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미술, 열정의 작가들展 ①

한국현대미술 다시읽기_80년대 소그룹 운동의 비평적 재조명   2000_1003 ▶ 2000_1024

● 한국현대미술 다시읽기는 한원미술관의 협조를 받아 '이미지 속닥속닥'에 연재될 예정입니다.

세미나_2000_1007_토요일_01:00pm~06:00pm 대학로 문예진흥원 강당

김미경_김영재_김정희_심상용_유병학

TARA_김관수_안희선 '82현대회화, 레알리떼 서울_김용식_김태호_김춘수 난지도_신영성_윤명재 메타복스_김찬동_홍승일 서울80_로고스와 파토스_문범 뮤지엄_고낙범 황금사과_이용백

①김관수_②안희선_③김용식_④김태호_⑤김춘수_⑥신영성 ⑦윤명재_⑧김찬동_⑨홍승일_⑩문범_⑪고낙범_⑫이용백

한원미술관 서울 서초구 서초동 1449-12번지 Tel. 02_588_5642

① TARA 김관수와의 대담_2000_0214

오상길: 바쁘신데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선 그룹을 만들게 되시는 시점의 미술계의 환경, 분위기, 정서는 어땠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김관수 동년배 친구들이 이미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을 때, 저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래서 경희대에 다니면서 서울대나 홍대 출신의 작가들의 생각을 알 수 있었지요. 특히 친구인 김장섭군을 비롯한 몇 몇 친구들을 통해서 현대미술이라는게 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걸러진 현대미술은 명쾌하고 논리적이었어요. 하지만 곧 어떤 논리가 또 다른 논리를 압도하는, 어떤 측면에서는 미술이 논리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면서도 현대미술을 하려면 저 많은 책을 다 읽어야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굉장히 어려운 골치아픈 이야기들로 가득찬 몇 권의 책들을 사서 보기도 했었지만 많은 회의가 들었지요. 그 때 당시의 분위기는 논리속에서 모든 것을 풀어야만 새로운 미술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되는 것이었지만, 그럴수록 난 개념을 정립하는 일보다 나에게 절실하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려내야 할까 라는 생각에 더 충실했어요. 나의 내면세계와 역사, 이것이 결국 내가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감정, 혹은 감상의 배경일 테니까, 자연과 가족, 향수들... 그런 측면에서는 내 작업들이 일종의 과거에 대한 회상을 극화시켰다고 할 수 있겠지요. 모더니즘이나, 백색 모노크롬에 관한 얘기들이 한창이었지만 난 어린 시절 큰 충격을 받았던 길례라는 누나 생각을 더 많이 했었어요. 그 누나는 홍수를 제어하는 수문 조정탑 위에 고무신을 벗어놓고 자살을 했거든요. 온 동네에서 떠들었었지요. 나중에 커서 들었지만 동네 청년들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해요. 이우환씨의 만남의 현상학 서설 같은 글들도 읽었지만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고 난 계속 그 누나 생각에 빠져 주변의 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난 그렇게 개인적인 성향에 더 치우쳤찬 것이지요. 그리고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작품활동을 위해서 그룹활동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품 발표를 위한 기회를 만드려는 것 보다는 작업을 하면서 동지들이 필요했었으니까요.

오상길 그랬군요. 당시의 지적이고 논리적인 미술들은 소위 홍익대나 서울대 출신의 젊은 작가들에게 강한 압박감으로 작용하고 있었는데, 선생님 경우 학교가 달랐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영향을 덜 받고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김관수 그래요. 저는 어떤 면에서 제3자로써, 서울대나 홍대 친구들을 다 만날 수 있었으니까. 어느 쪽이라는 색깔이 있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친구들은 나하고 2차까지는 가지만... 3차는 대부분 자기들끼리 갔어요. 그래서 혼자 돌아오곤 하던 기억들도 있어요. 어쨌든 오히려 서울대나 홍대 출신들 보다 그런 문제들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점이 재미있지요.

오상길 당시 그룹을 창립하게된 배경과 그룹에 모인 맴버들의 성향이나 성격 등 그룹의 분위기는 어땠었습니까?

