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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목소리로 뿜어내는 웅변 ● 김차섭은 어눌하다. 그가 사는 방식이나 행동거지가 그러하다. 요새 같은 세상에선 더욱 그렇게 보인다. 그러하다는 사실을 더해 주듯 그는 눌변이다. 그와 말을 나누다 보면 무슨 말이 어디로 튈지 쫓기가 바쁘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눌변 속에는 침묵의 목소리로 뿜어내는 웅변이 담겨져 있다. 이것이 그의 예술이요, 그러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번의 작품전이다. ● 이제, 김차섭은 분명 말로하기 힘든 무엇인가를 "보고" 있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가 본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메를로-퐁띠의 말을 빌린다면, 화가가 본다는 것은 이제껏 비가시적이었던 것을 가시적이게 하는 행위요, 회화란 이처럼 비가시적인 채로 있는 것을 가시적이게 해주는 행위다. 그러므로 회화는 아직 그 봉인이 뜯겨져 본 적이 없는 사물 혹은 세계를 현전케 함이요, 그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세계의 열어 줌이다. ● 그렇다면 그가 보고, 우리에게 열어 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가 무슨 마술사나 된 듯 낭만적 몽상의 세계나, 초월적 신비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주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 같은 세계는 터무니없는 형이상학이다. 그러기는 커녕, 그의 그림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은 거꾸로 그려진 세계지도와 자신의 모습, 그리고 자작나무와 백송과 대나무 등이 고작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 주제들은 아무런 일관성이 없는 듯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 각자는 그 하나 하나가 그의 화력의 귀결이요, 축도들이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상이하면서도 하나요, 개별이면서도 전체를 함축하고 있는 형상들로서 그가 화가로서 걸어 온 여정의 침전 속에서 혹은 그 침전으로부터 창발된 그의 예술의 흔적들이다. ● 이에, 그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 주고 또한 현재의 서로 다른 형상들을 하나이게 해주는 이 침전의 결정체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그는 무엇을 보고,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세간의 우리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그가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우리에게는 하나의 깨달음이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주고 있는 것일까?
화가로서의 김차섭이 보고 본 것과는 달리, "본다"는 행위는 흔히 주어진 어느 시각으로부터 사물 혹은 세계를 구성하는 행위가 되고 있다. 그러할 때, 무엇을 보는 행위는 그것을 소유하는 꼴이 된다. 소유되었을 때의 사물이나 세계는 처녀가 소유되었을 때처럼 그 순수함이 유린되고 파괴되기 마련이다. 사르트르의 말이다. 이 대목에 관련시켜, 김차섭이 일차적으로 본 것은 서구인들의 시각과 사고에 의해 소유된 이 세계이다. 그러기에 이 세계는 유린될 대로 유린되고, 훼손될 대로 훼손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국토가 동강이 나고, 우리의 문화가 훼손되고, 우리의 삶이 마비되고 있음을 말함이다. 그래서 이제는 원래의 우리가 지닌 순박함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 있다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 소박한 삶, 온화한 터전으로서의 고향이, 더 멀리는 우리만의 고향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고향이 뭉개지고 잊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김차섭은 온화한 터전이었던 그 고향을 "본" 것이다. 투명한 사유를 하는 증류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이 본능적으로 찾아 좌향을 잡은 이곳 남방, 역사적으로 우리의 조상들이 오랜 이주 기간을 통해 정착한 이곳 남쪽, 이곳이 바로 이상향임을 그는 본 것이다. 그 곳이 살기 좋은 곳이듯, 그 곳은 북방의 자작나무 씨도 날아와 심어져 있고, 남방의 대나무도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 사이에 백송이 기개를 펴고 자라는 땅이다. 그곳이 동북아의 따뜻한 중심, 곧 한반도라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 이들 나무가 형상화되어 나오고, 한반도가 그려져 등장하고 있는 것은 그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고향은 고향이 아니려니"라는 유행 가사와 같이 본래의 터전엔 금이 갔고, 우아한 백송은 쉽사리 찾을 길이 없지 않은가? 그의 자화상 몇 점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여러 형태의 반응들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므로 그의 자화상들 중에는 고통과 분노와 비애가 스며 있다. 그러나 그 중에는 극복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대단한 것도 있다. 김차섭이 그의 예술을 통해 발휘하고 있는 강인한 작가 정신은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는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과거를 노래하는 회고조의 가수로 그치고 있지 않다. 그러기는커녕, 그는 과감히 일어서, 그가 찾은 대안의 이상을 갖고 현실에 맞서고 있다. 우리가 살던 원래의 터전을 파괴시켜 놓고 있는 것이 서구의 사고이니 만큼 그러한 사고를 전복시켜 놓자는 기획을 하고 있다. 그러한 기획의 회화적 착상이 거꾸로 그려진 세계 지도이다. 말로 하기엔 제격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로서는 서구인들의 잣대로 작성된 세계지도를 거꾸로 그려 놓자는 착상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기개에 찬 자화상을 군림시켜 놓고 있다. 그의 말대로 하자면, 만약 우리가 세계지도를 거꾸로 걸어 놓고 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그 자체로 이상향일 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의 거꾸로 된 세계지도는 이러한 자신감의 선포이다. 착상이 대담할 뿐만 아니라 창의적이다. 그는 그러한 착상을 능숙한 장인의 손으로 형상화시켜 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그림은 "컨템포러리" 하기까지 하다. 서구의 모던아트가 그들의 전통을 제끼고 나섰듯, 그는 또한 그러한 모던아트를 주제에 있어서나 기법에 있어서 거침없이 제끼고 나서기도 한다. 지난 '70∼'80년대를 맨해턴에서 활동하며 지내온 그로서는 거칠 것이 없다. 이처럼 그는 그곳의 최근 경향까지도 자연스레 자기 예술 속에 동화시켜 놓고 있다. 그래서 요즘 말로 하자면, 그는 담론을 편다고도 할 수 있다. 담론만 이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모던"의 색채가 스며 있지만, 그러나 그는 확신을 가지고 담론을 펼치고 있다. ● 이제, 그는 그가 찾고자 한 것을 보았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그는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 백송을 곁에 두고 남쪽을 유연히 바라보고 있는 그의 자화상이 그러함을 보여 주고 있다. 아주 밝고 편안해 보이는 자화상이다. 「비전」에 담긴 묵시처럼 어느 날, 밤하늘에 흐른 혜성이 次明山엘 들렀으니, 그것은 이제 두메 산골을 떠나 그 어눌함으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라는 암시가 아니겠는가? 김화백,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이곳으로 오도록 하게! ■ 오병남
Vol.20001012a | 김차섭展 / KIMTCHAHSUP / 金次燮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