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Camber

에드워드 서머튼展   2001_0825 ▶ 2001_1013

에드워드 서머튼_Bad Camber_기념 촬영용 그림판_2001

대안공간 루프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3-3번지 B1 Tel. 02_3141_1377

언어의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의 차이 ● 하나의 길이 있고 한 줄로 늘어선 돌무더기가 '길을 막고 있다'. '길을 막고 있다'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전혀 틀리지 않고, 현상을 왜곡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느낄 것이다. 길 양편의 대지에는 잡풀과 나무의 숲이 있다. 길과 양편의 대지는 원래 하나의 대지였을 것이다. 길은 본래 존재하던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대지는 경계를 가지지 않는다. 대지 위에 길은 인위적인 경계일 뿐이다. 길과 대지. 여기서 길은 전통의 선(line), 코드화된 체계이고, 길을 막고 있는 돌들은 코드화된 체계에 속하지 않는 대지의 일부이며 순수한 차이들이다. 그래서 서머튼이라면 '돌들이 경계를 해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서머튼이 자신의 작업에 관한 텍스트에서 자신의 작업을 별로 언급하지 않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글을 인용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 문제는 더 이상 전통의 문제, 즉 하나의 선을 추구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분할의 문제, 한계들의 문제이다. 그것은 더 이상 항구적인 토대들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토대들, 토대들의 재구축으로써 기능하는 변환의 문제이다. ● 의미의 근원에 대한 관심의 끝에서 경험하게 되는 의미의 지워짐, 모든 굳건한 관념들의 토대의 불확실성 또는 부재의 확인. 들뢰즈의 철학만이 아니라 현대의 많은 철학적 사유들은 이러한 점을 확인하고자 한다.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의미를 전혀 자명하지 않은 자의적인 것이었을 뿐이라고 설명하는 이러한 철학들은 의미의 해체 후에 새로운 의미의 체계를 세우지 않는다. ● 사람들은 판단을 하기 위해- 그리고 그러한 판단들의 집합이 자아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파생적 가치들의 가치, 판단을 좌우하는 기본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치들에 대한 판단 없이 가치들을 매순간 새로이 결정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그것은 매력적인 문제이다. 일종의 진실에 관한 문제, 즉 고정되고 영원한 진리는 없다라는 것을 확인하며,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 있는, 혹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진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하나의 평가는 가치를 전제하고 그 가치로부터 현상을 평가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보다 깊게 다루자면, 가치야말로 평가를, 가치 자체가 파생하는 「평가의 관점」을 전제한다. 중요한 문제는 가치들의 가치, 가치가 발생하는 평가, 따라서 그것들의 창조의 문제이다. ● 이러한 철학을 원리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행위를 위해 의존하게 되는 가치를 개방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운 작업일 뿐만 아니라 오해와 오독의 가능성이 큰 작업이기도 하다. 한사람의 존재양식과 결부된 가치들의 미분화를 인정하는 것이 자유로운 개인에게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사고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 미분화된 가치들을 정당하게 가름하는 정치학의 존재는 가능한가? 차이에 근거한 원자들의 정치학은 자유의 최대치를 성취할 가능성을 열어 놓기도 하지만, 자유를 억압하고자 하는 권위적 힘에 의해 쉽게 무력해 질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반대가 쉽게 긍정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이러한 가치의 미분화를 거부하고 힘에 대항하기 위해 대항적 힘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어떤 힘은 이미 권위적일 수 있다. 그러한 힘은 대항적일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권력을 가진 힘이라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한 힘은 이미 스스로 절대적인 진리와 선을 보유한다. 그리고 이 절대적 선이 얼마든지 더 무서운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절대적 선과 진리가 가진 타자에게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유의 딜레마인가, 아니면 현실을 관념 속에서 이해할 때 생기는 관념의 허구인가?

에드워드 서머튼_Bad Camber_레코드 자켓 실물 설치_2001

어찌되었든 토대와 경계, 위계를 거부하는 들뢰즈의 철학은 의미의 부재를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근대의 철학이 굳건한 의미의 부재를 불안한 심정으로 경험했다면- 소외라는 개념은 이러한 근대의 경험을 집약해 놓고 있다- 현대철학은 굳건한 의미의 부재상황을 열린 가능성과 전복의 가능성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소외의 극복은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외라는 개념은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최상의 의미를 보유한 공동체를 가정하지만 현대철학은 고립된 원자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할 의미의 고리가 억압의 고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유에서 소외는 없다. 소외는 어떤 선과 정의를 가정한 상태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선과 악, 정의와 비정의의 경계에서 그 경계를 의심하고 우월한 하나의 관점을 제거하려는 철학 속에서 대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외의 존재는 대체의 가능성을 전제하는데, 그런 대체의 가능성으로서의 우월한 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소외는 부재하게 되는 것이다. ● 이러한 생각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지속적인 가치의 부재는 사회구조의 부패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가 수명이 다했다는 것을 말하고, 또한 기존의 가치의 허구성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일 뿐이다. 가치는 끊임없이 변모하고 생성되는 것이며, 가치가 모호하다면 그것은 가치가 생산적인 변형을 겪고 있다는 증거이다. 여기서 가치의 자유는 불안을 동반한 신경증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행동이 가진 에너지를 배출할 수 있는 기회이다. ● 이러한 관점은 근본적으로 미학적이다. 왜냐하면 이성보다 수많은 감각의 이질성을 더 신뢰하고 감각의 차이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삶을 미학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들뢰즈의 철학은 예술가의 철학이다. 에드워드 서머튼은 들뢰즈의 철학을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업의 자유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들뢰즈의 철학을 시각적 이미지로 재현함으로써 들뢰즈가 말하는 자유를 시각적 이미지로 전환하고자 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들뢰즈의 철학을 말하고 그것을 재현하려 노력한다고 해서, 그의 작업이 들뢰즈의 철학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각적 이미지의 섬세함과 언어의 섬세함은 분명히 다른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감각의 차이와 이 차이의 특권을 옹호하는 들뢰즈의 철학에서 특정한 들뢰즈적인 미술이 추론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적이라는 것은 차이를 나타내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이미 존재했을 수도 있고, 아직 미지의 영역에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서머튼은 '직접적으로'들뢰즈의 사상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코드가 그의 설명에 의해 확실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다. 이미지가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부속물 또는 복사물쯤으로 스스로 격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자면 나 자신은 들뢰즈가 말하는 탈경계와 차이의 긍정에서 오는 자유를 행복하게 받아들이고 있기보다는 경계의 모호함을 불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왜냐하면 자유는 현실적인 조건에 쉽게 구속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안성열

Vol.20010825a | 에드워드 서머튼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