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0_1016_월요일_05:00pm
참여연대 철학마당 느티나무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3번지 안국빌딩 신관2층 Tel. 02_720_1991
바라봄과 그림 사이 ● 세잔느 그림의 일부분을 따와서 그린다거나 혹은 마네 그림(얼굴부분)의 어느 한 부분, 읽었던 책의 인상적인 사진과 그에 딸린 캡션을 캔버스에 옮겨 그린 그림이다. 그녀는 이전에는 주민등록증의 사진을 확대복사해서 그렸는가 하면 조선시대 전통회화의 한 부분을 끌어 들여와 그리기도 했다. 항상 2차이미지를 그림의 소재로 이용한다는 사실이 중요해 보인다. 실재 세계의 모습이 아니라 이미지로 놓여진 것들을 재(再)이미지화 하는데 관심이 있어 보인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것들은 결국 하나의 사진들이다. 사진으로 찍혀지고 재생된 이미지들을 다시 손으로 꼼꼼히, 무모하고 혹독한 시간을 견디면서 캔버스의 평면 위에 그려놓았다. 그렇게 그려진 이미지는 결국 작가 자신의 감정, 또는 특별한 메시지나 목적을 지워나간 자리에 텅 빈 기호처럼 존재한다. 그것은 그 어떤 것의 재현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또 다른 순수한 재현을 닮았다. ● 그녀는 컴퓨터의 스캐너가 대상을 여과 없이 훑어내는 것 마냥 자신이 선택한 이미지들을 눈으로 스캐닝해서 손으로 그렸다. 작가에 따르면, 캔버스라는 그리드 속에 다시 수많은 그리드를 형성하여 이미지들을 이미지성에서 해방시키고 하나의 단위들로 환원시킨 셈인데 그것은 결국 컴퓨터 모니터의 픽셀(pixel)이 그러하듯 화소(畵素)로서 기존의 이미지를 읽어내고 변환시킨 것이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그 모자이크 같이 촘촘한 배열들로 이루어진 그림은 본래의 원형을 재생산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드라마를 지닌 것도 아닌 그저 눈으로 2차 이미지를 스캐닝 하듯 그린 현재형의 봄(seeing과 scanning)의 그림이다. 그것은 과거 시제의 원형과 미래 시제의 새로운 형 사이에서 유동하고 방황한다. 그녀가 차용하고 끌어들인 사진이미지의 특정 부분들이 어떤 연관을 갖거나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필자 개인적으로는 그녀가 선택한 이미지들은 누군가의 초상이고, 그 초상들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대비로서 은연중 화면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것으로 작용해 보인다. 또 하나, 그녀가 그려내는 것은 세잔느나 마네 그림의 일부이지만 차용이나 또 다른 문맥을 형성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림들은 그녀의 눈, 표피만을 사용한 시선으로 기존 이미지를 스캐닝해서 보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원래의 그림과 보고 있다는 것 그 사이 어딘가에서 유동하는 끝없는 현재적 흔적들을 보여줄 뿐이다. ● 서양의 명화들을 순수한 색띠로 환원시키면서 미술사를 개인적으로 탈각시키는 고낙범의 작업(색띠로의 스캐닝), 단원이나 겸재 그림의 일부분을 커다란 붓질로 환원시키는 정주영의 그림(붓질의 스캐닝) 혹은 김홍주, 배준성의 작업과 한수정의 제록스 이미지 그림 등을 연상시키는 그녀의 그림은 여전히 회화만의 매력에 기대면서도 새롭게 회화/회화성을 질문해보는 매우 이지적이고 흥미로운 그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림에 있어 기본적인 전제가 되는 본다는 문제와 보는 것, 그리는 일의 관계, 그리고 재현에 관한 물음 및 회화의 바탕으로서의 평면이란 문제를 새삼 집요하게 그림을 통해 물어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물음의 방식이 개념적이면서 모든 재현적 욕망을 지운 자리에서 그림의 한 가능성과 회화의 플랫(flat)한 성격을 구현해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해 보인다. 또한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의 괴리와 불일치, 그리고 재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이 같은 그림을 통해 집요하게 물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단순히 스캐닝 하듯 캔버스 평면에 일치되게 그려 올려놓은 이 모자이크 같은 그림이 지나치게 단순성을 띄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울러 픽셀화 하는 이미지들이 근자의 디지털 시대의 회화적 전략이라고 믿고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영상과 컴퓨터시대를 살면서 길들여지고 체득된 익숙함에 따라 형성된 우리들 시지각을 반영한 필연적인 회화적 선택이 이런 식으로만 귀결되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수반한다. ● 재현의 욕망을 불식시킨 자리에 회화란 결국 무엇이어야 하며 그 모든 전제가 되는 본다 는 문제와 그린다는 행위의 정당성 같은 것들이 어떻게 새롭게 물어져야 하는가 라는 상당히 까다로운 질문들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그녀의 작업은 무척 의미 있는 회화라는 생각이다. ■ 박영택
Vol.20001015a | 강수미展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