김관수 타라의 창립멤버는 오재원 이훈, 저 3인이었는데. 그 중 오재원은 고등학교 후배고, 이훈은 당시 김장섭 선생하고 같이 있었던 후배여서 나와도 친분이 있었죠. 김장섭이 나를 많이 격려하고 있을 때였어요. 김장섭은 같은 고등학교 동기라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는데, 그룹 활동을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나에게 제안 했었지요. 그때 인연이 닿아서 이훈, 오재원, 나 3인이 '타라'라는 그룹을 만들게 되었죠. 일단 성향은 딱 꼬집어서 말할 수 는 없었지만, 평면회화가 아닌 매체를 다루는 작가들이었다는 점이 신선했었어요. 또 기존의 의식이나 생각을 백지로 돌리자는 점에 뜻이 맞았어요. '따블로라싸'라는 것이 아무것도 써있지 않은 석판이라는 뜻이거든요. 그 앞의 머리 글자를 따서 타라라는 이름을 만들었는데, 말하자면 70년대나 80년대 난무했던 쟁점이나 문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지요. 미약하지만 우리가 새롭게 써 가려고 했던 것이 '타라'의 창립 동기입니다.

오상길 세분이 모여서 처음 그룹을 만들었을 때의 분위기는 특별한 이념이나 강령을 가지고 활동해 보자는 것 보다는, 당시 미술계의 쟁점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하는 각자의 개인적인 입장이나 감수성을 표현하고 활동하는 자유로운 것이었군요.

김관수 그랬습니다.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니까, 자연스럽게 생겨난 점도 있었어요. 사실 전 미술운동보다는 이효석이나 염상섭 소설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어요. 제 성향은 그분들의 자연 친화적인 서정성에 더 가까왔지요. 미술사적인 문제보다 내 개인적인 관심분야를 어떻게 표현할까에 대해 더 몰두했었기 때문에 당시의 미술풍토와 접근방법이 많이 다른 셈이었지요. 내 성향속에 있는 스산한 소외감을 더 의식하고 있었거든요. 타라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어요.

오상길 1회전에 3분이 전시를 하셨고, 2회전은 어땠습니까?

김관수 창립전 뒤에 의외로 여러군데 평이 나더군요. 솔직히 전시장 한번 얻을려면 돈도 많이 드니까 서로 각출해 가지고 발표한 셈이었는데 말이예요. '이런 작품들도 평론가들이 관심을 보이는구나' 하는 확인을 하게 된 셈이였지요. 그때 우린 돈이 없어서 포스터를 에니메이션하는 친구에게 부탁을 했더니 켄트지에 3장을 손으로 그려줬어요. 포스터 칼라로 말이예요. 하하...

오상길 하하...굉장하군요.

김관수 그 포스터를 십 수 년 간직하고 있었지요. 그 포스터가 전시 마지막 날 비가 와서 물감이 비에 녹아서 주르르 흘러 내렸거든요. 하하... 그 모습이 괴기스러웠는지 어떤 친구가 장난으로 K자를 붙여서, 'TARA'가 'TARAK타락'이 되었어요. 하하하... 그때만 해도 포스터조차도 흥미거리가 되었다는 게 재미있죠. 이렇게 타라라는 그룹이 걸음마를 시작했는데, 우리가 발표했던 것들이 다른 측면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었나 나중에 느꼈어요. 그 이후에 큰 전시장에서 전시를 하고 싶었고, 이 그룹을 지속하려면 보완이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작가를 인선하기도 하고 하면서 미술사적인 측면을 생각하게도 되고, 말하자면 주변에 눈을 돌리게 된 거죠.. 아마 그때부터 타락하게 된 걸 거예요. 하하하... 그때 몇몇 물망에 오른 작가들을 끌어 들였지요. 하도 많아서...2회에 누가 참여했는지 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들어 왔다 나갔어요. 최정화, 김장섭 등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이 들어 왔었어요. 재미있게 지냈어요.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전체적인 이슈 같은 것은 없었어요.

