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미술, 열정의 작가들展 ③

한국현대미술 다시읽기_80년대 소그룹 운동의 비평적 재조명   2000_1003 ▶ 2000_1024

● 한국현대미술 다시읽기는 한원미술관의 협조를 받아 '이미지 속닥속닥'에 연재될 예정입니다.

세미나_2000_1007_토요일_01:00pm~06:00pm 대학로 문예진흥원 강당

김미경_김영재_김정희_심상용_유병학

TARA_김관수_안희선 '82현대회화, 레알리떼 서울_김용식_김태호_김춘수 난지도_신영성_윤명재 메타복스_김찬동_홍승일 서울80_로고스와 파토스_문범 뮤지엄_고낙범 황금사과_이용백

한원미술관 서울 서초구 서초동 1449-12번지 Tel. 02_588_5642

③ 황금사과_이용백과의 대담_2000_0209

오상길 황금사과가 창립당시 미술계의 환경과 활동을 펼치게 되는 배경에 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미술계의 활동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자신들의 색깔을 어떻게 가지려고 했는었지...

이용백 황금사과를 만들게 된 것이 87년도에요. 그때 만해도 사회적으로 한쪽으로는 민중미술이 있었는데 사회적으로는 모두 그쪽을 지지하고 있었고, 학교에는 모더니즘 계열이 있었죠. 학교에서 교육하고 강요했던 것은 절제라는 것이었는데, 표현을 해 보고 절제를 해야하는데 절제를 먼저 배운거 같아요. 그러다보니 무엇인가 표현할 수 있는 욕구도 없고 마당도 없고, 또 표현하는 것 자체가 유치하게 터부시되고, 특히 색채를 쓰는 것 조차도 제재를 받았어요. 어릴 때 생각하고 자라오면서, 예술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었나 생각했고,. 또 하나 우리와 나이 차이가 한 20년 정도 많은 그런 선생님들한테 칭찬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부끄럽다는 생각도 했어요. 왜냐하면 그들의 시각에 철두철미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또, 우리가 결국 이쪽 모더니즘 계열, 또는 민중미술 계열 둘 중의 하나를 쫓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죠.. 결국 아주 간단하게 양쪽을 왕따시키는..., 또는 그쪽에서 우리를 왕따시키는... 뭐라고 할까? 결국 시대적 흐름보다 우리가 해보고 싶은 것, 또 궁극적으로 예술행위를 하기 위해 최초에 생각했던 부분들이 있었는데 예술대학도 그것 때문에 들어왔고. 포기할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그룹을 결성했어요. 그룹결성은 사실, 나같은 모범생도 있었지만, 전혀 모범생이 아닌, 이를테면 학교도 일년에 한 번이나 오나 이런 사람들... 학교에 계속 다니면서 모범생들이 갖고 있는 어떤 표현에 대한 한계, 그들이 사회에 대해서 발언할 수 있는 제반 여건들... 이런 것들이 뻔했거든요. 오히려 사회에 잘 적응 못하고 어찌보면 소외된 계층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만이 일종의 고유의 언어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황금사과를 만드는데 무리가 많았던 것이, 어떤 사람들은 학교에서 되지도 않는 멍청이들만 모아서 전시를 한다고도 했는데,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왠지 모르지만 우리를 부러워했어요. 일단 학교와 사회, 혹은 사회에서의 민중미술, 학교/제도권 이 양 쪽을 다 거부하면서 우리끼리 스터디를 했어요. 스터디 방법은 그동안 스터디 방법과 다르게 주로 야외에서 술먹고 놀고, 인스톨레이션도 해보고..., 작품을 평가하는 방법도 좀 바꿨어요. 만약 내작품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질문하면 내가 막 방어를 하잖아요. 방어하다 보면 결국 맨 마지막엔 하나 남은 자존심만 지키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커뮤니케이션이 예술작품을 하는데 도움이 안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예를들면 내 작품을 다른 사람이 설명하게 했어요. 이를테면 이상윤이 내 작품을 설명하고, 나는 듣는거에요. 그러면서 이상윤이 바라보는 나의 작품에 대한 생각들을 얘기하고,그리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단점이니 장점이니 얘기하고, 한사람은 변호하고 한사람은 공격하고, 그러면서 변호자와 공격자를 둘다 관찰할 수 있었어요. 그런 과정속에서 내가 생각하는 나하고, 타자가 바라보는 나하고는 상당한 차이가 있더란 말이죠. 그런 갭을 줄일 수 있는 방식을 조금 도입했던 것 같고. 그런 걸 가지고 작품에 그대로 적용시켰어요. 예를들면 교육받은게 똑 같고 자라온 환경도 비슷한지라, 표현언어 양식도 같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피해야 할 첫째는 미니멀, 모더니즘도 그렇고, 민중미술도 그랬고, 둘다 공통점이 있었던 것은 강령이 있었다는 거에요. 이건 미니멀리즘, 이건 모더니스트, 이건 민중미술... 이렇게 그리지 않으면 민중미술이 아니야... 이따위 되지도 않는 사고방식이 팽배해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예술행위에 있어서 미니멀이건 민중미술이건 배격해야하는 것은 그런 통념화시키고 관념화시키고 고정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때문에, 이 둘다 외형상 포장지는 다르지만 사회적으로 행하고 있는 노선 자체, 예술행위의 노선 자체는 같다는 평가를 내렸어요. 둘다 마음에 안들었죠. 왜냐하면 강령을 가졌기 때문에.... 예술가가 가져야할 첫 번째 부분에서 걸리는 거였죠. 그래서 우리가 하고 싶었던 것은 그것 만이라도 갖지 말자. 최소한의 강령이 있었던 게, 우리를 통일화시키지 말자는 강령을 가졌어요. 우리도..., 예를들면 이상윤이나 이런 친구는 사진도 하고 오브제도 하고 다양한 것을 했었고 대부분의 작가들, 홍동희나 백광현도 그렇고 작품들을 다양하게 했기 때문에, 전시할 때에는 일종의 조율을 했어요. 우리가 사회적으로 발언하는데 있어서, 최대치 즉, 우리의 컨셉에 맞는 걸 하기 위해서 서로가 양보를 해야할 필요가 있었어요. 양보... 예를들면 같은 매체가 겹치지 않게 했어요. 사진이면 비슷한 사진이 겹치지 않게 했고.. 가능한한 전부 다른 매체로, 다른 소재를 가지고 작업을 했고. 이상하게도 디스플레이 하고서 우리가 이미 조율을 하긴 했지만, 그리고 우리가 나름대로 생각한 세미나 방식에서 얻어진 것이지만 그 조율을 하고 났을 때, 우리는 나름대로 오픈하기 전에 그러니까 사람들이 작품을 보기 전에 만족을 했어요. 그런 즐거움이 좀 있었죠. 그때 나름대로는 우리가 최소한 어떤 작은일이지만 뭔가를 했다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오상길 좋으네요. 그룹 창립전에 대단히 열성적으로 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앞뒤의 주변상황에 관해 좀 얘기해 주시죠.

