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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디에 관하여 1. 패러디의 역사성 ● 패러디는 그것의 대상이 되는 원본이 있다. 그래서 패러디 된 작품은 그것의 원본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회귀의 복고적인 성격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패러디는 원본에 대하여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새로운 시각을 지니기 때문에 즉 우리가 여기서주목할 부분은 새롭다는 단어인데 이 의미는 원본을 뛰어 넘어 무언가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패러디는 이처럼 원본으로의 회귀성과 원본을 뛰어넘으려는 자체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패러독스라고 하는데 패러독스란 자기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 즉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을 말한다. ● 그런데 패러디를 패러독스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원본에 대한 회귀성의 강도가 진보의 강도보다 훨씬 약하기 때문에 모순의 개념보다는 진보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패러디라는 말은 원래 '참조'라는 뜻인데, 참조라는 말은 그 자체로 진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뜻에서 보자면 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듯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모더니즘의 연속선상에 있으며, 나름대로의 아방가르드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아방가르드의 가장 큰 핵심은 역사를 진보로 보고 있으며, 패러디 또한 역사를 진보로 보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아방가르드는 지나온 역사들을 '참조'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모더니즘의 패러독스이다) 아방가르드는 시간을 방향을 가진 하나의 직선으로 보고 있다. ● 여기서 가장 큰 모순은 시간이 한 방향으로 직선적으로 진행하는 거라면 그것이 지향하는 목적점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즉 역사란 어떠한 목적점을 향하여 진행되는 것일까? 즉 인류의 최종적인 진화의 목표는 무엇일까? 라는 근본적인 철학적 물음을 상실하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모더니즘시대의 사람들은 역사성 속에서 최종 목적점을 찾으려는 철학적인 노력을 포기한 채 빨리만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나침반도 없이 사막 한가운데서 질주하다가 방향도 없이 해매게 된 꼴이다. ● 목적점이 없는 일직선의 시간적인 사고는 결국 과연 역사란 진보인가? 라는 회의적인 사고를 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역사의 목적점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에 목적점이 있다는 사고는 근본적으로 영혼주의적이며, 이것을 목적론적인 사고라고 한다. 반대로 역사에 어떤 목적점이 없다는 사고는 인간은 기계조직에 불과하다는 기계론적인 사고이다. 뉴우톤과 데카르트,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이 기계론적 사고의 사람들의 생각에 의하여 인간의 삶에서 삶의 목적을 빼앗아 버린다. ● 1960년대를 기점으로 서양인들은 자신들의 직선적인 시간관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한다.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며 문명타파적인 히피운동은 인도의 철학이나, 동양의 불교 ,,도교, 유교 등에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동양적인 원적인 시간관에 커다란 영향을 받게된다. 동양에서는 갑자, 을축, 병인, 정묘,...... 등으로 60년마다 다시 갑자년으로 돌아오는 근본적으로 원적인 시간관을 가지고있었다. 불교의 원이나, 도교적인 세계관 역시 원적인 시간관을 잘 말해주고, 주역의 상하권으로 나눈점이나 마지막' 화수미제'괘에서 보듯이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는 뜻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원적인 시간관을 보여준다. 자동차의 바퀴는 원운동을 하고있는데, 자동차는 직선운동을 한다. 만약 어항에서 헤험치는 물고기를 두 대의 무비 카메라로 각각 정면과 측면에서 촬영을 하고 각각의 모니터에 방영한다면 마치 두 마리의 각기 다른 물고기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최근 사람들은 시간을 좀더 먼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시간이란원적인 성격과 직선적인 성격을 모두 갖춘 나선형을 그리고있다 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 패러디란 근본적으로 이러한 나선형의 시간관에 근거한 것이다. 즉 끊임없이 과거의 참조를 하고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앞으로 진행하는 시간이다. 여기에 시간의 방향성이 가진 목적점에 대하여 신중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가 가진 가장 큰 특징은 속도의 문제에 있었지만, 포스트모던의 중점은 '무엇'이라는 목적성에 있는 것이다. 2. 패러디의 호환성 ● 인류의 삶은 한마디로 말하면 패러디의 역사이다. 어제의 삶을 패러디하지 않고서 어떻게 오늘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어제까지 내가 알고 배운 컴퓨터에 대한 지식을 참조하지 않는다면 나는 오늘컴퓨터의 자판하나도 두드리지 못할 것이다. 인간의 삶은 처음부터 패러디 자체인 것이다. ● 미술이란 처음시작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자연을 모방했음이 틀림없다. 즉 자연이라는 원본이 있으며 이 원본을 참조하여 그린 것이다. 따라서 그림이란 처음부터 자연을 참조한 패러디인 것이다. 모더니즘의 작가들은 끊임없이 '참조'라는 단어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보여왔다. 왜냐하면 그들의 창조라는 단어는 '참조'라는 의미와는 반대적인 느낌이 강했고 또한, 참조는 끊임없이 뒤를 돌아다보게 하는 속성 때문에 앞으로 빨리 속도감있게 달려야하는 그들로서는 참조라는 '패러디'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분명해졌다. ● 우리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은 끊임없이 '참조'되어 생명력을 지니고 발달되어 온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문화들은 서로 다른 문화들을 '참조'한다. 