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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1_0817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 구본주_김태헌_박경주_박은태_방정아 배영환_이중재_최병수_최평곤
성곡미술관 별관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02_737_7650
현장을 안고 시대의 강을 건너간다 ● 이행(移行)의 시대다. 지난 한 시절 우리는 변혁의 시대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지금 처절하게 개별화, 파편화, 일상화 된 주체의 시각으로 거스를 수 없는 이행을 지켜보고 있다. 선택의 문제만이 남은 것인가? 일생 가운데 이성과 감성의 균형이 최고조에 달해 있는 20대 이후 현장과 미술을 한 눈에 담아 온 젊은이들이 있다. 이들의 화두를 벗삼아 이행의 시대, 새로운 선택을 위한 숨고르기에 들어가보자.
새로운 선택의 시대 ● 80년대 보혁구도의 성과들이 90년대를 지내오면서, 어떻게 변질되어 왔는가에 관해 모두들 침묵하고 있다. 이른바 대안 부재의 시대다. 한국 사회는 지난 세기말, 최소한 극단적인 파시즘의 직접적인 폭력을 극복해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지금, 21세기형 식민지를 선도하는 글로벌리즘이 전 세계를 무섭게 옥죄어 오는 이 때에 탈정치화와 탈이데올로기라는 주류 담론에 걸맞게 모두들 참담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서 당대 현장의 문제에 눈감고 귀 막은 발랄하고, 명랑하며, 화려하고, 엽기적이며, 스펙터클한 천박 퍼레이드가 이어지는 사이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역에서 수구와 반개혁 세력이 전면적인 도전을 감행하는 시대역행의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다. 아무도 깃발 꽂고 산자여 따르라고 말하지 못하는 좌표 부재의 시대를 틈타, 대중이라는 우매한 양떼를 몰고 다니는 어설픈 목자들의 양치기 이벤트가 창궐하고 있다. ● 매우 구체적이고 선명한 목표를 가지고 미술이 현장과 결합하여 무언가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싹틔운 80년대라는 시대가 노스텔지어로 남아있다. 이후 10년의 세월을 두고 숨가쁘게 달려왔지만, 저 환멸의 90년대가 남긴 것은 텅 빈 거리에서 다시 팔을 걷어붙여야 하는 힘겨움이다. 21세기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아직 90년대의 미망 아래 놓여있다. 모두들 생존의 길로 접어들었다. 개별화, 파편화, 일상화의 기류는 젊은 날의 힘있던 미술가들을 혼란과 절망과 좌절로 밀어 넣었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 나간 '옛날의 젊은이들'과 그들을 비껴나가는 또 다른 담론들이 주류를 이룬 시대, 90년대를 넘어 아직도 초심을 버리지 않은 열정적인 삶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조차 이른바 386세대 담론의 상업화에 찌들고 있다. 어줍잖은 '상업주의 386세대 역할론'이 한참 전부터 가동되고 있다는 점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현장으로 ● 현장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온갖 'beyond와 'trans-와 'post-가 무게를 잡는 지금, 다시 현장성을 담보하는 시각이미지의 생산에 주목해 보자는 것이다. 물론 민중미술 이후 선명한 이슈 없이 진공상태를 이어온 한국 미술계가 '현장성이라는 모토로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단선적이며 계몽적인 도식을 꿈꾸는 로맨티스트의 자위 따위는 접어두자. ● 90년대 초에 전 세계를 강타한 정치적 빅뱅은 한국의 젊은 미술인들을 옥죄는 또 하나의 차별적 구도를 양산해왔다. 이른바 모더니즘 계열과 민중미술 계열이라는 다분히 작위적이며 범주오류를 띄고 있는 대립구도가 90년대를 지나면서 모호한 진영테제로 잔존해왔기 때문이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진영 개념을 해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잔치 이면에는 젊은 리얼리스트들의 고뇌가 서려있다. 