이용백 지금은 포트폴리오가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거예요. 사실 포트폴리오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참 웃기는 일이지만 사실이었거든요. 그래서 우린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는데, 그때만 해도 젊은작가가 데뷔할 수 있는 길은 딱 두가지 였거든요. 공모전, 아니면 비수기에 화랑들에 돈 십만원 이십만원 받아서 해주는 썰렁한 전시들..., 그것조차도 모교 교수들의 추천을 받아야 했으니까요. 그외는 할 수 있는 길이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대관을 해야했는데 돈도 없고. 그래서 안해본 걸 한번 해보자는 생가으로 포트폴리오를 사실 강제적으로 만들었어요. 형들한테 "자료 다 줘봐.." 그래 가지고 자료를 그냥 사진관에 맡기고 8 x 10사이즈로 한사람 당 50장 60장 됐을 거에요. 일단 맡기고 나서 자료 언제주냐 그러면, 거기 있으니까 찾아가라고 하고... 하하하.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돈 꾸고 이래 가지고 포트폴리오를 반강제적으로 만든거죠. 그래서 그걸 배낭에 짊어지고 그 당시 잘나가는 갤러리가 인공갤러리였는데, 거기가서 황현욱 선생한테 작품을 보여주었는데, 그때 나이가 24살인가 25살이었는데, 보여주고 우리 전시좀 해 달라고 했죠. 그때 당시만 해도 인공은 스타들만 해주는 곳이었는데... 그 다음 토탈 미술관 정준모씨를 만나고... 그다음은 소나무 갤러리 등 몇 개의 갤러리를 다녔어요. 어찌보면 상당히 운이 좋았던 것은 황금사과가 한번의 전시를 했지만 기획을 7개 정도를 얻어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나름대로 기뻤어요. 왜냐면 젊은작가들한테도 이런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최초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것 때문에 기뻤었어요.

오상길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갤러리에 신청했을 때 비교적 반응들은 긍정적이었네요.

이용백 왜냐면, 어차피 비수기는 아무도 전시를 안하고 대관을 하는데, 결국 운영비만 받고 하는 식이었는데, 그 사람들에게 좋았던 것은 나름대로 튼튼한 컨셉을 갖고, 그들이 이 학교 몇 명, 저학교 몇 명 이런식으로 전시를 해봐야 이슈가 되는 것도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결국 그들이 부족한 것을 우리가 채워주는 격이 되는 거였어요. 우리가 컨셉도 만들고 작업도 다 만들어서 가져가니까, 자기들은 포장만 해서 내 보내면 끝나는 거기 때문에, 아주 일이 간단해지고 수월해지면서 공은 나눠가질 수 있었죠. 우린 전시를 공짜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좋았고, 그들은 스트레스 안받고 어느 정도 다듬어진, 어느정도 그 세대 그 나이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덜 거친 사람들을 그대로 전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또 나름대로는 그때 당시 새롭다는 얘기도 들었기 때문에, 서로 우리 전시를 유치할려고 했던 거 같아요.

