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오투(폐관)
세태를 반영하듯 우리주변에서 사라지는 것. 흔히들 말하는 정보화시대 수 십년 동안 광부들이 살고 있는 탄광문화의 본거지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황혼'에 선 광부는 어떤 모습일까? 한때 우리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었던 연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사람들은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옛시절 가난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탄광이 이고 있은 잿빛 하늘과 검은 색으로 뒤덮인 탄광촌의 검은 황무지를 연상케 한다. 사북의 과거를 말할 때 사람들은 "지나가는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곳이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인지 이곳 사람들은 탄광의 검은 가루가 날리던 지난날이 좋았다고 한다. ● 석탄산업이 사양길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 석탄소비량 중 극히 일부분만이 국내에서 생산된다. 그러나 아직도 연탄을 사용하는 가구는 수십만 가구에 이른다고 한다. 부존 매장량이 풍부해 가채매장량이 6억 8천만 톤에 이르러 아직도 수 십년은 사용이 가능한 에너지 자원을 그대로 버릴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진폐증이나 산업재해로 병원생활을 하는 사람들과 아직도 현업에 종사하는 광부들의 안전 및 생계문제다. ● 석탄산업합리화정책과 폐광지역활성화라는 구호아래 설립된 카지노단지는 개장한지 6개월도 안돼 수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며 탄광지역활성화와는 거리가 먼 역효과를 낳고 있다. 지역주민에게 도움은커녕 새로운 사회문제와 절망을 안겨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부 일을 천직으로 삼았던 이춘하(57)씨. 160cm의 키에 58kg. 왜소한 체격의 이춘하씨는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조실부모하고 스무 살에 결혼한 그는 스물여덟살에 태백 한성광업소에서 광부가 되었다. 산골짜기 남의 밭에 옥수수 감자를 심는 농사일보다는 제법 수입이 짭짤한 일이었기에 그런 대로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았다. ●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동원탄좌의 하청업체 원덕기업은 이춘하씨의 사북 12리 산동네 집으로부터 5킬로미터 맞은편이다. 소규모의 광산은 국내에도 몇 개 되지 않는 그야말로 언제 문을 닫을 지 모르는 처지이다. 88연만하더라도 3백47개소였던 것이 10여개소만 남았고 광원도 6만 2천명에서 만 여명으로 줄었다. 검은 먼지를 날리며 가파른 산을 통근버스로 올라 일하는 것이 그는 행운이라고 했다. 다른 탄광의 경우 수직으로 1,000m 이상을 들어가 다시 수평으로 수 백미터를 움직이는데 비해 이씨가 근무하는 곳은 표고 차가 심해 날씨가 춥다는 것 외에는 작업환경이 좋은 수평갱도이기 때문이다. 하루 여섯 시간의 채탄 작업중 작업량을 가지고 나와 중간에 식사를 할 수 있는 입구에서 약 400미터에 위치한 곳이 작업장이다. 주변의 동원탄좌 직영의 경우 수십배의 인원이 일하는데 비해 ,96년 당시 12명의 집적부와 5명의 관리직으로 구성된 소규모의 탄광은 국내에 거의 없었다. 이 조그만 광산이 문을 닫지 않는 이유는 하청을 받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광부의 미래는 불분명했다. 그는 광부생활을 하면서 위장병으로 두달 정도 쉬긴 했지만 20년 이상 큰 탈 없이 일해 왔다. 27년째인 98년 발파작업중 부상으로 6개월간 병원신세를 지긴 했으나 그래도 큰 직업병 없이 1일 3교대로 28년을 굴속에서 일했다. 동료중 한 두명 결근이라도 하면, 여섯 명이 두개 조로 움직이는 작업은 석탄을 실어 나르고 발파작업도 함께 해야 했다. 일자리가 없어진다면 막노동이나 하겠다던 이춘하씨의 미래는 불확실하게 보였다. 예상대로 98년 875갱도는 폐광되었고, 근처 715 갱도에서 일하던 2000년 5월17일, 허리를 다쳐 산업재해환자로 11개월째 사북연세병원에 입원중이다. ● 4년전에 이사온 사북4리 10반 이춘하씨의 집. 부인은 몸살 걸린 몸을 이끌고 귀가하는 이춘하씨를 맞이했다. 그리고 잠시 눈을 붙인 후 새벽 두시 사북역에서 출발하는 강릉행 열차에 올랐다. 강릉의 한 병원에서 이춘하씨가 정밀진단을 받기 위한 길이었다. 주변 집들은 도로건설로 인해 철거 중이라 스산함을 더했다. 그날 새벽 사북의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 그에게도 꿈이 있었으나 어쩔 수 없는 가난한 광부로 30여년을 살았다. 강릉행 열차에서 만난 동료광부가 던진 말을 생각하면 이춘하씨의 봄은 아직도 멀기만 한 것 같다. "이제 수술해서 완치되면 뭐 해. 치료나 받으며 오랫동안 병원생활을 하는 게 최고지" ■ 신동필
Vol.20010425a | 신동필展 / PHIL SHIN / 申東必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