오상길 그렇군요. 미술운동이란 것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애초에 시작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이념적으로 꼭 일관된 목소리를 강령처럼 내세워 발언하지 않더라도 그 시대상황을 느끼는 작가들의 감성적인 측면들이 나타날 수 있을 겁니다. 그 시대 상황을 나름대로 읽고 거기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어떤 성향들이 작품에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자기 발언을 하는 것이 미술사가 될 수 있다는, 또 어떤 면에서는 그게 오히려 자연스럽고 타당해 보인다는 생각을 다시한번 하게 되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김관수 다양성이라는 말이 나왔지요. 무성격적인 다양성... 사실 어떤 이슈를 표방하려고 한 적도 한번 있었어요. 5회가 되면서부터 80년대초보다는 분위기가 상당히 무르익었던 것 같아요. 주변에 난지도, 메타복스, 서울80 등 강한 이슈를 제기하는 이런 그룹들이 생겨 나면서 우리도 한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한 공통분모를 끌어내 보려고 했지만, 결국 이념을 표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찾지를 못했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각 작가들이 개별성을 띠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간섭을 받지 않고 각 작가들이 나름대로 펼쳐갈 수 있었던 것이 장점이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오상길 그 당시 그룹 작가들 끼리만 활동했던 건 아니니까, 비슷한 연배의 작가분들이 서로 자주 만나고 친분도 나누면서 교류가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세대들이 가졌던 특별한 시대적인 상황에 대한 감각들이 있었을 것 같구요. 이런 것을 질문드리는 이유는 우리나라 70년대 미술이 하나의 거대한 집단적인 성향을 이루었고, 또 매우 교조적인 강령에 의해서 화단 전체를 지배한 흔적이 많았기 때문에 김관수 선생님 세대들은 그 70년대 주축을 이루는 작가들과 얼마간의 나이차이가 있었고, 또 바로 뒤에 등장하게 되는 메타복스, 난지도 세대의 작가들과도 연배차이가 있어서, 그 중간세대로서의 미묘한 위치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관수 저희가 작품활동을 시작하고 2회 정도 지나고는 1 년에 작품을 십 여 개 정도, 그러니까 한달에 1번씩 혹은 2회 정도의 발표를 하게 되는 일종의 전시포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여러군데서 전시에 참여하라고 요청이 왔었어요. 그때는 전람회를 선택하고 그런 건 생각할 수도 없었던 때였거든요. 무조건 초대해 주면 고마운 때였는데 말이예요. 그때 화단의 주류였던 홍익대 교수님들, 또 여타의 테마를 가지고 전시를 기획하는 평론가들이 만드는 전시도 있었습니다. 현대 미술관에서 작가를 뽑아서 했던 전시도 있었는데, 전 특히 외국 전시, 해외전을 갖는데 아주 매력을 느꼈어요. 그때 당시 해외를 나가는 데에는 여러가지 고충이 있었기 때문에. 해외전이라는 메리트 때문에 초창기에는 여러군데서 부르면 해외전에 참가했었어요. 80년대초부터는 많이는 아니라도 1년에 한 번씩은 해외전을 하면서 폭을 좀 넓힐 수 있었지요. 그때 당시는 기존의 70년대 화단의 영향과 80년대의 새로운 성향이 공존하고 있었던 시대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는 손쉽게 그 쪽으로 진입을 할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70년대 기성작가들과 같이 어울리면서 80년대 초반까지 같이 활동을 하다가 84년도에 기성 그룹에서 빠져 나오게 되었어요. 그 동기랄까.... 이 문제가 사실은 어떤 전환기라고 할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 당시 몇몇의 의식있는 작가들이 70년대 미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좌표를 세우기 위해 노력을 했었어요. 그 작가들이 가지는 정신, 그 문제에 동감을 했고, 그들과 같이 그런 문제들을 공유했거든요. 그건 말하자면 말은 하지 않아도 노선에서는 뭔가가 달라야 겠다는 의식속에서 움직였던 그런 면이 있었던 만큼 우리 자신을 뭔가 차별화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갖는 몇 몇의 작가들이 함께 움직이다 보니까 비슷한 부류들 간에 그런 이야기가 된 거지요. 그런 문제들이 각자의 성향은 달랐어도 결속력을 더 갖도록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것들이 이 작가들의 문화를 형성하지 않았을까 생각되구요. 이들이 어느 시점에 동시에 소위 제도권에서 이탈해 나왔지요. 그때 우리에게는 2가지의 화두가 있었어요. 70년대 미술의 범주속에서 이탈하려고 하는 일과 80년대 초에 등장한 민중미술이라는 것 속에서 양면을 보면서 스스로의 문제를 더 심도깊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오상길 당시 작가분들은 서로 다른 작품성향들을 보였는데, 그런 면에서 서로 작업에 대한 이해나 함께 활동할 수 있는 근거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었나요?