오상길 창립할 당시 멤버들끼리 서로 전시를 만들게 되는 과정에서의 의욕들이 많았었지요?

이용백 사실 처음에는 3명이 리드했어요. 저하고, 이상윤, 백광현 이렇게 3명이 나이차이는 있지만 같은 동기였고 다같이 일년을 휴학했었고, 다 같이 복학을 했는데... 복학을 하고 나니까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어요. 제도권과 학생들이 철저하게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거에요... 와! 이거 되게 이상하다 했죠. 예를들면 우리때 보면 웃기는 얘기지만, 시험보면 말이죠, 모르면 낙제만 면하자는 식으로 쓰고 나가 버렸는데, 최소한 자기가 무식하고 무지하고 노력하지 않고 공부안한 거에 대해서도 떳떳했는데... 시험보러 갔더,. 왠 컨닝이야... 그런 것이 누구가 컨닝하는 건 괜찮은데, 컨닝이라는거 자체가 흔히 빵구를 면하기 위한 컨닝이 아니라 일등을 하기 위한 컨닝이었다 이거죠. 나름대로, 복학을 하면서 '우리는 여기에 편승하지 말자. 1학년때 부터 원래 우리끼리 작업 해오던 사람들이니까 커리큘럼과 무관하게 작업을 진행해 가자.' 그리고 그런 걸 선생님들이 묵인해줬어요. 왜냐면 작업량이 많았기 때문에... 작업량이 다른 학생들에 비해 훨씬 많았고, 나름대로 무엇이 있었으니까 인정해 줬겠죠.. '너네는 알아서 해라.'는 식이었죠. 나름대로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까, 유행 비슷하게 되고, 경쟁심이 붙어서 학생들이 난리를 치고, 쫓아하고 그랬었는데.. 결국 3명이 주축이 돼서, 초기에 이상윤이 말한 것은 '우리 3명이 길게 가자'였어요. 그때만 해도 마인드가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3명이 길게 가자는 거였고, 나는 '여러명이 떼거지로 짧게 치고 끝내자'라는 거였어요. 그래야지만 다양성, 우리가 얘기 하고자 하는 발언을 할 수 있을 거 같았어요. 그러지 않고 이상윤과 내가 계속 그룹을 계속 진행한다면 다른 그룹이나 다른 미술운동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짧게 치고 다 다른언어로 짧게 끝내자... 그런 방식을 선택했고, 그런 속에서 철두철미하게 그거 때문에 작가를 선택하게 된 거에요. 예를 들면 작가라면, 학과에서의 사회 통념적인 저사람 작품이 좋다 나쁘다는 식의 평가에는 신경쓰지 않고, 우리 전시에만 맞게 뽑아낸 거였어요.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주장이 강한 사람이 별로 없었고, 사회적으로 사람들이 느끼기에 대개 주장이 강한 사람이 모였다지만, 실질적으로는 내부적으로 주장이 강한 사람은 없었어요. 그래서 즐겁게 리드해 나갈 수 있었어요.

오상길 황금사과가 창립될 당시 주변의 그룹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했어요?

이용백 선배들중에 메타복스, 난지도가 있었고... 일종의 못난이들 계보가 있었잖아요... 타라부터 시작해서 메타복스, 난지도...당시 이런 미운오리 새끼들말이에요. 뮤지엄 이런... 이런 선배들이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자신감을 주었던 건 사실이에요. 선배들이 없었으면 힘들었을텐데, 꿋꿋하게 양쪽 좌우가 아닌 가운데 노선을 정확하게 보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런 팀들이 우리들한테 뭔가 자신있게 발언할 수 있는 바운더리, 베이스를 제공했던 건 사실이었던 거 같아요. 그때 사실 황금사과가 1, 2 3회전을 하고 끝냈어요. 왜냐면, 기획은 그 이후에 7개를 얻어놓고 있었고... 우리끼리 그때 한가지 약속을 한 게 있었어요. 끝없이 새로운 길을 원했는데, 한 3회전 되고 기획도 얻어내고 하니까 사람들이 들뜨면서부터, 흐트러졌고, 집중력도 떨어지고.. 근데 그게 불과 1년 사이에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 몇 몇은 안그랬어요. 그 몇 몇은 역시 끝까지 이제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그럴 일은 없다고 했지만 그런게 꼴보기 싫었고. 그리고 일단 기획을 내가 얻었기 때문에, 내가 7개의 기획은 내가 마음대로 쓰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나는 황금사과를 탈퇴하겠다고, 그때 그랬거든요 열명중에 1명이라고 탈퇴하면 황금사과라는 이름이 서지 않는다는. 그래서 내가 탈퇴하게 되고 유학을 결정하게 되었고, 백종성, 이상윤, 백광현이 탈퇴를 하면서 자연해산 됐죠. 그리고 얻어낸 7개의 기획을 '동의를 구해서 이상윤에게 주겠다... 나는 (유학)가니까 이상윤이 알아서 잘 할거다.'고 했지요. 그래서 이상윤이 기획한 전시가 '메이드 인 코리아' 전, '쇼쇼쇼'도 했나. 그리고 무슨 커피 어쩌고가 있었는데 전 독일갔을 때니까 잘 모르겠고...아마 황금사과를 못하게 되어서 그런 그룹전시, 프로젝트 전시가 3-4개가 연달아 다음에 있었던 것 같고 그다음 지금까지 별다른 건 없는거 같아요.