이제 막 작가로서의 성장을 모색하던 시점에 잔치가 끝났다는 소문에 어리둥절하던 젊은 리얼리스트들은 제도권 미술공간의 높은 벽을 넘나들어야 했고, 미소설화의 다양성에 포박되어 하위문화, 환경미술, 해학의 미학, 신세대, 가족주의, 휴머니즘 등의 탈정치적인 피난처를 구하거나, 뉴미디어, 설치, 영상, 웹 등의 기능주의적인 개념으로 읽혀졌다. 그도 아니면 시대착오적인 사회부적응자로 남아 생존과 창작을 분리한 채 고군분투하며 지내왔다. 이들에게 현장성이라는 직설법은 은유법과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어법으로 받아들이기조차 버거운 현실의 벽으로 다가오기도 했을 것이다. ● 90년대 중후반 이후 미술계는 현장미술을 더 이상 신선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화두를 잃어버린 시대, 지난 시대를 망각하기 위해 몸부림쳤던 저주받은 시대를 건너오면서도 여전히 작가로서의 정치적 생명을 '현장 기반의 시각이미지 생산'에 두어온 작가들이 있다. 이 전시가 주목하는 현장성이란 작가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현실주의적 감각으로 현장에 대해 발언하고 개입해 들어가는 상황과 그 결과물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현장 2001 : 건.너.간.다』는 이러한 작업들이 대형미술축제나, 미술관과 갤러리를 중심으로 제도화된 미술계의 흐름에 있어 독특한 방식의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 그런 점에서 이 전시는 작가 재발굴 작업에 그 의미의 한 축을 두고 있기도 하다. 연령이 적고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신예작가들만이 발굴의 대상이 아니다. 앞서 말한 다양한 층위의 탈정치적이고 기능주의적인 개념들과 더불어 현장성이라는 정황에 주목해 다시 봄으로써, 해석의 여지를 넓히자는 것이다. 물론 이 전시의 참여 작가들도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전시를 해온 작가들이며, 현장성을 전제로 하는 미술이 제도권 미술의 상징인 미술관에 들어간다는 점은 일종의 아이러니일 수도 있다.
이 전시는 또한 작가가 생활인으로서의 생존의 현장과 작가로서의 정치적 현장을 일치시키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능한가라는 것을 묻고 있다. 사회적 재화와 용역의 직접적인 생산을 면제 받은 존재로서의 작가의 삶은 이중적인 구조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젊은 작가들의 경우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를 떠 안으면서 일정부분 생활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의무까지도 유보하곤 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생활과 예술의 갈등은 작가로서의 정치적 생명을 키워나가는 데 커다란 변수로 작용한다. 현장전 참여 작가들이 걸어온 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이 전시가 이야기하는 현장은 참여 작가들의 정치적 생명의 처소로서의 현장에 방점을 찍고 있음을 밝혀둔다. ● 여기서 파생하는 또 다른 역설 하나, 현장미술가와 미술계 현장 양자의 부적절한 관계를 상기할 수밖에 없다. 현장을 떠난 현장미술이 그 힘을 잃는다는 것은 기획자나 작가 모두 일정 정도 인식하고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미술관이란 곳은 시각이미지의 여러 편린들을 열어 보이는 '미술의 집'인 것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 화석화된 물건을 다루던 큰집이 이제는 현재형의 담론을 시각화해서 이들의 상징과 은유가 치유와 예언의 기능으로 전화하는가 하면, 직접적인 텍스트로 치환되기도 하는 적극적인 담론 쟁투의 장으로 읽혀지고 있다. 현장성의 개념적 외연을 좁게 가져가지 않는 것을 전제로, 미술집을 찾은 미술고객과 미술인들에게 이번 전시의 참여 작가들이 걸어온 길을, 현장이 아닌 미술관으로 끌어들여 선보이는 이유이다.
