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ODORANT TYPE

권오상展 / GWONOSANG / 權五祥 / sculpture.installation   2001_0620 ▶ 2001_0701

권오상_350장으로 구성된 뷰파인더에 대한 보고서_컬러사진과 혼합재료_175×60×40cm_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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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 / 2001_0620_수요일_05:00pm

인사미술공간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60_4720

데오도란트타입 Deodoranttype ● 세상에는 매일매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진이 만들어지고 있다. 순간에 찍히고, 보통 한 시간 정도면 인화된 사진을 받아볼 수 있다. 뭐, 그렇게 기다릴 필요도 없다. 지하철역에 가면 5분 안에 완성되는 즉석 사진기가 있고, 요즘은 그 열기가 식어버리긴 했지만, 1분 정도만 기다리면 몇 개의 조각난 스티커로 태어나는 스티커 사진기도 많다. 무언가가 '빨리' 된다는 것은 그 '빨리'에 투자한 '더딘' 시간들이 많았다는 증거인데, 렌즈에서 암통, 또 이미지가 안착되는 곳이나 그것을 인화해내는 화학적인 재료들의 변천까지 정말 많은 변화들이 그 '빨리'의 신화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적게 잡아도 그 출발부터 150여 년이 걸린 셈이다. ● 그 중에서도 화학적인 처리 방법에 따라 우리는 사진이 얼마간의 변천사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이 알려져 있는 다게레오타입 Daguerreotype 은은판 위에 인화하는 것으로, 그 세밀함이 경지를 이루고 있는 방식이었다. 뒤를 이어 나온 칼로타입Calotype은 은판이 아니라 종이 위에 인화를 하고, 다게레오타입과는 달리 복제가 가능하다는 중요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선명도에 있어서는 다게레오타입보다 뒤떨어지는 측면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 뒤로도 검은 대지(臺紙)를 갖다 대면 이미지가 보이도록 유리판으로 제작하는 암브로타입Ambrotype이 생겨나는 등 사진을 제작해내는 방법만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런데, 그 사진의 역사 속에서 조금 이상한 방식이 세상에 나왔다. 이름하여 데오도란트타입Deodoranttype이 그것이다. ● 그렇다면, 데오도란트타입은 대체 어떤 방식의 사진일까? 일단 이것은 화학적인 것을 문제삼지 않는다. 물론 사진사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사진 인화 기법도 아니다. 이것은 단지 인화된 사진으로 새로운 입체물을 만들어내는 작업을 하는 권오상이라는 작가가 자신의 첫 번째 개인전의 제목으로 붙여놓은 이름이다. 데오도란트deodorant는 말 그대로 방취제이다. 냄새를 없애는 약인 것이다. 이전의 다게레오타입이나 칼로타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데오도란트타입이 왜 이 전시의 이름이 된 것일까? 유사한 이름들의 속성을 따라 자신이 제작하는 작품을 데오도란트타입의 사진인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작가는 이 전시에서 대체 무엇을 의도하고 있단 말인가? 어긋난 진실 ● 말의 간계에 유혹당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일단 권오상의 작품을 보도록 하자. 98년부터 시작되는 권오상의 본격적인 작업의 도입부에는 친구나 가족 등의 주변 인물, 그리고 널려있는 소품 등을 사용한 작품이 있다. 대상이 하나 선택되면, 모든 방향에서 그것을 사진으로 찍고, 적당한 구조물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인화된 사진을 각 방향에 맞추어 붙이는, 이른바 '사진 조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초반의 작업들은 몇 가지의 의미로 읽힐 수 있을 텐데, 먼저 보통의 사진은 단일 방향만을 증명하는 반면, 그의 작품은 실제에 놓인 대상의 모든 방향이 그대로 담기기 때문에, 좀 더 확실한 증명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렇게만 그 표피적인 접근을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찍혀진 사진 한 장은 그것에 임의적인 조작을 가하지 않는 한, 동일 시간과 동일 공간이라는 가정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를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증명' 혹은 '기록'의 증거로서의 기능이 가능하지만, 여러 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사진 조각은 그것을 한 시간 안에 찍었는지, 며칠을 두고 찍었는지 알 수 없으며, 또한 동일한 공간에서 찍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 이 시점부터 우리는 이미 '뭔가 어긋나고 있다'는 인상을 감출 수 없다. 물론 매끈하게 틀에 부어 떠내거나 세심하게 깎아내는 기존의 조각 작업에 비해 불완전한 이미지들로 조각조각 이어 붙인 이 작업이 완전한 재현을 해내고 있지 않다는 것 역시 우리에게 어긋남을 환기시키는 조건이다. 어긋나 있다는 것은 불안하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가치에 무언가의 위반이 가해졌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후에 제작된 그의 작품들을 보면 그 어긋남과 위반이 매우 직설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99년 이후의 작품들 속에서는 이제 더 이상 정상적인 주변의 일상을 찾아볼 수 없다. 머리가 두 개이거나 몸이 두 개인 쌍둥이이거나, 머리가 기형적으로 작은 사람, 혹은 아예 사람의 것이 아닌 거위의 머리를 가진 사람, 혹은 지나치게 거대한 꽃잎 등, 상상에서나 가능한 것들로 그 대상이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주변의 정상적인 것들이 어느 순간부턴가 비정상의 모습으로 작가에게 다가섰기 때문이 아니다. 애초부터 그의 주변에 있었던 것들은 조각조각 파편화되어 있었고, 그 파편들의 재결합으로 완성된 작품들이 바로 이와 같이 기형화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정상적인 징후들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그저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외관들일 뿐, 그 내부의 것들, 그것이 가진 의미와 관계와 보여지지 않는 진실은 한 번도 우리에게 진정한 모습으로 다가선 적이 없었던 것이다. 권오상의 작품 대부분이 '***장으로 구성된 ****에 관한 진술서'라는 제목을 가진다는 사실 또한 이것이 얼마나 배짱 좋은 가식인가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작품이 사진인가 아닌가, 조각인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데오도란트타입이 사진의 한 방식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질문도 무효다. 이제 그의 작업은 3차원의 환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조각도, 그 표피적 진실을 보여주던 전통적인 사진도 아닌 데오도란트타입이 된 것이다.