오상길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는데, 황금사과 멤버들에게 공통된 일종의 지향성, 이념적인 목표 혹은 실천적인 목적같은 것들이 있었나요?

이용백 그런건 아니었던 거 같아요.

오상길 그럼 단지 분방하고 역동적인 이런 것들을 지향했습니까?

이용백 뭐라 그럴까... 어떤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어요. 상당히 불안한 게... 아주 우스운 예로, 술집에 가면 민중미술하는 친구들이 우리보고 모더니스트라 그랬어요. 또 거꾸로, 이 쪽에서는 민중미술 나가라는 식이었죠. 하하하... 그게 사회에 첫 발을 내딛으면서 스트레스로 작용했던 게 사실이었죠. 그랬기 때문에 이념적으로 구체적으로 뭔가를 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었던 같아요. 나이도 어렸고...

오상길 그런 이념적인 목적같은 것이 사실 중요한 것도 아니죠.

이용백 네... 중요한 것도 아니었고. 양쪽에서 누가 막 때리는데, 사실 방어하는데 급급했고... 방어하다 가는 '에이... 때려라... 때리든 말든 모르겠다' 그러면서 '우리 길을 일단 먼저 가고 보자'는 거였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것만 하자'는 것이었어요. 나머지는 프리하게 남겨두자... 열어놓자... 이런 식이었죠.

오상길 황금사과만 해도 상당히 유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었군요. 짧았지만 황금사과 활동의 성과라고 할까...? 나름대로 활동을 벌였던 주체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성과는 어떻다고 생각해요?

이용백 실질적으로 우리가 작품을 발표한 것은 1년이었고 전시만 1년에 3번을 했지만, 준비는 한 그로부터 2년 전 부터였어요. 이미 계획되어진 일이 었었고. 사실은 어느정도까지 신중하게 계획을 세웠냐 하면 우리같은 사람들이 전시를 하면 누가 오겠어요... 아무도 안 오지. 그러니까 그때만 해도 제일 잘 나가던 갤러리가 금호갤러리였는데, 그래서 금호 갤러리에서 개관기념전을 하는데 거기 사람들이 다 왔어요. 그래서 그걸 맞췄어요 날짜를... 나름대로 정교하게. 하하하... 사람들이 그래서 우리 전시를 보러온 게 아니라 금호 전시를 보러 와서 다 들렀지요. 그때 금호전시만 해도 '이들이 가장 새로운 그룹, 작가다' 이런 대표성을 띠고 하는 거였는데, 너무 웃기게, 그걸 보러왔다가 우리걸 보고서 사람들, 평론가들이 우리 걸 더 많이 실어주고, 광고도 많이 해줬어요... 그다음 질문이 뭐였죠?

오상길 그런 성과에 대한 자평을 한다면? 말하기 쑥스러운 부분인지 모르겠지만...

이용백 지금은 그때 황금사과 그룹 멤버들이 작품 활동하는 이가 거의 없어요. 대부분... 어떻게 얘기해야 하나? 실종된 사람도 있고, 아무도 안 만나고 시골에 혼자가서 생활하는 사람도 있고... 또 한사람은 시골에서 혼자 2년에 걸쳐 집 짓고 그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회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한 3명이 있고... 유학간 사람도 있고... 현재 당시 멤버 10명중에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저 혼자인거 같아요.