80년대 말 이후의 현장미술 ● 『현장 2001 : 건.너.간.다』의 참여 작가들 대부분이 격정적인 80년대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전시는 현장성 있는 미술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80년대 말 이후의 10여년을 돌아보며 현장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이들을 다시 읽어보는 계기를 만드는 것을 제일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9인의 작가들의 다양한 현장성을 보여주기 위해 옴니버스형 모듬전(展) 형식을 택했다. 특정 테마를 중심으로 작가들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들은 자신들의 현장성을 그대로 고수하고, 기획자는 그 양상을 선택하며 제시한다. 80년대 말 이후 90년대를 지내오면서 각 작가들의 변모를 간추려 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과거로부터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건너가는 정황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 10년 안 밖의 짧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출품 작가들의 신작과 구작은 선명성이나 밀도의 차이가 눈에 띈다. 출품작 가운데 일부는 앞서 말한 미술제도의 틀과 공존을 모색한 흔적이 역력한 것도 있다. 또한 엘리트 미술가들의 저 짱짱한 미학적 진보주의나 호사가들의 탈색된 미사여구를 넘어설 만큼 전략적인 큰 그림과 전술적인 타겟 설정을 뚜렷이 하고 있기도 하다. 현장과의 결합 방식이라는 틀을 근거로 다음의 네 가지 경우로 나누어 보았다. ● 첫째는 현실적인 미술제도 속에서 적극적인 공존의 방법론을 터득한 경우다. 화이트컬러의 파편화된 일상이나 여성과 가족제도에 대한 해학적인 접근으로 읽혀온 구본주와 방정아는 초기의 명확한 계급과 젠더에 대한 문제의식에 근거한 역동성을 한 꺼풀 윤색해 보여주는 경우이다. 이들의 행보는 제도권과의 행복하고도 유의미한 공존에 속하는 경우다. 둘째는 직간접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다. 노동자-노숙자들의 고단한 삶을 그려내거나, 노숙자 수첩을 제작 배포하는 프로젝트를 실행하거나, 독일과 한국에서 체험한 이주노동자의 정체성에 대해 문화적-정치적 문제를 제기하는 박은태, 배영환, 박경주가 그들이다. 이들은 계급과 인종의 차별이 커져만 가는 시대에, 신자유주의 정책과 글로벌리즘의 세례 속에서 탈계급, 초국가 단위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노출된 인류의 운명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의 경우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거나 목적의식적으로 현장에 뛰어드는 방식으로 현장성을 담보하고 있다. 셋째는 현안에 대한 순발력 있는 접근으로 현장성을 담보하는 경우다. 자본, 계급, 국가, 성, 환경 등의 이슈에 대해 일기 혹은 시대미술이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김태헌, 이중재는 다양한 시각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일상 속에 편재한 권력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미술계의 현안에 대한 실천적인 접근이나, 매체다변화에 대한 창의적으로 해석과 접근으로 '민(民)'자 돌림 미술(계)의 방법과 결과를 넓혀주고 있다. 넷째는 구체적인 사이트 개념의 현장성을 담보하는 경우다. 인류의 미래를 생태적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는 최병수, 최평곤은 현장미술의 구체적인 상을 놓치지 않는 작가들이다. 특히 갯벌에서 펼치는 이들의 설치 작업들은 미술관이라는 한정된 공간으로 옮기기에는 버거울 정도의 역동성을 가진 것들이다. ● 이들 현장미술가들이 헤쳐 나온 90년대라는 험악한 지형은 아직도 현재형으로 남아있다. 개별화, 파편화, 일상화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이 다함께 손을 내밀어 커다란 그물을 만드는 일 또한 당대 사람들 모두의 몫으로 남아있다. 21세기 남한 사회라는 만만찮은 조건 아래서, 현장과의 유기적인 호흡을 놓치지 않고 시대의 강을 건너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긴 여운으로 남는 것은, 이들이 향후에 새로운 씨앗을 뿌릴 현장(주의)미술가들로 남아주기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 『현장 2001』전의 「건.너.간.다」라는 부제는 정태춘의 노래 제목을 따온 것이다. 해질 무렵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 상황에 빗대어 90년대라는 환멸의 시대를 넘어가는 비감한 서정을 담고 있는 노랫말이 어쿠스틱 기타와 굵직한 선율의 첼로를 만났다. 마지막으로 정태춘님의 「건너간다」 노랫말 전문을 인용한다. ● 강물 위로 노을만 / 잿빛 연무 너머로 번지고 / 노을 속으로 시내버스가 / 그 긴 긴 다리 위 / 아, 흐르지 않는 강을 건너 / 아, 지루하게 불안하게 / 여인들과 노인과 말 없는 사내들 / 그들을 모두 태우고 건넌다 // 아무도 서로 쳐다보지 않고 / 그저 창 밖만 바라볼 뿐 / 흔들리는 대로 눈감고 / 라디오 소리에도 귀 막고 / 아, 검은 물결 강을 건너 / 아, 환멸의 90년대를 지나간다 / 깊은 잠에 빠진 제복의 아이들 / 그들도 태우고 건넌다 // 다음 정거장은 어디오 / 이 버스는 지금 어디로 가오 / 저 무너지는 교각들 하나 둘 건너 / 천박한 한 시대를 지나간다 / 명랑한 노랫소리 귀에 아직 가물거리오 / 컬러 신문지들이 눈에 아직 어른거리오 / 국산 자동차들이 앞뒤로 꼬리를 물고 / 아, 노쇠한 한강을 건너간다 / 휘청거리는 사람들 가득 태우고 / 아, 고단한 세기를 지나간다 ■ 김준기
Vol.20010817a | 現場 2001 : 건·너·간·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