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만드는 이미지, 이미지가 만드는 세상

노순석展 / painting   2000_1023 ▶ 2000_1101

노순석_세상이 만드는 이미지, 이미지가 만드는 세상_54×600cm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2000_부분

사비나미술관 서울 종로구 안국동 159번지 Tel. 02_736_4371

나의 작업은 세상을 해체시키는 작업이다. 하나의 화면 위에 여러 개의 단편적인 이미지/이야기들을 뿌려놓아 관객의 시선을 분산. 이동시킨다. 화면 위에서 개별적 이미지들로 해체된 세상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이렇게, 인과성이 있건 없건,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되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자기존재를 드러내는 유기적 관념적 실체가 세상이라고 할 때, 산재성, 다양한 이야기들을 보여 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총체성을 담보해 내는 일이다. 사소하지만 주변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래서 '일상'의 가치를 넘어서 '역사'로 까지 발전된다. ● 이야기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세상 속에서 이미지/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관계에서 비롯된 욕망이라면, 회화 속에서 욕망은 희화화된 인물들을 통해 일차적으로 상징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인물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이차적으로 서사적 구조가 만들어진다. 즉 나의 그림은 허구가 허구를 만드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서사적 허구로 변한 세상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세상과 대립한다. ●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나는 관객의 '움직임'을 생각했다. 그것이 화면 위를 부유하는 시선이건, 그림 앞을 서성이는 발걸음이건, 그 움직임이란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림 앞에서의 시선 혹은 발걸음의 움직임은 공간을 만들고 그 속으로 시간과 기억이 스며든다. 이러한 행위가 바로 읽기이다. 읽기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움직임이다. 우리는 본다, 지나친다 그리고 기억한다. 이 기억들은 새로운 만남을 거듭하면서 잊혀지고 지워지고 고쳐지면서 그 색깔을 바꿔간다. 우리의 움직임 즉 살아있음 이것이 바로 '사건'을 발생시키는 요인이고 그것은 그림 속에 산재되어 있는 이미지/이야기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깊고 넓은 혹은 건너 뛸 수 있을 것 같은 단절들 속에서도 그림은 계속되고 그것은 우리의 시선을 끝없이 유혹한다. 여기서 우리는 일견 양립되어질 수 없는 이질적이고 단절적인 이야기들의 병렬구조 속에서 우리의 움직임이 진행되어 지면서 어떻게 텍스트가 짜여지게 되는지를 보게된다. 이러한 우리의 역동성은 읽기의 불연속적인 흐름 속에서도 연속적으로 행해지는 의미의 수정(즉 선험적 의미를 무효화시키는 새로운 사건의 연속적 등장에 의해 의미규정이 끝없이 차연 되어 지는)을 가져온다. 어떠한 사건도 그것이 발생한 시점에서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하나의 사건은 그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의해 반성적으로 읽혀질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된다. 겪은것, 지나쳐 온 것들의 사라짐, 잊혀짐은 '역사적인 것'의 드러남의 조건에 다름 아니다. 사라짐 혹은 잊혀짐 없이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억하는 것, 기억하려는 것, 그 모두가 잊음에서부터 출발되어지며 그 잊음은 우리의 행위 (기억함과 되찾음)를 통해 역사성을 갖는다. 잊음과 기억 사이에는 그리하여 과거를 회고하는 시각이 아니라 내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수평적으로 전개되는 나의 작업은 이렇게 '잊음'을 유발시키고 '읽기'를 가능케 하는 구조를 가진다. ● 해체는 조합을 전제로 한다. 해체가 작가의 몫이라면 조합은 보기/읽기를 통한 관객의 몫이다. 읽기란 (작가에 의해) 주어진 세상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 의해) 스스로의 세상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 나의 그림은 우습다 또는 가볍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삶이 무거울수록 그것은 쉽게 희화화되어 진다. 가벼운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는 무거움의 중력으로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노순석

Vol.20001025a | 노순석展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