김관수 그렇죠. 그런 것이 없었다면 지속되지 못했겠죠.. 아무튼 그때 저를 포함해서 같이 활동했던 작가들은 과거의 미술들과 약간씩 달랐던 것 같아요. 표방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참신했다고 할까. 서로가 새로운 작품경향이 나올때 마다 서로 그것을 흥미롭게 봐주었어요. 참 재미있는 것은 작가와 작가들끼리 작품에 대해 서로 평을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일종의 불문율이었던 것 같아요. 오늘이 달라지고 내일이 달라지고, 그래서 새로운 작가군이 생기고, 그래서 다양한 요소의 작품의 성향이 등장하고 사그라지고 그럴 때였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그들이 갖는 새로운 모럴이라고 할까, 스스로 만드는 진취적 성향이 있었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과거의 문제와 단절하고자 하는 생각을 누구나 가지고 있었고, 이런 점들이 후배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하는 문제를 심도있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집단 인선도 했었지요. 저와 같이 활동했던 작가들은 홍대, 서울대, 경희대 출신들이 다 같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공정하게 인선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대구지역의 작가들도 같이 인선을 했죠. 그때 결국 또하나의 집단을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것을 우려하는 우리가 또 하나의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말까지 나왔었죠.

오상길 주로 타라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셨을텐데 그 활동이 10년정도 지속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활동하는 동안 펼쳤던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을텐데 그런 것들에 대한 어떤 성과랄까요.. 물론 성과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으로 진행되어야 하고 이 전시가 그런 성과를 객관적으로 검증해 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런 활동을 주도하셨던 입장에서 당시의 우리 미술계라는 환경이나 상황과 비추어서 어떤 성과를 가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김관수 성과..성과라...

오상길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겠지만요.

김관수 네... 타라를 꼭 꼬집어서 말하기 보다는 그룹과 그룹간의 연계 속에서 대체로 이합집산하는 속도가 좀 빨랐다고 할까요... 그러면서도 작업량이나 전시량이 많았었어요. 그런 영향이 후배 작가들에게 외형상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겠지요. 다른 한편 한국현대미술속에서는 한국현대미술이 외국에 소개될 때 가지는 획일주의 상황에서 우리도 이제 다양성을 갖추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되는 동기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오상길 그때 당시 연계를 자주 가졌던 그룹이나 작가들은 어떤 분들이었죠?

김관수 주로 김용익 선생,문범. 김장섭... 이런 친구들이었지요.

오상길 소위 4인방...

김관수 하하...

오상길 저희 세대가 종종 그렇게 불렀어요... 4인방이라고.

김관수 4인방이라고 하지만 저는 뛰어난 분들에게 동조를 하는 식이었고, 모교의 후배나 친구들을 어떻게 하면 무대에 등장시켜 같이 활동을 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어요.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말이죠. 그래서 그때 경희대 출신들로 이루어진 '아소'라는 그룹을 또 만들어서 활동하기도 했지요. 역시 타라라는 그룹은 후반이 넘어가면 타성이 붙은 그룹으로 전락하거든요. 당연히 요때쯤 모여서 연례행사처럼 전시하고 하는 식이 되었죠. 그룹이 가지는 생명력이랄까 그런 것이 없어졌어요. 그룹이란 것이 한 5년이 넘으면 갈래가 생겨 분파되고... 저는 중앙대등 서울대, 홍대가 아닌 대학출신들을 많이 의식하면서 활동 했었어요. 그분들과 같이 만든 서울의 3월전이라든가 뚜렷이 기억나지 않는데, 몇 몇이 주도하는 그룹전에도 참여했고. 화랑이나 평론가들이 만든 테마전에도 참여했었죠. 그런정도 였어요....

오상길 타라 중심으로 하셨던 활동에 대한 국내에서의 비평적인 시각은 어땠었나요?

