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문화 인간

윤석구_이종빈_채우승 조각展   2001_0425 ▶ 2001_0508

윤석구_Capitalism_합성수지에 채색_40×40×110cm_2001

서신갤러리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신동 832-2번지 Tel. 063_255_1653 www.seoshingallery.co.kr

꾸준히 자기의 길을 걸어오던 조각가 3인이 한자리에서 전시회를 연다. 이른바 '중견조각가'들이다. 이들 작가의 작품은, 말하자면 '근대 이전적 近代 以前的' 이라기 보단 '현대적 現代的'이다. 흔히 '근대'와 '현대'를 우리 한국에선 '모던modern'으로 혼란하게 쓰는 경향이 있지만, 여기에선 편의상 세계대전을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다. 즉 문명에 의한 대량 살상, 그로 인한 기독교적 긍정적 세계관의 와해, 맑스와 프로이드와 레비스트로스 이후의 인간관이 반영된 작품들을 '현대적'이라 말해본 것이다. 이러한 구분을 다소 무식하게 또다시 사용해본다면 한국의 경우 '근대 이전적' 조각 작품은 상대적으로 대중적 사랑도 받고 작품 매매도 활발하지만, '현대적' 작품은 여전히 일반 대중의 외면 속에서 자기 설자리를 찾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현대조각가 3인전'이, 그것도 서울이 아닌 전주에서 열린다. 내가 이 전시를 주목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전주시의 문화적 분위기와 형편을 구체적으론 모른다 해도 전주에서의 이러한 전시는 서울에서와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 - 선물과 상품 ● 윤석구의 최근 작품 주제는 '자본주의 capitalism 사회 안의 원초적 생명과 인간'이다. 그는 작품 「신종新種」에서 사과를 만들어 '스카이 애플'이라는 회사 라벨이 붙은 상자에 담아 내놓았다. 그런데 그 사과는 자연산 사과가 아니다. 황금색, 은색, 초록색, 하늘색, 빨간색, 노란색 등 빛을 띤 그것들은 자본주의산 資本主義産 사과다. 그것들은 사과의 모양만 취했을 뿐, 우리 인간이나 다른 생물들이 먹어 맛과 영양을 취할 수 있는 사과가 아니다. ● 사과는 햇빛에 의해 열리고 익어간다. 태양과 사과는 이 세상에 선물로 주어졌다. 그것은 거저 주어진 것이지, 결코 어떤 대가를 바라며 혹은 어떤 교환조건 하에 이 세상과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신神이 이 세상을 사랑하여 선물로 거저 주신 것이라 말하는 사람(알베르 까뮈)도 있다. 그 거저 받은 '선물'인 사과를 우리는 '상품'으로 만든다. 즉 우리는 거기에 교환가치를 설정한다. 특별히 자본주의사회는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물, 공기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표정과 목소리들도 돈이 된다. 그뿐인가. 인체의 전부, 혹은 일부분도 돈으로 환산되어 매매되기도 한다. 더구나 유전자 조작을 통해 그것은 무한히 확대될 수도 있다. ● 윤석구의 작품에서 반으로 갈라진 사과의 씨방에는 자궁속의 태아가 세상에 나오기 직전의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다. 그의 관점에선 모든 생명체는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그래서 사과의 씨방에 태아가 자리바꿈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선 생명마저도 상품화 된다. ●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이 과연 건강한 사회인가, 바람직한 환경인가 하고 윤석구는 묻고 있다.

채우승_무제||_합성수지에 채색_55×165×18cm_2001

비본질적인 것에 대한 시선 ● 채우승은 불상의 '옷자락'에서 주제를 발견하고 있는 특이한 작가이다. 그의 관심은 '불교'에 있지 않고'불상'에 있는 것도 아니다. 1999년 7월의 개인전『觀淫』은 '觀音'이 아니다. 그는 관음 불상의 옷자락에서 불온한 것, 혹은 비본질적인 어떤 것을 발견하고 있다. ● 불상조각은 불교 혹은 불교정신의 표상이다. 석가나 보살은 거기에 앉거나 서서 무엇인가를 나타내고 의미한다. 이를테면 '자비' '보시' 같은 정신적이며 교훈적인 것, '건강'이나 '성공'의 인간 욕망과 관련된 영험적인 것 등이 그 불상이라는 인체조각상과 관련되고 있다. 그런데 그 석가와 보살이 두르고 있는 옷은 불교 자체와 어떤 관계일까. 순수한 불교정신의 측면에서 볼 때 그 옷들은 비본질적인 것이고 비순수한 것이다. 불상들이 알몸으로 있을 수는 없는 것일까. 즉 불상은 불교의 본질만을 드러내며 알몸으로 있을 수는 없는 것일까. ● 그런데 채우승은 불상들이 걸치고 있는 '비순수한' 옷에서 문화가 끼어들 여지를 발견한다. 완전한 순수에는 문화가 끼어들 틈이 없다. 순수와 순수 사이의 인간적인 틈, 문화는 바로 그런 틈에서 발생한다. 서양의 경우, 십자고상 十字苦像에서, 예수의 몸 중간부분에 걸쳐있는 부자연스런 천조각에서 그는 문화를 발견하는 것이다. ●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세상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알몸nude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알몸에 옷을 두른다. 그리하여 어떤 표현이 시작되고, 정체성이 드러나는 등 문화적 현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채우승은 그러한 시선으로 불상 뿐만 아니라 '선녀의 옷자락'을 그리고 '사천왕상'의 옷주름을 부분적으로 차용하고 확대하고 재현한다.

이종빈_거대한 Sketch book_합성수지에 채색, 와이어_90×120×16cm_2001

인간과 그 그림자 ● 이종빈의 관심은 '인간형상'에 있다. 90년대 중반까지 그는 인간 존재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해왔다. 1993년 즈음에 발표한 「무희입상」이나 「청년흉상」 그리고 풍경조각이라 할 수 있는 「신도시로 가는 길」등의 작품에서 그는 90년대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과 절망을 입상과 흉상, 혹은 부조로 형상화했다. ● 그러나 9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작품은 변한다. 인간 형상이라는 면에서는 같은 맥락이라 해도 그의 시선은 사회학적이 아니라 실존적, 철학적이 된다. 여기에서 새롭게 첨부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세계의 표현이다. 그것은 이 세계를 구분짓는 이원론적 세계, 즉 양과 음, 의식과 무의식,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듯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초현실적 상상력과 결합된 그 작품들은 당황하리만큼 형태 왜곡이 심하다. 과감한 생략, 변형, 비틀림, 불가해한 결합 등이 전 작품에 드러난다. 「창조의 나무」라는 작품에서는 식물과 인체두상이 결합하며, 「무거운 책」에서는 거의 볼링핀처럼 단순화된 인체가 그려져 있다. 2000년에 발표한 작품 「누워있는 형상」에선 골조와 붉은 흙만으로 인체를 표현하기도 했다. 작품 「거대한 책」은 부조라는 표현 형식이 채택되고 있다. 그 작품에서 인체는 양각과 음각으로 펼쳐진 책에서 마주보며 새겨있다. ● 어찌보면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작품을 보며 나는 떠올린다. 인생이란 것을. 우리는 일생을 통해 결국 하나의 책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아닐까. 양각과 음각으로 새겨진, 종이보다는 조금 무거운, 결국 흙과 같은 무게의 책. ■ 이태호

Vol.20010507a | 자본주의 문화 인간 조각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