오상길 황금사과를 주도했던 리더의 입장에서 황금사과 활동이 우리 미술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시는지...그건 80년대적인 성격을 구축하는데도 의미가 있을 것 같고, 또 주변의 동년배나 거꾸로 선배들한테 자극이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용백 좀 쑥스러운.... 그런 건 있는 것 같아요. 후배들에게는 제도권과 손잡지 않아도 발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주었고, 선배들한테는 웃기지만 그동안 있어왔던 이념과 어떤 생각들 이런 것들이 통일되어야만 전시를 하는 것이 통념화되어 있었는데, 흔히 말하는 컨셉 자체를 형식론적이고 관념적으로만 잡아왔다는 거죠. 그렇지 않고 전혀 다른 매체,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상충되고 충돌되는 작품들만 가지고도 우리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거죠. 이를테면 이념을 전달할 수 있다는 거죠... 그동안은 마치 선배들은 유니폼을 입고 마치 합창단처럼 똑같은 노래를 떼지어서 불렀는데 그랬을 때 오는 장점도 있겠지만, 우리같은 경우는 옷도 제멋대로 입고 노래도 제멋대로 불렀는데, 그 불협화음, 충돌들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졌던 것 같아요. 사람들은 강하고 또는 저는 폭력적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유니폼을 입고 다 같이 소리지르는 것에 대해서, 그런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어도 이런 불협화음 갖고도 미술전시가 가능하다는 것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다음에... 시대적으로도 그게 초창기였던 것 같아요. 우리 사회가 처음으로 민주화되어가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에서 다른 발언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뭐 그런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오상길 당시 활동에 대한 주변의 비평적인 시각이랄까? 구체적인 리뷰라든가 그런 것도 있었을테고, 주변에 개인적으로 접촉하던 여러사람들도 있었을텐데,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황금사과가 보여지고 읽혀지는 맥락이 있었을텐데. 그런 비평적인 맥락에서의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용백 그때 사실은, 전시를 오픈하고 많은 평론가들이 찾아왔어요... 술도 사주고... 그러면서 얘기를 하자... 그러면서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갔냐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초창기 그룹전이다 아니다' 이런식으로 끌고 갔어요. 제가 알고 있기로는 '해체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조그만 책하고, 정종호 강내희가 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나오고 얼마 안되었던 때인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책, 사실은 평론가들은 당시에 말하는 세계적으로 많이 논란이 되고 관심사가 되고 있었지만, 그런 미술운동이 실질적으로 우리 미술계에서 일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제생각으로는 갖다 끼워 맞춘 것 같아요. 왜냐하면 모태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철두철미하게 좌와 우, 아니면 민중과 모더니즘에 대한 어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런 사회적 배경에 대한 것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우리의 작업이었었는데, 평론가들은 외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입해서, 우리를 수입된 옷에 갖다 맞췄어요. 제 생각에는 지금도 그런데 많은 무리가 있었던 것 같고. 실질적으로 작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것과는 별개로 작업을 지금까지 진행해왔고, 그것 자체가 자연발생적인 이런 것들,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 이런 것들을 오히려 외국의 이즘을 들어서 설명하기 보다 우리나라 문화사적으로 예를들면 선배님들, 40대 중반 형들보면 꼭 노래방가면 팝송 부르잖아요. 통기타 치면서... 팝송 안부르면 무식한 거 처럼... 그리고 철학책 꼭 옆에 끼고 다니고... 내 위로 10년 위의 선배들은 철두철미하게 그런방식으로 자신들을 무장했던 것 같아요. 나팔바지 입고, 장발... 뭐 그런 것들... 분명 그건 수입이거든요... 내가 한국문화, 대중문화에 대한 편집을 한 적 이 있는데, 최근들어. 그러다 느낀 것이 9시 뉴스에 나온 문화, 그 옛날 미니스커스 수입되고, 월남전 겪으면서 유행하던 노래들, 70년대 10월 유신 나오면서 대학생들이 불렀던 노래, 패션 이런게 다 있는데, 우습게도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까지 아무 것도 없어요, 문화가... 내노라하는 문화가... 없었어요.

오상길 조용필 문화가 있었잖아요. 하하하.

이용백 조용필은 아니죠...그러니까 거기에 대한 문화가 전혀 없다는 거에요. 그전과는 아주 구분이 될 정도로..

오상길 재밌는 현상이네요.

이용백 그러니까 학생운동 외에는 없었어요. 민주화하는 거 외에는.. 그러니까, 구호만 있었지 문화는 없었다는 거에요. 그런식 입장에서 평론가나 이론하는 사람들이 접근해 줬으면 우리도 좀 즐거웠을 것 같은데, 되도 않는 포스트모더니즘 가지고 갖다 붙여서 많은 무리가 있었죠.