김관수 타라는 어떤 이념을 표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평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어떤 면에서는 메타복스나 난지도같은 신진그룹들이 가지는 강한 이슈에 비해 타라는 무성격에 가까웠지요. 그룹의 작가들끼리 개별성을 가지고 서로 펼쳐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서로 보완해주는 식이었지요. 타라는 활동하던 당시에는 강하게 어필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오상길 80년대 들어 유난히 소그룹들이 많이 등장했었는데, 그 소그룹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세요. 좀 포괄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김관수 네.. 제 자신이 같은 흐름 속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어떤 연대감같은 것을 느꼈었어요. 그때가 어떤 면에서는 그룹들이 이합집산하던 일종의 춘추전국시대가 아닐까 생각돼요. 70년대가 가졌던 획일화된 성격에 대한 반발로 봇물 터지듯이 확산된 결과였던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그러한 소그룹들의 활동들이 당연한 결과들이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시대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가듯이, 80년 대에는 어떤 코드가 그것을 요구했다고 봐요. 각 그룹들이 가지는 특징은 차치하고라도, 그 운동성이 미술사에 끼친 영향들은 상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에 평론가들이 그때 당시의 소그룹 운동을 모아서 평론을 하기도 했지요. 그 그룹들의 활동 후로부터 유사한 그룹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 그룹들은 우리 세대 식의 '안으로의 지향' 보다는 다양한 '밖을 향한' 얘기를 많이 할 수 있게 했다는 한 점에서도 역할이 컸다고 봐요.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전 지금도 다시 한번 그런 그룹의 일원으로 활발하게 활동해 보고 싶기도 하니까요. 그러다가 80년대 말에 와서는 그룹의 무용론이 대두되면서 작가들이 각개약진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8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의 그룹들의 성향들은 꼭 있어야 할 것들이었고, 필요에 따르는 과정속에서 또 소멸해 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오상길 우리나라에는 해방이후 유난스럽게 많은 미술단체나 그룹들이 이합집산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80년대 소그룹운동을 재조명하려는 의도는 80년대 이전의 현대미술이 주로 그 당시 최신의 서구미술사조의 이데올로기나 형식들을 수용하고 소개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 왔고, 특히 70년대에 거대 집단화되어 서구미술사조 수용의 한 극점을 이루며 권력화되었기 때문에, 80년대의 소그룹들의 운동 성격이 바로 이 제도권에 대한 다양한 반발이자 대응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80년대 초 중반의 한국현대미술 지형은 70년대의 교조적인 모노크롬과 민중미술이라는 아주 거센 정치적인 도전에 의해 뚜렷이 양분화된 양상을 띠고 있었고, 이러한 우리 미술계의 환경이 젊은 작가들에게는 '너는 어느 쪽이냐'는 식의 흑백논리식 위압적인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던 때 였습니다. 이런 상황논리 속에서 80년대 소그룹 운동을 펼쳤던 소장작가들의 입장은 그 양분화된 대립 구도의 어느 한 쪽에 편승하기 보다는 이를 각각 극복하기 위한 제3의 대안을 모색하고 제시하려 했던, 한국현대미술 맥락안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자발적 운동성을 가진 매우 건강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아직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겠습니다만 향후 우리의 현대미술사가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비판될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시점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그룹 운동들은 소위 제3세계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과 맞물린 전형적인 문화예술 운동의 한 모델이며, 어떤 점에서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한국현대미술의 아방가르드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80년대보다 표면적으로 훨씬 풍성하고 화려해진 지금이지만 외형적으로 비대해 진, 그러나 그 전문성이 극히 의심스러운 제도의 운영에 의해 거꾸로 이러한 현장의 미술이 완전히 소멸함으로써 그 역동성을 잃고, 또 다시 외국의 유행에 편승해 가는 역사적 퇴행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80년대 소그룹 운동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대한 평가는 이들의 작품이 좋고 좋지 않고, 혹은 훌륭하고 그렇지 않고를 가늠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소위 현대미술 맥락의 문화종속에 관한 대응논리들과 제1세계들을 중심으로 구축되고 있었던 현대미술 맥락에 문화적 다원주의의 한 축을 마련할 수 있는 대안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시기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8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의 그룹들이 꼭 있어야 할 것들이었고, 적절한 시점에서 소멸했다고 말씀하셨지만 이러한 미술운동의 의미는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비평적으로 다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현대미술의 중심이 작가들로부터 미술제도들로 대체되어, 미술계의 외형적 양상은 문화선진국들의 그것과 유사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대미술의 쟁점과 이슈, 그리고 담론을 이끌만한 전문적 역량이 부재한 제도가 이벤트 행사 중심의 기획을 통해 오히려 그 중심을 흐트리고 있다고 생각되는 점입니다. 미술제도가 보완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비전문적인 인력에 의해 비대해 진 힘이 역기능을 하게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기 때문이며, 이 제도를 운영하는 비전문인들에 의해 작가와 비평가들은 선택받아야 하는 존재로 전락해 감으로써 한국현대미술의 중심에 커다란 공백상태가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인식이 80년대 소그룹운동을 재조명함으로써 우리가 다루어야 할 한국현대미술의 쟁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비평적인 담론을 만들어 보자는 기획의 취지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선생님께서 바라보시는 80년대와 관련된 지금의 미술계 상황에 관한 입장을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그룹활동을 펼치시던 80년대와 지금의 미술계를 상대적 관점에서 남다른 시각을 가지고 말씀하실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김관수 제 생각으로는 80년대가 70년대에 대한 반응으로 나왔다면, 90년대는 다양한 매체를 수용했고, 제도나 여러가지 측면에서의 폭은 넓어졌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중심이 되어야 할 작가들의 위상과 의식은 오히려 약화되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두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80년대 초반 당시의 저는 논리적인 측면 보다 개별성, 개별의 문제의 성향으로 구태여 객관적으로 검증받을 필요가 없는 나의 문제를 얘기했었고, 그렇기 때문에 미술 근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의 미술은 여러가지 외부적인 영향, 이를테면 테크놀로지나 새로운 정보들이 너무 많이 전해지다 보니까, 작업들이 지나치게 패션화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나마 그것을 주도하는 중심세력들은 역시 80년대부터 활동했던 작가들이 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문에 대학을 갓 졸업한 세대들의 그것도 그런 흐름으로 휩쓸려가고 있는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또 하나 경제적으로 여건이 좀 나아진 상황에서 벌어지는 문제겠지만, 작품들의 규모는 외형적으로 상당히 다양화되고 커졌지만, 내용면에서는 우리가 가졌던 절실함은 오히려 줄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상길 선생님께서는 국내에서의 평론이나 비평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미술제도 속에서 미술현장과 비평, 또 미술사는 어쩔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가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80년대 소그룹운동에 관한 국내비평에 대해 선생님의 견해를 밝혀 주시겠습니까?

