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시각 이미지의 그물망 만들기

80년대라는 지울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뾰족한 펜으로 기름종이를 긁어 틀에 걸고 시커먼 잉크를 묻힌 로울러를 문질렀었다. 그리고 얼마 후 복사에 복사를 거듭하여 독해 불가능할 정도로 깨어진 문건들을 한자한자 복원시키며 세상을 읽었었다. 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시끄럽게 돌아가는 마스터 인쇄기와 전동타자기 덕분에 예전에 비해 훨씬 손쉬운 방식의 프로파겐더가 진행되었다. 이 즈음 미술운동에서는 목판화, 만화, 걸개그림들이 그려졌으며, 좀더 여유가 있었는 집단에서는 8mm영화와 애니메이션 등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 모두 팩시밀리, 캠코더 등이 나오기 한참 전의 일들이다.

올컬러 옵셋 인쇄물들이 서점을 장식하고 워드프로세서라는 이상한 기계가 전동타자기를 몰아내고 메모리칩이라는 시커먼 조각이 그 의미를 키워갈 즈음에 갑자기 시커먼 화면에 초록색 불빛이 반짝이는 인류가 만든 가장 진보적인 컴퓨터 XT가 시판되었다. 위 아래로 커다란 디스켓을 머금고 있는 XT 앞에 앉아 DIR을 치면서 창밖에서 허옇게 터져 들어오는 취루탄을 마시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곧 모니터는 알록달록 해졌으며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낯설은 살색이 수많은 눈들을 충혈시켰다.

시각 이미지라는 소박한 프로파겐더

80년대 걸개그림이 파생시킨 만화와 판화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으려던 시절 걸개 하나를 그리면 적어도 그 그림을 10만에서 100만이 보았다. 그리고 복수성에 기반한 만화와 판화도 메아리처럼 퍼져나갔다. 성급한 이들은 이로부터 매체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 갔으며, 출판미술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아직 사진은 보도 또는 증거의 기능으로만 여겨졌었고 영화 또한 닫힌 문을 열어 재치기 위해 여기저기서 힘을 모으고 있었다.

기억으로 팩시밀리를 이용한 아티스트 국제교류가 이루어지던 시절 일렉트로닉이라는 아주 작은 카페에서 AT 컴퓨터에 모뎀을 달아 채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홀로그램으로 희한하게 번쩍이는 레이저비전 판으로부터 아이젠쉬쩨인과 핑크플로이드를 즐길 수 있었다.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도 이 영화들은 이데올로기 컴플렉스로 인해 숨어서 볼 수밖에 없는 작품들이었다.

모뎀의 발견. 그것은 거칠은 상상을 발동시켰다. 그래서 조악하지만 터보XT에 모뎀과 핸디스캐너를 달아 좀더 강력한 프로파겐더를 꿈꾸게 되었다. 사회사진연구소의 진한 사진들을 스캔 받고 죽은이들을 추모하는 듯한 검정리본이 돌아가는 9핀짜리 도트프린터로 시끄럽게 여러 장을 찍어보았다. 그리고 파스텔로 약간의 색을 입혀 교정과 길거리에 붙였었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내용보다는 형식을 신기해하며 이미지를 소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내용만큼이나 거칠었던 판화가 식상해진 사람들은 무언가 섬세한 다른 것들을 기대하고 있었다.

데이타 전송. 동질의 포스터가 모뎀과 프린터를 이용하여 여러 곳에서 동시에 제작되며 같은 시간에 벽에 부착될 수 있다는 믿음은 굉장한 것이었다. 물론 이를 현실화시킬 무렵 80년대의 거친 호흡은 서서히 숨을 고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인터넷 세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한의 시각 이미지 관련 웹 싸이트