오상길 80년대에는 여러 소그룹들이 있었어요. 아까 그 못난이 계보, 이 전시 기획이 이 못난이 계보를 찾는건데... 이 계보가 우리 미술계에서 비평적으로도 얼마간 못난이 계보의 성격을 유지하는 것 같아요. 70년대 모더니즘이라고 일괄되어서 표현되는 소위 단색조 회화 그룹들이 상당한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집단화시켜서 부를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런 그룹들과, 현실과 발언, 광자협같은 그룹들로부터 시작해서 궁극적으로는 민중미술협의회라는 거대한 세력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민중미술이라는 두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흑백논리에 가까운 치열한 공방전, 그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았던 이 못난이 그룹들에 대한 비평적인 이해는 대단히 미흡한 것이었다고 보아요. 다시말하면 그들의 의식이라든가 활동, 작업에 담겨져 있는 현장성에 대한 접근보다는 좀 전에 이용백씨가 지적하셨던 것처럼 당시 젊은 평론가들에게 제3의 대안으로 인식되었던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광범위한 담론에의 천착의 한 일환으로서 이런 흐름을 소화하고 이해하려고 들었던 비평적인 의도들이 매우 농후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맥락에서 비평적으로 우리 미술사에 정리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움직임에 대한 소위 못난이 그룹의 막내로서, 앞선 선배들의 활동을 지켜봤고, 스스로도 그런 계보속에서 80년대의 대미를 장식하는 비중있는 그룹으로서, 짧지만 화끈하게 활동했던 그런 경험을 토대로 80년대 소그룹운동이라는 것을 거칠게라도,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는지..., 계보 자체의 흐름이나 혹은 전체를 다 뭉뚱그려 보았을 때 그 성격들과 의미들, 가치에 관해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용백 80년대 소그룹 운동이 가지는 공통점은 첫째 큐레이터가 안 끼어 있다는 거예요, 전시기획이 몽땅 작가들에 의해서 기획되고 의도되어 졌고, 전시 처음 출발부터 마지막까지 작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아주 하찮은 것까지도... 그런게 다른 그룹들과 커다란 차이가 있었고.. 또 하나는, 다는 아니겠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아까처럼 대개 자유로웠던 사람들같아요. 각론이 좀 덜했고, 좀 덜 폭력적이었고... 거기서 좀 다른 점은 큐레이터가 배제됐다... 다시말해 평론가도 배제됐다는 거에요... 제가 느끼기에는 평론가들은... 이렇게 얘기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미술가들은 자기들이 표현하고 싶은 어떤 영역, 욕구, 이상들 때문에 사실 커다란 힘을 갖고 있는 파벌같은 것을 무시할 수 있는 젊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용기도 있었고. 그런데 제가 바라보기에 당시 평론가나 큐레이터들은 철두철미하게 제도권안에 있었어요. 양쪽에... 그 가운데서 우리 쪽 못난이 선배님들같은 길을 가는 평론가나 큐레이터, 미술관계자는 단 한명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사실은 웃기지만 못난이 쪽 형들이 좀 이빨이 세지 않았을까... 왜냐면 스스로 충족해야만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발언하고, 아무도 우리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무장하지 않으면 안됐고, 그러니까 그 자체내에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죠. 적은 인원이 그 자체내에서 많은 걸 분담하게 되는 거죠. 다른 쪽 전시들은 구호를 외치고, 작품을 그려내면 끝나는 거였는데, 우리는 작품도 해야되고, 구호는 외치는지 모르겠지만, 자기 스스로를 무장하는 그 뭔가가 있어야 되는 거에요. 공격은 계속 되어오고, 공격 속에서 우리를 대변해서 우리를 얘기해줄 수 있는 평론가나 큐레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무장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부분이 차이라면 큰 차이점인 것 같아요.

오상길 지금 얘기하신 부분과 관련해서, 그 당시 80년대 소그룹운동에 의해서 성격지워지는 일련의 움직임에 대한 지금까지 우리나라 미술계에서의 시각,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용백 전혀 안 되어 있죠.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그런 것도 있을 거예요. 제가 91년도부터 독일 유학을 갔으니까 그 이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지만, 그 당시는 평론가도 몇 명 없었던 거 같아요. 끽 해봐야 10명... 사실 그때 놀랬던 게 모 평론가는 1년에 평론을 170편 씩 썼단 말이에요.

오상길 잘나가던 평론가였던 모양이네요...하하

이용백 일주일에 3편씩 썼다는 얘긴데... 사실 말해주는 게 결국 그 몇 안되는 평론가들이 그많은 글을 썼는데, 경력은 늘어가는데 실적은 주는 것 같은... 소리는 열심히 지르는데, 실지로 얻을 만한 것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거나 중요한 글을 쓴 것은 없는 것 같아요. 소그룹운동이 힘들었던 건 그런부분이 아닐까....

오상길 이번엔 80년대 소그룹운동 이후 지금까지 우리 미술계의 현장, 중간에 물론 이용백씨는 독일로 유학을 갔었기 때문에 공백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대충 돌아와서 그 흐름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파악은 하고 있을테니까... 80년대 소그룹운동으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의 상황과 80년대 소그룹 운동과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보세요?

