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린 시립갤러리(City Gallery,Tallinn), 에스토니아
1. Phenomenon - Phainomena ● 시골 들녘에 이슬 머금은 풀잎, 회색으로 둘러친 아파트, 학교교정 사이에 몇 개의 초록색,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마른 낙엽..., 우리는 이것들을 매일 스쳐지나가면서도, 주목하지 않는 세계로 남겨 놓고 잇다. 어떠한 모양인지, 어찌 말라가는지 알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한 구석에서 '있을'뿐이다. 정상곤은 알 필요조차 없었던 하찮은 풀잎들을 모아서, 여지 것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Photofix를 통하여 잎을 확대하고, photoshop으로 색을 보정, 새롭게 연출하여, 우리에게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던 새 세계를 '보여준다'(phaino). 이 세계는 쉽게 손으로 만져질 수 있었지만, 볼 수 없었다. 흔한 대상의 흔하지 않은 영상을 제시하는 그의 작업은 인간의 시지각 능력을 벗어나는 비가시적 세계를 가시화 시켜 새로운 대상 세계의 현상을 주목하게 한다. ● 금번 정상곤의 전시명은 'Phenomenon'이다. 여기서 그가 제시한 Phenomenon 이라는 용어를 어원을 통하여 좀 더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어원은 그리스어로 Phainomena(하늘의 현상) 또는 phainesthai(나타나다)이다. 이들 단어의 모태가 되는 동사형을 찾아보면, phaino로서, 그의 작업과정 전체와 특성을 설명하고 개념화하는데 유용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 치 않은 고대 그리스어를 참조하기로 한다. ● Phaino의 첫 번째 의미는 '빛을 비추다. 밝히다'이다. 이것은 그의 작업의 첫 번째 과정인 photofix에서 표본식물이나 기타 대상을 선명하게 포착하기 위하여 빛을 쪼이는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모든 '현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각 세계를 전제로 한다. 시각 세계는 촉감으로 지각되는 세계와 달리 빛을 필요로 하며, 이때 빛은 직관을 가능하게 하는 필연적인 요소이다. 이 빛은 그의 작품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작업조건이 되며, 새로운 영상을 얻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 둘째로 이 단어는 '나타내다, 보여주다, 가시화 시키다'등을 뜻한다. 빛을 비춤으로써, 볼 수 없었던 세계를 우리 앞에 가시화 시키는 과정을 지시한다. Photofix와 컴퓨터 모니터를 통하여, 그리고 photoshop으로 제작된 결과물을 인쇄하여 우리 앞에 가져오는 그의 작업 과정을 이야기한다. ● 셋째, '알게하다'를 뜻한다. Photofix로 읽은 그의 영상은 우리가 미쳐 알지 못했던 색상과 형태를 지각하게 하고, 마침내,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려준다'. 이 단어는 자동사로, '스스로 나타나다, 스스로 빛을 발하다, 현재화하다' 등의 뜻도 있어서, 그의 작업을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뜻에서부터 '현상'이라는 금번 전시의 의의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상'이라는 금번 전시의 의의를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상'이라는 주제가 바로 '존재'를 드러내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것은 '무식'과 '몰지각'이 아닌, '지각'과 아는 과정으로 향하는 것이며, 멀리서 가까이 가져오는 과정이고, 존재의 본질적인 문제를 던지는 것이라 하겠다. 2. 빈 공간 = 없음(無) ● 정상곤의 작업에서는 순수한 의미의 '빈'공간은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부분이 '밝은'빛과 렌즈에 의해 잡힌 입자들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빈공간이지만, 눈에 안보이는 물체로 꽉채워진 상태를 보여준다. Photofix의 렌즈와 대상사이에는 사람들이 짐작할 수 없었던 엄청난 공간이 있다. 렌즈는 대상을 잡아내면서도, 대상과 렌즈사이의 공간, 그리고 대상이 놓여진 판과 그 대상외부의 여백 역시 읽어낸다. 이들 빈 공간에는 부유하는 아주 조그만 미립자와 같은 먼지들이 화면에서 엄연한 대상으로 물질화 된다. 이 점은 빈 공간을 '물질화', '현상화'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없음'에 가까운 대상을 제시함으로써, '미시적 세계'를 보여주고, 일상 속 믿음 중 하나인 '있다', '존재한다'라는 의미를 반성하게 한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일련의 작품 '현상'을 통하여, 지각하지 못한 실재하는 여러 존재들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비어있음'은 없음이 아니라, 엄연히 '있음'을 의미하고, 있음의 양태는 빈 공간 사이에 듬성 듬성하게 얽혀진 존재들의 관계가 존재한다. 그의 빈 공간은 다르게 보면, 사물들이 '드문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rarus). ● 이 '드문공간'에 듬성 듬성 '있는' 작고 보잘 것 없는 미시적 존재들을 제시함으로서, 그는 항구한 초월적 '존재'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덧없는 유한적 존재의 문제를 제시한다. 