80년대와 그리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확연히 달랐었던 90년대. 남한에서도 기존의 방법으로 탈출구를 찾지 못했던 시각 이미지 생산자들이 웹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2000년. 서툴고 조악한 시스템을 이용한 웹이었지만 그래도 뜨거운 열정과 보여줄 것이 무궁무진했었던 과거의 사람들은 일종의 의무감을 가지고 웹을 개척하였다. 아쉽게도 그때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싸이트들은 지금 현재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은 상태로 서버의 한 귀퉁이에 방치되거나 도메인을 잃어버린 채 망망대해를 떠돌고 있다. 사실상 본격적으로 남한 시각 이미지에서 웹문화가 시작되었던 시기는 1998년 이후이다. '새로운 세기는 문화의 세기'라 부르며 인터넷을 모르면 '야만인' 취급을 하던 당시 분위기는 '정보화 사회' 열풍을 일으켰으며 덩달아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각종 시각 이미지 공급을 재촉하였다. 때마침 외환위기를 겪으며 이를 타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이버 세계를 정복하여 최고의 강자가 되겠다는 다짐들이 닷컴으로 집중되었고 결국 뜨거운 웹러쉬 web-rush가 조장되었다. 하지만 10여년전부터 지금까지 남한 시각 이미지 생산에 있어서 이렇다할 이론적인 이슈가 부재한 상태였고 축적된 논의들도 척박했던 터라 당시의 웹은 오히려 겉만 번지르한 눈요깃거리로 치부되었던 감이 없지 않았다.

2000년대를 맞이하면서 웹은 다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우선 확연한 변화로 대기업과 화상들이 웹에 들어와 장사를 할 속셈으로 수백억원의 자본을 투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저 user들 또한 나름의 생각으로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시각 이미지 생산의 관점에서 보자면 무엇보다도 온라인으로만 활동하는 웹아티스트의 숫자가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더 중요한 변화로 꼽을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현실의 여건은 아직 눈앞에 보이는 오프라인의 돈과 권력이 어디로 흘러가는가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꼭 미술계 자본이 아니더라도 대기업 또는 개인 출자자들이 똘똘한 시각 이미지 관련 싸이트를 만들기 위해 유무명 작가들의 무수히 많은 작품들을 스캔 받았으며, 이 작품들을 유저들에게 쉽게 설명해 줄 필자들과 싸이트를 예쁘게 꾸며줄 웹디자이너를 구하러 다녔다. 그 덕택에 아마도 올해가 미술관련 종사자들의 취업률이 가장 높은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웹, 돈 되는 일이 아니라 일이 돈 되게 하는 방법

하루에 7000통 이상의 웹메일을 보낸다. 그리고 커뮤니티를 위해 수시로 게시판을 들락달락 하며 정리하기에 바쁘다. 업그레이드를 위해 난수표 같은 HTML을 펼쳐놓으면 머리에서 쥐가 나며 굳이 이 짓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에 일쑤다. 밤낮 없이 컴앞에 앉아 있었더니 언제부터인가 허리 싸이즈와 나이가 정확히 똑같은 수치를 기록하며 한해 한해를 넘기고 있다. 점점 더 버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분명 남들처럼 돈을 벌 속셈으로 웹을 하는 것은 아닐진대 생계를 이을 수 없다면 곤란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다시 돈과 일을 생각해 본다. 뭐 그리 특별한 수가 없는 것 같다.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다행스러울 뿐이다. 더구나 예전에 비하면 분명 지금은 여유로운 환경이다. 막막하지만 그래도 행복한 일이라는 믿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이제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일이다.

웹이라는 매체가 생활이 되기 훨씬 이전에 사회는 신세대와 구세대를 확연히 구분한 바 있다. 386 끄트머리로서 이도저도 아닌 정확히 낀세대인 꿀꿀한 감성은 세대의 구분이 너무 부질없어 보인다. 그저 지금을 함께 살고 있다는 동시대로서 세상을 읽고 싶다. 그리고 아직 싸워야할 전선들이 곳곳에 위치해 있음을 몸으로 느낀다. 돈과 머리가 아니라 그저 동물적 감성으로 웹을 접하고 구축할 수 있었던 힘도 바로 그 설레임 때문이었을 것이다. 몇해전부터 전시기획자로서 시각 이미지 생산자들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의 시각적 소비를 돕기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한다. 물론 웹도 그 중의 하나일 뿐이다. 알다시피 돈이 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일이 돈이 되게 만든 것이 일의 존속을 위해 매우 절실하다는 것을 느낀다. ■ 최금수

Vol.20001123a | 남한 시각 이미지의 그물망 만들기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