이용백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있어요. 달라진 건 80년대 모든 소그룹운동, 미술전시는 철저하게 작가가 기획했다는 거에요. 90년대 초기 중반 이후로 들면서 많은 평론가, 큐레이터들이 전시를 기획하고 있어요. 그런데 결과론적으로 볼 때, 90년대 이후로 모든 전시가 단발성 이벤트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미술 사회... 이런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기하지도 못하는 것 같고... 또, 마치 80년대 초기의 모든 현상을 포스트모더니즘에 끼워 붙이는 것처럼... 지금 전시들은 마치 그런 것 같아요, 자신들의 발언, 이론을 정립시키고 증명하기 위한 소도구로서 전락하는 느낌을 받고... 또 때론 그런 것에 맞춰 가면서 즐거워하는 작가도 있는 것 같고...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작가들이 바라보는 사회와, 평론가가 바라보는 사회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모태가 틀리고 살아온 방식이 틀려요. 작가들,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들을 보면 나쁘게 말하면 웃기면서 살아왔고, 좋게 말하면 양심을 지키면서 살아왔다고 봐요. 도덕성에 대해서 존경하는 부분인데... 저는 평론가들의 도덕성에 대해서, 제가 말하는 도덕성이 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지켜온 것들... 나는 그들이 그런 것들을 지켜오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의심을 안할 수가 없어요. 사실은 상당히 회의적이에요. 지금의 전시들은... 아시겠지만 현장에 생전 와 보지도 않고, 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생색낼 때는 꼭 끼어있다는 것이 재수 없고... 정확한 것은 작가들의 작품이 이념을 전달하기 위한 소도구로 활용되는것, 또는 데코레이션처럼 취급당하는 것에 대해 안좋게 생각해요.

오상길 지금 그런 문제들이 이 전시기획을 통해 제기하려는 문제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작가라는 존재가 사회적인 현실적 성취로 충족되지 않는 또 다른 성취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들에 의해서 조금 다른 눈으로 읽혀지고 보여지고 해석된 결과물들이 작품이겠죠... 그래서 비평가들은 그런 작가들의 눈에 의해서 읽혀진 세계, 어쩌면 현실과 또 다른 세계이면서 한편으로는 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를 이해하고 분석함으로써 그 문화를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또는 문화비평적 시각에서 예술가들의 그런 인식과 감성적인 대응들을 다른 문화적 현상들과 관련하여 예술작품과 작가를 이해하려는 시각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런 비평적 맥락과 미술의 현장이 서로 어떻게 조우하는 가에 따라 문화는 여러 가지 변수를 가지고 파생될 수 있고, 또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겁니다. 작가들이 보는 세계, 이는 철저하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사유, 사색 혹은 감성에 기반에 두고 있는 자기다운 발언, 자기 문화에 대한 인식, 자신의 표현욕구에 대한 정직한 태도들 이것이 작가들에게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비평은 문명사적 지식과 예지력을 토대로 문화 읽기를 위한 매우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감성과 지적인 통찰력을 필요로 합니다. 물론 예술과 문화에 대한 깊고 따뜻한 애정이 바탕이 된,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집중할 수 있겠어요? 역사의식을 갖는 비평가로서의 윤리성 같은 것들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평가가 아니더라도 미술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라든가 갤러리스트들, 저널리스트들도 마찬가지로 한편으로 난해하고 고도로 전문화 되어있는 현대미술의 성격을 이해하고 함께 향유하기 위한 전문적인 지식과 애정을 가져야 할 겁니다. 80년대의 소그룹 운동들은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거대 집단들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뚫고자 몸부림치는 젊은 예술가들의 열정의 현장을 담고 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미술계에는 이 문화에 대한 비평적 접근이 부재합니다. 그러나 이 기획이 지나간 미술운동을 재평가하자는 의도로 비쳐지길 원치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80년대 소그룹운동을 통한 새로운 문화 인식을 통해 지금의 미술현장에 새로운 시각과 역동성을 부여해 보자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90년대 이후의 미술계가 제도의 강화와 제도운영의 전문성 부재라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고 제도와 예술가들의 역동적 현장의 불균형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 지고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이용백 씨는 이런 90년대 이후 한국 미술계의 파행이 어떤 원인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그리고 이런 현상이 80년대에 대한 해석의 오류와 어떤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또 다른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용백 제 생각에는 80년대와 90년대의 가장 현격한 차이는 과거에는 우리 나라 대학에 평론을 가르치는 학과가 없었잖아요. 서울대 미학과, 홍대 미학과 정도... 그리고 예술행정에 대한 학과는 없었는데, 홍대에 예술학과가 생기면서 여러 학교에도 생겼단 말이죠. 과거에 열 명이서 소화를 하던 것들을 수 십명의 졸업생들이 몰려나오면서 전시도 기획하고 뭐 그렇게 되었고, 또 하나 관 주도 전시가 많아졌다는 거예요. 비유가 적당할 지 모르겠지만 옛날에 국전이나 이런 공모전이 세력을 가졌던 것처럼 지금도 관 주도에서 분명히 어떤 세력을 갖게 되는 부분이 있다는 거에요. 매스컴화 되는 것도 있고, 또 철두철미하게 사회적 주류 미디어는 그 쪽을 쫓고 있어요. 신문이나 방송들은 그 쪽을 issue화시키는 것이 수월하고, 빠르고, 책임이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지요.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프럭서스 그룹을 보면 그 주변들이 거의 20대부터 그 멤버들과 같이 먹고 놀고 평생을 같이 늙어갔단 말이예요. 같은 이념하에 같이 평생을 늙어가면서 모든 것을 기록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없어요. 옷 갈아입는 것처럼 쉽다는 거예요. 평론이... 오히려 작가들은 옷을 좀 덜 갈아입는 편이고, 좀 신중하게 갈아입는 편인 것 같은데, 평론들이 오히려 너무나 남발하다 보니까 옷을 너무 빨리빨리 갈아입고, 또 거기에 대해서 심사숙고하지 않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전시들이 이벤트성 들이기 때문에 책임감이 따르지 않는 거예요. 작가들은 그렇지 않죠. 작가는 자기세계가 계속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평론가에 비해선 분명히 무게가 훨씬 더 있을 거예요. 무거운 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고, 또 지금까지의 예를 들면, 어떤 평론가가 그 사람이 논문을 뭘 썼는지 모르겠지만 그 논문 하나 갖고 평생 사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또 어떤 평론가 그러면 주로 어느 쪽의 작품을 쓰고, 그런 작품을 어떤 작가들, 한마디로 자기가 평론할 수 있고, 자신 있게 평론할 수 있고, 또 그들을 최소한 10년 이상 지켜 보았다던가, 이런 평론은 없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는 돈 좀 주면 써 주고, 그러면서 현실 타협형, 또는 자기부재...그런 식으로 가는 것 같아요.

