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곡미술관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02_737_7650
'아버님의 가냘프고 흉해 보이는 다리에서 느껴지는 아득한 죽음의 그림자…' 김성남이 '다리'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이렇게 부친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됐다. ● 그리고 이전의 작업들(사람이나 동물의 다리, 뒷모습 등)은 최근의 '소의 다리' 연작으로 이어지고 있다. "왜 다리를 그리는가"라는 질문에 작가는 "그냥 좋아서…"라고 답한다. 그냥 그리는…. 이는 행해지고, 행하는 즉, 어떤 명확한 방향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작가에게 어떠한 자극이 주어졌음이다. 더욱이 작가가 주제나 어떤 메시지를 포함하는 것이 아닌, 물론 개념과 상징을 포함하여 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어떤 것을 해본다는 것은 사고의 측면을 자극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이 해 놓은 작품을 '바라보면' 그것이 다른 가능성을 제시해 주기도 할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 시각적인 영감과도 같은 거친 드로잉들은 김성남이 찾고 있는 그 어떤 무한의 공간으로 이끌고 있다. ● 느낄 수 있는 것. 김성남은 짧은 언어로 함축된 의미를 담는 시의 매력처럼 자신 내부의 의식과 감정의 투영을 서사적으로 표출해 왔다. 이것은 초인(超人)과 야인(野人)으로서 되풀이되는 이전 작업의 해석을 가능케도 했다. 이렇듯 이전의 작업태도가 서사(敍事)적이었다면 최근 작업은 다분히 서정적(敍情的)이다. 작가는 사물의 미적 재현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고찰(생각해내기)보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물의 이념이나 형식을 산출하고 발견해내며 표현의 가능성을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행하기)들에 몰두해 있다. 주로 자신 내부 속에 꿈틀거리는 욕구, 순간, 스쳐 가는 격렬한 이미지를 담는데, 그것이 최근 소의 다리에 집중되고 있다.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와 늘씬한 다리, 그리고 뒷모습…'. 그가 좋아한다고 말한 자신의 성적(性的) 기호들을 소의 다리로 은유하고 있는 것일까? 소의 다리를 그려가면서 관능과 관음의 유희를 즐기는 지도 모르겠다. 캔버스 평면을 치밀한 선들로 가득 채워가며 무한한 욕망의 세계를 유영하고 수직적인 흐름을 타고 수없이 흐르는 형상의 선들은 묘사해가며 생명과 율동의 힘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 보이는 것. 김성남의 작업은 '밝음'과 '어둠'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특히 소의 다리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역삼각 구도나 또 과감한 삭제로 그 원인을 해소해 가고 있는 배경의 묘사는 작가가 특정한 대상의 표현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내재된 본능의 유희에 충실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또한 그의 작업이 시적인 함축을 뿜어내는 것은 그 드로잉적인 맛에 있다. 드로잉은 작가의 창작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데 작가가 포착의 대상이나 순간적인 구상, 무궁한 상상력을 여과 없이 보여주게 된다. 다시말해 김성남은 간략하고 꾸미지 않은 자연발생적인 선적 드로잉을 통해 꿈틀거리는 욕망과 표현의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작업의 표면-극히 평면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표면이 지극히 섬세한 선들로 채워진 텍스쳐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된다. 이 질감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떤 대상물을 떠올릴 수 없더라도 기억 속에 잠재된 감각적 반응이나 촉각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을 제공한다. 이것이 작가의 작업과 보는 이의 감성을 잇는 소통의 매개로서 역할 하는 것이다. ● 감상하기. 자 이제 김성남의 그림을 다시 한번 둘러보자. '왜 소의 다리일까?'라는 의문보다는 우선 '무엇이 느껴지는가'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의 조형 언어는 철저하게 작가의 손을 떠나 그림 속에 잠재해 있다. 필자의 해석과 판단에 동의할 이유도 없다. 그것은 그냥 소의 다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형태를 감싸고 있는 배경(여백)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어보자. 형태를 따라 도는 배경은 그 감상의 위치를 좌우할 것이며 그 배경이 감싸고 있는 형태는 당신의 무언가를 자극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까이 다가서서 그 여백의 밀도감을 맛보는 것을 잊지 말자. ■ 윤상진
Vol.20001020a | 김성남展 / KIMSUNGNAM / 金成男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