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오투(폐관)
도시 공간. ●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서울의 빌딩 숲과 차량들, 아스팔트, 수많은 네온 간판들 그리고 이름 모를 군중들... 이 거대한 도시는 나를 순식간에 삼켜 버린다. ● 서울의 중심부인 명동, 종로거리를 생각 없이 걷다보면 높은 빌딩 숲 사이로 내리비치는 태양이 날 어지럽게 만든다. 그리고 시끌벅적한 소음들, 현란한 간판들 속에 한참을 묻혀있다 보면, 어느새 석양은 고층 건물사이로 사라지고 그림자로 덮여진 싸늘한 음기는 나의 피부로 와 닿는다. 양기와 음기가 만나는 저녁 무렵.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고 어딘가로 향하는 군중들은 바쁜 발걸음을 놀리고 있다. ●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언제나 군중들 속에서부터 나온다. 처음 서울의 거리에서 느꼈던 불안감보다는 덜하긴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 속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불안과 고독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이럴 때면 나도 모르게 군중들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고, 산책자의 기분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부유하고있는 이미지들. ● 보들레르는 대도시의 물질적 속성을 처녀와 창녀로 비유한다. 그는 처녀성을 태초의 순수함으로 보는 반면 창녀를 눈썹, 가발, 향수, 분바른 얼굴, 화려한 의상, 보석 그리고 귀걸이 등과 같은 상품의 가치로 환원 가능한 물신숭배자로 여기는 것이다. 즉, 자연으로서의 성을 감추고 새로이 변신한 인공적, 물신적 존재라는 것이다. 창녀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대중상품이기도 하고, 자본주의 가치가 그 속에 내밀화된 전형적인 문화적 기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창녀가 현대사회의 물질적 속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대도시 군중 속에서 활보하는 여성들의 화려한 옷과 스타일은 현대사회의 문화적 표상이 된다. 옷의 표면에서 드러나고 있는 표범 무늬 텍스츄어, 다양한 꽃무늬, 가는 허리와 풍부한 둔부, 그리고 섹슈얼한 이미지...
'본다'는 것. ● 우리는 도시의 어느 곳에서든 소리 없이 둥둥 떠다니는 다양한 이미지(기표)들을 흔하게 본다. 이러한 다양한 이미지들을 '본다'라는 것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고 개인의 신념이나 환경, 이데올로기 등에 따라 달리 읽혀질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자 하는 사물을 선행된 시각적 경험을 전제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한도 안에서 믿고자 하는 방식을 통해 보기 때문이다. ● 나에게 있어 이미지를 생산하게 하는 원동력은 이와 같이 '본다'는 행위 속에서 시작된다. 다양하게 부유하고 있는 이미지들을 관심 있게 보고 있자면 반복해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미지들이 나의 시선을 유혹한다. 이렇게 반복되는 이미지들은 나를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리고 그것은 정처 없는 부유(浮游)를 마감하고 필름 위로 정착된다.
"꽃"에 대한 시선. ● 고층 건물, 아스팔트, 차량, 간판, 노점상, 보도블록, 가로등, 군중 등은 도시를 구성하는 기표들이다. 이러한 도시 기표들 속에서 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군중들이 뿜어내는 기표들이다. 이는 곧 인간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며 그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기표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표들은 도시를 거리 산책자의 기분으로 활보할 때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발견된다. 그 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꽃'이라는 물질적인 대상은 유난히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꽃'이라는 물질은 자연물이면서도 인간 생활의 전반에 차용되어 미적인 요소로 사용된다. 동양인의 미의식에는 한 송이의 아름다운 꽃에서 자연의 신비로운 질서와 조화를 찾아낸다. 잃어버린 자연/우주 속에서 있던 우리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이번 FLOWERS 시리즈에서 보여지는 꽃은 진짜가 아닌 가짜이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 속에선 이미 진짜/가짜의 이항 대립적 의미는 사라지고 그 이상의 것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 방병상
Vol.20010609a | 방병상 사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