권오상_미술이 가지는 절대적 권위와 숭배에 관한 280장의 진술서_ 컬러사진과 혼합재료_240×140×50cm_1999

부적절한 관계 ● 배경 지식이 이쯤이면, 충분히 이 전시를 감상할 준비가 된 것 같다. 전시장에는 흰 가운을 입고 망원경으로 뭔가를 보고 있는 중년의 여인, 서로 싸우고 있는 몸이 두 개인 쌍둥이, 한 개의 돌, 하얀 승합차, 개 한 마리, 불상의 수인을 하고 있는 외계인처럼 보이는 생물, 또 한 마리의 개, 그리고 공간을 옮겨 작은 방으로 들어가면 돌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병풍, 그리고 또 하나의 돌이 있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태어난 여러 개의 작품들이 함께 놓여있는 공간, 그래서 이 전시에 이르면, 작가의 작업은 더 이상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와 맺고 있는 관계, 대체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저 뜬금없는 것들의 조합이 만들어 내는 하나의 전시가 낱낱으로 날아가 버리는 개별 작품들의 단순한 집합소는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관계에 대한 질문이 일어나고, 그래서 우리는 그들 사이로 흐르는 이야기들을 챙기면서 하나의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습들은 일상적인 삶을 이루는 하나의 부조리한 모습의 상징들이다. 이슈가 될만한 대상을 찾아 끝없이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권력과, 기다, 아니다를 두고 실은 크게 다르지도 않은 것을 놓고서 싸우는 사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막힘 없이 시원스레 달리는 자동차, 그리고 그 세계를 내려다보는 외계인, 그 외계인을 홀로 알아보는 개, 그리고 그 모든 사건들과 무관한 듯 덤덤하게 자리하고 있는 돌 하나, 그 돌이 자리를 옮겨 앉아 있는 '중국식 정원'. 사람의 인생과, 또 그 인생이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의 관련이, 있는 듯 없어 보이고, 또 무관한 듯 얽혀 있는 모습들 속에서 우리는 어느 하나에도 차분히 안착하지 못하는 의미들의 부유함을 만나게 된다. 둘 이상의 작품들이 서로 만나더라도 그들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진전시키고자 할 뿐, 우리가 시도하는 관계의 연결고리를 자꾸만 끊으려고 도망하고 있다. 부적절한 관계이다. 이들을 통해 표면적인 것들이 만들어 내는 세계가 얼마나 부조리하며 무의미한 것인가 하는 깨달음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마무리는 데오도란트타입으로, 그러나... ● 이제 우리는 애초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어느 날, 하나의 광고를 보게 되고, 그것이 이 전시의 제목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화장품 회사인 니베아에서 새로 만든 '데오도란트 타입 니베아'라는 제품 광고인데, 여름을 맞아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체취를 없애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이것을 놓치지 않는다. '마무리는 데오도란트 타입 니베아로'라는 카피가 눈에 남는다. 우리는 언제나 의미에 접근하지 못하고, 그 속 깊은 곳에 다다르지 못하고 만다. 수백 장으로 눈에 보이는 진술서를 만들어놓아 봤자 그것이 진정 무엇인지는 말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데오도란트 타입으로 마무리를 하자고 마음먹는다. 어차피 드러내 놓지 못할 것이라면 감추자, 말로 설명해주지 못할 필연성이라면 차라리 들키지도 말자, 하는 것이 데오도란트의 슬픈 역설인 것이다. ● 물론 우리는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작품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 거기까지라고 해서 그 안으로 들어가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말해주는 것이 거기까지라고 해서 그의 의중을 파악하는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기어이 그 관계의 어려움, 그 부적절한 관계 속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하며, 그리고 그 애매함의 한 가운데서 쉽게 종지부를 찍을 것 같지 않은 인생을 괴롭게 즐겨야 한다. 작품들은 데오도란트타입으로 깨끗이 마무리를 했지만, 계속해서 외치고 있다. 여기가 끝은 아니다. 이게 다는 아니다. 끝끝내 포기해서는 안될, 이면에 숨겨진 것들을 일깨워주는 단호함, 그것이 바로 권오상의 데오도란트타입인 것이다. ■ 황록주

Vol.20010616a | 권오상展 / GWONOSANG / 權五祥 / sculpture.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