오상길 마지막으로 이건 좀 다른 각도의 질문인데, 독일에서 몇 년 있었죠?

이용백 5년 반이요.

오상길 5년 반 유학하면서 어느 정도 독일 미술계의 성격이라든가 양상이라든가, 물론 독일은 지방자치제가 잘 되어있기 때문에 서울처럼 한군데 집중되어 있는 건 아니지만 본 독일 미술과 한국미술의 차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용백 가장 큰 차이라면 흔히 독일미술에서 볼 수 있던 대부분의 전시가 대대적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대부분 개인전 위주에요. 테마를 갖고 하는 전시는... 테마 전시는 크고, 나머지는 거의가 개인전이에요. 예를 들면 백남준도 개인전을 했지만 초기부터 60살까지 모든 작품들을 한 번에 보여준다는 거예요. 대부분 10년에서 20년 정도 이상을 했던 작업을 한번에 보여주기 때문에 작품을 해독하는 방식이 좀 달라요. 한국에서는 이 사람 작품 좋다. 어? 이 작품 좋네? 라는 식으로 평가가 이루어지는데, 독일에서 제가 느낀 것은 이 작품이 좋다 저 작품이 좋다가 아니에요. 그 많은 작품들, 몇 십년 동안 해 왔던 그 많은 작품들을 한꺼번에 보여주기 때문에 삶을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대한 무게감이 굉장히 커요. 뭐 이 작품 좋다, 나쁘다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평가되기에는 삶이 너무 무거워요. 작품을 느끼기 전에 그 작가를 먼저 느끼고, 나름대로 작가의 삶의 무게를 가지고 작품을 해독할 때, 다르게 느껴진다는 거죠. 근데, 우리는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작가의 삶은 철두철미하게 배제되어 있어요. 결국 결과만 보고 작품 몇 개만 보고 삶이 역추적 되어진다는 거죠. 그런 방법이 독일과 한국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고, 또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지방자치제 말씀하셨지만은 지방마다 고유의 특색이 있고, 성격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골고루 균등한 무게로 여러 부류가 공존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우리는 아무래도... 미디어가 우리나라는 통합되어 있잖아요. 주류미디어인 신문과 방송이 통합되어 있고, 결국은 신문과 방송이 측정하는 것이 주류가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거죠. 근데, 거기는 신문과 방송이 각 도마다 있단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각 도마다 다른 주류가 있고, 각 도마다 다른 시각이 있다는 거죠. 그것이 자연스럽게 다원성, 다양한 문화를 가질 수 있게 만드는데, 우리나라는....결국은 집중성인 것 같아요. 주류미디어의 집중성.....그래서 오히려 상당히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왜냐하면 주류미디어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곧 메인으로 자리잡기 때문에 제 생각에는 이것이 예술가들, 미디어 아티스트들이 경계해야 될 첫 번째 것이 아닌가 싶어요.

오상길 긴 대담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Vol.20001009a | 현장의 미술, 열정의 작가들展 ③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