원래의 영화적 흐름을 변형시킴으로써 픽션을 재구성해 냄은 물론, 사건의 흐름을 단절시키는 이미지 없는 화면에 관객의 상상력을 개입시켜 환영(illusion)으로서의 영화가 가진 허구성의 시간을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시간으로 창출하고 있다. 앙쥬 레시아(Ange Leccia)의 「미친 피에로 Pierrot Le Fou」는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의 동일 제목의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패러디하여 반복 재생하고 있는데, 랭보(Arthur Rimbaud)의 시구와 함께 반복되는 그의 화면은 스토리보다는 이미지의 반복과 왜곡을 통해 비현실적인 시간성의 문제를 새롭게 제기한다. 그의 「바다 La Mer」 역시 「미친 피에로 」에 등장하는 바다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파도의 이미지를 왜곡 과장시킴으로 실시간에서 느끼지 못하는 상상력과 상징성을 획득해내고 있다. 영화적 시간을 활용한 작품들의 경우 핫 미디어인 영화를 쿨 미디어인 비디오로 전환시킴으로 상상력과 상징성이 강조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 마지막으로 신체성과 개인적 서사(personal narrative)를 강조함으로써 관념적 시간을 해체하는 개인적인 시간성과 시간의 총체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들 수 있다. 김영진의 「천체 Globe」는 확장된 감각기관으로서의 비디오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자신이 소년시절 가졌던 독특한 경험을 되살려내고 있는데, 관찰자의 몸에 부착된 비디오와 피관찰자인 대상간에 관계를 광각 렌즈를 통해 상호관찰의 관계로 조성함으로써 물리적인 실재성과 심리적 실재성, 객관적 시간과 주관적 시간 사이의 상호침투를 유도해내고 있다. 로제마리 트로켈(Rosemarie Trockel)의 「이본느 Yvonne」는 파편적인 일상적 사건들의 에피소드를 단선적으로 연결시켜 제시하는데, 이 이질적인 시간들은 그녀의 작업에 중심 축이 되어온 편물과 직조란 공통의 요소를 가지고 직조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질적 시간의 직조는 관념화된 시간을 뒤섞어 모호하게 자신의 체험 속에 녹아진 개인적 서술을 드러냄은 물론, 제도적인 시간의 주변부를 서성이게 한다. 죠르쥬 토니 스톨(Georges Tony Stoll)은 「비정상적인 추상 Unusual Abstraction」을 통해 서로 다른 세 가지의 신체적 행위를 드러냄으로 총체적 시간의 문제를 제기한다. 슬라이드와 비디오의 이미지가 중첩과 소멸을 무작위로 반복하는데, 서로 상반된 시간성을 동일 공간에 무작위로 도입함으로 신체로 체험되는 다양하며 비규정적인 시간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 무작위성은 신체를 통한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으로서 결국 사적인 서술기법을 통해 실제의 규명을 유보한 상태로 총체화시킴으로 기존의 시간 개념을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 비디오는 진행이 무시된 시간이어서 비디오에 녹화된 미세한 사건들이 하나의 붕괴된 공간 속에서 전진하기도 후퇴하기도 한다. 사실과 생각이 유추를 통해 합성되며 주체와 객체라는 이원적인 요소들을 용해시키는 매체이기도 하다. 디지털 매체화의 진전으로 전자매체인 TV라는 전자거울을 통한 전자적 의사소통이 확대됨으로 비디오 아트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가능성의 폭이 확장되고 있다. 이번 전시 "Unreal Time Video"는 기존의 시공간 개념을 압축하고 해체함으로써 제도화된 관념적 시간으로부터 지속적인 일탈과 위반을 꾀한다. 끝없이 서로 다른 시간과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하여... ■ 김찬동

Vol.20011001a | Unreal Time Video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