문화라는 것은 그것자체가 패러디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공통적인 원본을 가지고 있다. 패러디의 속성상 현재의 문화들은 끊임없이 원본에 대한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서로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이다. 만약 마네의 올랭피아가 티치아노의 그림을 패러디한 사실이 알려만 졌더라도 사람들은 마네의 생각을 전혀 의심할 필요도 없이 공감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의 삶이 서로간의 의사소통에서 거의 문제가 없는 것은 바로 패러디의 기능 때문이기도 하다. ● 문화나 문명의 발달은 패러디가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집, 가구, 자동차, 그 밖의 모든 것들은 구석기 이전의 역사들로부터 끊임없이 패러디 되어온 것들이다. 이러한 오랜 시간동안의 패러디 때문에 문화는 상호 호환성을 가지게 된다. 현대 미술의릐 가장 큰 문제는 대중과의 대화가 단절되어있다는 것이다. 작가와 작가 작가와 평론가들 사이에도 진정한 정보의 전달이 막혀있다. 이것은 그 동안의 미술이 적극적인 패러디를 통하여 발전되어오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3. 패러디의 과정성 ● 패러디는 분명 원본을 참조한다. 모방하지는 않는다. 모방이란 가치의 문제가 없는 것을 말한다. 패러디는 근본적으로 가치에 대한 탐구이다. 따라서 시대가 바뀌면 시대정신에 의하여 가치가 바뀌게 된다. 패러디 된 작품은 다른 시대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 다시 원본으로의 역할을 하고 패러디 된다. 따라서 패러디 된 작품은 과거와 미래사이의 역사성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패러디의 현재란 과거와 미래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발생하여 미래로 성장해나가는 살아있는 생명이다. 패러디는 그 과정성의 특징으로 인하여 하나의 완결점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분명 패러디는 그 가치에 대한 연구에 의하여 시간의 목적점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를 필수로 하고 있지만 , 하나의 작품이 그 결론을 말하고있지는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패러디는 끊임없이 연속적이고 시간적으로 개방되어있으며, 동시에 공간적으로 개방되어있다. ● 하나의 작품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세계 속에서 상호 택스트적으로 연결되어있으며, 끊임없이 참조하고 참조되어진다. 그래서 작품은 한인간의 창작물이 아니라 시대상황의 전 인류가 공동으로 창작하는 것이다. 작품에 대한 서명이란 그 작품을 누군가의 창작에 대한 결과라는 의미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까지 작품에 대한 서명 그 자체의 패러디인 것이다. 4. 패러디의 긍정성 ● 흔히들 동양의 노자나 불교는 현실이나 존재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대긍정에 이르는 방법을 사용하고있다고 알고있으나, 이는 전혀 잘못된 이해이다. 불교는 티벳쪽으로 전파된 밀교라는 형태 등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며, 기존의 불교가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 대긍정에 이르는 길이라면 밀교는 긍정과 긍정을 통한 대긍정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탄드라 불교등에서는 육체적인 섹스 등이 가장 중요한 수행방법이었다. 부처는 긍정과 부정의 두가지 수행법을 동시에 설파하였던 것이다. ● 노자는 도덕경 첫장에서 이름이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라고 말하였는데, 또한 이름이 있는 것과 이름이 없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을 현이라고 한다 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이데아와 현상계가 동일한 것이며, 존재에 대한 긍정 또한 존재에 대한 부정과 마찬가지로 진리에 대한 접근법이라고 말한다. ● 모더니즘의 아방가르드 정신이란 부정성을 근거로 한다. 앞선 역사에 대한 부정성이야 말로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모더니스트들은 개인을 타인으로부터 또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영혼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보아왔으며, 이러한 개인의 독자성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미술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러한 개인이야말로 역사 속에서 패러디의 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화가들은 자신을 실존하게 해주는 바로 자신의 역사성을 부정함으로해서 결국 자신의 실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역사부정의 정신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표현하려고 했던 개인의 주체성을 화면 속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 사실 모더니즘의 역사는 개인의 정체성을 찾고 드러내려는 시도였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개성과 인간성은 사라져 버리고 그가 만든 껍데기의 상표들인 형식만이 존재하게 된다. 아방가르드 속에 개인의 정체성 뿐 아니라 어떠한 인간의 그림자조차도 부정되고 사라지게하는 커다란 패러독스를 만든다. ● 패러디의 가장 큰 특징은 참조대상에 대한 긍정성이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긍정이야말로 자기자신에 대한 긍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에 대한 긍정성, 역사에 대한 긍정성은 개인의 자아에 대한 생각을 독립적이고 패쇄되고 명확히 구별된 개체로서의 개인에서, 개방적이고 타인과 상호교환적이고, 모든 존재가 하나의 커다란 생명체라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 이러한 역사에 대한 긍정은 자기자신에 대한 긍정이며, 모든 부정성 자체를 포함하는 긍정이다. 따라서 패러디가 원본에 대한 부정의 정신이 아니라 긍정의 정신으로 찬미를 하고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러디는 원본을 참조하여 발전시켜나가는 점에 있어서는 아방가르드의 부정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부정성마져도 긍정하는 대긍정의 자세야 말로 패러디의 자세이다. ■ 채희석
Vol.20001130a | 채희석展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