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살이

최영문展 / painting   2000_1103 ▶ 2000_1109

최영문_사람살이-정체된시간_캔버스에 혼합재료_50×63cm_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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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의 만남_2000_1104_토요일_05:00pm

최영문 Tel. 019-351_5196

전북예술회관 2층 4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경원동 1가 104-5번지

사람살이에 대한 푸념 ● 저녁 식사 후 힘찬, 단아와 가벼운 시간을 갖고 작업실로 자리를 옮긴다. 이곳은 나만의 공간이다. 허나, 세상 모든 일과 모든 사물이 머릿속에 공존하는 만상만물의 공간이다. 가끔 무엇인가 구속되어 붓을 대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자체가 삶에 커다란 활력과 희망을 주고 있다. 어찌보면 아름다운 구속이다. ● 그림에는 내용과 형식이 있다. 작업을 하다보면 내용보다 형식에 치우칠 때가 많다. 무엇을 얘기하기 보다 어떤 방법으로 어떤 기법으로 화면을 채우기에 급급한 것 같다. 새로운 재료, 새로운 화면구성, 새로운 기획적 전시를 생각하기에 항상 분주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가슴깊이 잠재된 의식이 있다. 그것은 미약하나마, 축적되온 과거의 생각들의 집합체이다. 가끔 그것을 들춰보고 싶을 때가 있다. ● 그림의 테마는 -사람살이-이다. 어찌보면 즐거움보다 눌림적 어감이 강하다. '살이'는 자기도 모르게 무엇인가 구속되어 살아가는 삶을 나타낸다. 이를테면 인생살이, 머슴살이, 살림살이, 처가살이, 시집살이 등....... 그러나, 그 속엔 저항과 희망과 무감각이 공존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내포되어 있다. 나에게는 그림살이, 선생살이, 아빠살이, 남편살이 등등이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무의식의 복잡한 '살이'안에 때론 구속되고, 때론 벗어나고픈 욕망과 이를 극복하는 야심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스스로 타고난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다. 그런 '살이'에 각자가 충실하고, 남을 생각한다면 세상은 아름다움이 가득한 공간으로 남을 것이다. ● 그림 속에서 나무, 사람, 기하형태, 해, 달, 산 등...의 형태를 자주 접한다. 보이는 그대로 대표성을 띄는 상징적 표현인 것이다. 그게 바로 자연과 인간인 것이다. 우리가 '사람살이'에 급급하여 자연을 잊고 살 때가 많다. 다행이 요근래 환경에 대하여 강조하거나 자연을 생각하는 모임들이 많이 결성되고 실천되어진다. 그러나, 그림속에 등장하는 자연적 요소는 풍경으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자연은 아니다. 나무는 '나무살이' 산은 '산살이' 자연은 '자연살이'.... 우리들의 '사람살이'와 동등하면서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싶음이 간절한 것이다. ● 요즘, 도선국사의 자생풍수에 많은 매력을 느낀다. 물론 풍수적 해석으로 보면 중국의 풍수에 비해 민속신앙적 요소와 불교에 치중됨이 엿보이나, 땅을 아픈 어머니의 몸으로 생각하고 허한 부분에 뜸을 놓아 낫게 하는 비보의 사상이 아름답다. 우선 자연 자체를 생명으로 본 것이 좋다. 그리고, 허한 부분을 비보하는 마음이 생기는 주요 요소는 시각적 감각인 것 같다. 그곳에 무엇인가를 부여함으로써 안정을 찾는 것이다. 이는 어찌보면 자연과 조형물의 가장 합리적인 조화의 사고일 것이다. 이처럼 인공을 유지하기 위한 인심쓰듯 보존되는 자연에 대한 이해보다 자연 속에 공존하는 사람들의 삶을 나타내는 것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표현 형식에 대한 생각 ●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일 것이다. 그러한 결실로 지금은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보다 다양성을 함께 누리는 폭넓은 문화로 발전된 것 같다. 순수미술이냐 디자인이냐, 평면이냐 회화냐, 서양화냐 한국화냐를 나누고, 가늠질 할 때는 아니다. 예술의 표현 범위는 서로의 경계선을 이미 지웠고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범위를 넘나들고 있다. 가끔은 나에게 한국화 전공이냐고 묻곤 한다. 전공은 서양화이지만, 단지 시각 언어를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 방법적인 분류의 인식은 이젠 필요 없을 듯하다. 그렇기에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표현 방법이다.

내용과 형식의 딜레마 ● 작가들은 작업을 하면서 내용보다 형식에 고민을 많이 하고 감상자들은 형식보다 작가의 내용을 읽어보려 나름 데로 해석해 본다. 서구에서 새로운 미술이 들어오고 그 다양성에 꽤 끌려 다닌 듯하다. 대학시절 그저 새로운 기법에 대해 많은 흉내를 내보았다. 세월이 지난 뒤, 그것은 예술의 철저한 유행성 이였던 것 같다. 전통회화에서는 형식의 다양화보다 내용의 다양성이 많게 보인다. 그러나 자연 속에 살며시 드러나는 모든 전통적 요소에서는 다양한 형식이 내포되어 있다. 단지, 우리가 미신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에서 해석해서 등한시한 것뿐일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중세미술은 종교 그 자체였다. 편견만 없었다면 서구의 것만을 쫓는 형태로 발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표현하는 시각적 방법에는 인공의 위대함을 자연에 펼치는 시각 돌출 방법과 자연에 자연스럽게 인공이 흡수되는 동화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우리 미술은 후자에 대한 사고 자체를 하지 않은 정도로 생활 속에 익숙하게 잠재되어 왔다. 그런 자연과의 동화를 바탕으로 종합적 시각 이미지 표출에 대한 요소를 일찍이 우리에게 가르치려 안간힘을 썼다. 작가의 전시는 한시적이지만, 생활에 흡수된 시각이미지는 세월을 묻어내며 오래 머물렀다. 그런 생활 속의 시각적 언어 표현이 너무도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시각적 표출뿐만 아니라 삶을 윤택하게 하는 정신적 풍요가 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형식에 치중하는 작가가 되어갈 때마다, 내용이 우리 삶에 주는 약이 되는 효력을 생각하곤 한다. 염원도, 신앙도, 사이비도, 삶 속의 어느 하나도... 누군가에게는 미술로 존재할 수 있다. ■ 최영문

Vol.20001030a | 최영문展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