김관수 제가 80년대 소그룹운동을 하면서 사실 비평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은 건 아닙니다. 우리가 전시가 끝나면 보도자료 같은 것들을 관심있게 보기도 했지요. 그때의 비평은 주로 그룹의 활동에 대한 이론적인 배경을 만들어 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룹에 힘을 실어 주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좀 흐른 뒤의 일이지만 8-90년 대의 미술이 어떤 흐름을 갖는지를 다루는 비평을 본 적이 있어요. 그 글에는 몇가지 틀로 작가들을 분류하고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아... 내가 이런 범주에 속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씁쓸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건 그 평론가들이 가진 생각이겠었고, 저는 그런 어떤 범주에 속하든 안하든 관계 없었습니다. 아무튼 비평은 필요하겠죠. 시대를 조망하기 위해서도... 하지만 그 이후 비평에 대해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해외 비평가들의 글을 빌려 국내 비평의 부족함을 보상받으려는 작가들을 보면서 또 한번 씁쓸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오상길 선생님께서 활동하시면서 관심있게 지켜보셨던 주변의 작가나 혹은 다른 그룹이나 비평이나 저널리즘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김관수 오랜시간이 지나 잘 생각나지 않는데. 작가들은 작가 자신의 성향과 유사한 작품을 한다는 느낌이 드는 작가로 조덕현씨를 들고 싶고, 옛날 사진들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점에 관심이 갑니다. 또 한사람은 타라에서 같아 활동했던 육근병이라는 작가입니다. 저는 그가 가지는 에너지와 국내외에서의 매니지먼트를 잘 해낸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90년대를 살아남는 작가들이 가지는 미술외적인 문제를 사회가 다 해주지 못하니까, 그런 역량들을 가진 작가들이 앞으로 자생력을 갖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 두 작가에게 관심이 갑니다.

오상길 마지막으로 언제쯤 다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시겠습니까?

김관수 저는 작업을 그만두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는 것도 작업이니까. 제가 어느 정도 생활 문제를 건사할 수 있게 되면, 언제라도 작품활동을 다시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상길 그 시기가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시간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관수 네네.....

Vol.20001007a | 현장의 미술, 열정의 작가들展 ①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