이 존재의 문제는 과거 스콜라 철학자들의 존재에 있어서 신적인 개념보다, 가치적으로 하위개념으로 제시한 '유한적 존재'(esse participatum)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그의 가치관이 어떤 절대자(esse per essentiam)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덧없음'을 강조하여, '존재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제기한다. ● 다른 측면에서 그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미시적 세계는 우리의 인식력의 한계를 설명하는 것이고, 이 한계는 인식의 '주체자'로서의 한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일전에 필자와 작업에 대하여 대화하면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 "우리의 지각능력을 믿을 수 없다. 오히려 카메라 눈이나, photofix의 렌즈가 더욱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줄지 모른다." 이 말에서, 우리는 능동적인 인식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인 감상자로서의 주체자 역할을 한정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말놀이 한다면, subject가 아니라, 'sub-ject'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지각의 주체는 종속적 존재이며, 유한한 존재적 특성을 더욱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 그러한 생각은 그의 '지각'된 세계의 현상이 인식된, 의식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사물 자체의 독자성의 세계라는 점에서 그의 작품의 철학적 입장을 살펴볼 수 있다. ● 그는 카메라의 눈을 더 믿고, 그 기계적 렌즈를 통하여 잡히는 현상(現象)을 바로 인식하며, '프린트'로 그 현상을 현상(現像)하고 있다. 독립된 현상에 부가하여, 예술가로서의 자율적인 행위는 photoshop을 이용한 색조정과 오려내기, 붙이기, 복사 등이 있으며, 이 주관적 행위에서도, '현상'을 반복하여 제시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의식적 작용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그의 두가지의 현상의 수용과 현상의 운용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그의 작업에 있어서의 진리 근거는 독립적인 현상에 잇다는 점을 강조할 수 있다.
3. 출력(OUT-PUT/PRINT) - RGB 와 CMYK 모드 ● 전 작업과정이 디지털화 된 그의 작업은 출력 역시 그러하다. 출력은 주로 두방식, CMYK 모드와 RGB 모드로 이루어진다. RGB mode로 출력할 때 색 조합은 안료가 아닌 빛의 혼합방식으로 작업되는 것으로서, Red의 R, Green의 G, Blue의 B의 첫 자를 딴 약자이다. 즉 빨강과 초록, 파랑으로 빛의 삼원색을 말하며, CMYK 방식은 C는 Cyan(청색), M은 Magenta, Y는 Yellow, K는 black의 약자로 인쇄 안료의 기본색이다. ● 그의 작품, "현상 RGB Mode"는 RGB 방식으로 출력된 것인데, 빛의 삼원색 중 한가지씩 빼어서 제작된 것이다. 빨강색을 제거할 때, 푸른색 그림, 초록색을 뺏을 때, 붉은 계통의 핑크색의 평면, 파란색을 제거했을 때, 노란색으로 나타난다. 색상의 제시는 제시된 색의 보색이 제거되었을 때 이뤄진다. 즉 일정한 색은 그 보색의 '결여'로 이루어진다는 점이 '부정'개념을 주목할 수 있다. 보통 회화나 판화에서는 안료에만 의존한 혼합방식만 취하고 있으나, 정상곤의 작품은 그러한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빛의 색혼합방식을 부가하여, 그 조형적 의미, 이론적인 의미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4. 반복 ● 그는 채집한 견본과 작업사이에 관계를 이질적 존재양태로서 인식하면서도, 그 둘의 관계가 일족의 '반복'이라는 개념으로 보고 있다고 판단된다. 또한 풀잎과 줄기는 확대, 축소 또는 같은 크기로 반복되어 구성된다. 이 반복된 주제에 있어서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반복'은 개념의 작용이 아니라는 질 드뢰즈의 지적처럼, 그 행위는 현상의 인식문제가 개념적으로 의식화 되는 것이 아니라, '비개념적'지각을 제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반복된 형태는 현상의 끝없는 유,무의미의 관계를 초월하는 객관적 데이터로 제기되며, 작가의 주관적 임의성은 정보의 편집과정에 개입될 뿐이나, 그 기본 데이터의 원형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 그렇지만, 이렇게 기계적인 공정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업은 동양의 수묵화를 보듯, 활달하고 자유로운 형태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색채를 가지고 잇다. 오히려, 그의 창의적인 공간에 대한 좀더 심도있는 연구가 뒤따라야 될 것이며, 끝으로 그가 펼쳐놓은 현상세계의 힘은 바로 '미적 지각'임을 강조하고 싶고, 이 "미적 지각은 상상력의 지각이다"라는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 ■ 강태성
Vol.20010912a | 정상곤展 / CHUNGSANGGON / 鄭尙坤 / pr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