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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0_1004_수요일_05:00pm
서남미술전시관 포토스페이스(폐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동양증권빌딩 1층 Tel. 02_3770_2672
흔적 속에 포괄되는 다양한 시·공간의 의식들 ● 신대섭의 회화작품들은 시간·공간·역사·장소 사이의 관계 문제를 순환,단계의 융합, 불연속적인 기표, 경계의 붕괴, 침식 등의 방식을 통해 보여 주면서, 우리에게 서로 다른 시·공간 척도 위에 살아가는 다양한 우리들 집단을 만날 수 있도록 해준다. 작품에는 지속적이고 영원한 개념적 시간 속에서 사는 인물들, 사회적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 보편적이고 추상화된 공간 속의 사람들과 구체적인 장소를 가지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계적 시간의 도식 위에서 과거에 대한 회상과 미래에 대한 예언을 대칭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은, 동일한 평면 위에 이질적 장소들을 끼워 맞춤으로써 공간적 여정과 공간적 이야기들의 풍부한 다양성을 등질화시키면서 연속적인 공간으로 바꾸어버린다. 그리하여 화면에는 다양성을 실천했던 모든 흔적들이 말끔히 지워지고, 객관적인 공간과 시간을 고정된 도식으로 탈바꿈시켜 버린다. 반면 신대섭은 분절화와 불확실성의 다양한 조건들을 설정하고, 기호와 의미, 메시지가 복잡하고 비일관적이며 미로의 혼돈을 담고 있는 화면을 보여줌으로써 총체화의 체계가 간과했던 부분적이거나 분리된 실제 시간들을 포괄한다. 작가가 실제 시간을 포괄하는 수단은 흔적이다. 흔적은 현실적 지각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지지만 여전히 잠재적인 형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고정된 시·공간적 좌표에 따라 정의되거나, 안정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틀이 작동하는 것을 방해한다. 흔적은 현재와 과거, 현실과 잠재, 지각과 기억이 혼재하며 공존하는 장소이다. 직접적 관련성은 희박하지만 모든 것은 모든 것에 걸쳐있어 단지 어느 한 곳에, 어느 한 때에 집중하여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이다. ●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원칙적으로 예술작품은 항상 복제 가능'했지만 기계적 복제는 '새로운 어떤 것을 표현한다'고 하였다. 전자복제시대의 요즈음에는 시·공간상의 실제 맥락에서 뽑아낸 이미지들을 저장하였다가 대량으로 사용하고 재생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벤야민의 지적은 더욱 중요해졌다. 고유성과 영원성 대신 추구되는 일시성과 복제가능성은 고유한 인격, 독특한 자아, 사적 정체성 등의 개념을 낯설게 만들었다. 신대섭의 복제는 포장과 변형의 작가적 표현수단이라기 보다는, 자기 정체성의 표식들이 지니는 갖가지 가상적 측면에 대한 공략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작가의 미적 감수성이 자기반영적이기는 하지만, 복잡한 의미들을 포착하기 위해 천박한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협소하지도, 파벌적이지도 않다. 그의 복제는 분열 흐름을 조장하지만, 욕망의 유동(이미지의 조작과 전개)에 내맡기지는 않는 접점에 위치한다. 그리하여 복사기로 전사된 이미지들-신 윤복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조선시대 여인과 물놀이터의 사람들, 무속화의 도당천신, 개화기의 여러 기록사진들, 민화의 꽃그림 등-은 역사적인 소재이지만 어느 특정 시대에 속하지 않은 듯 단지 막연한 과거의 혼합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이미지 때문에 관람자들은 기술의 현재성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가 왜 이 소재를 필요로 했는지를 의아해한다. 현재적 시간과 연관시킬 수 있는 물질성은 배제되고 과거의 시간은 의미 코드를 벗어나 있어 내적 관계의 행렬은 집중과 분산, 권위와 해체, 위계와 무질서 사이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다. ● 꼴라쥬는 모더니스트들이 개척한 것이지만, 작가 신대섭에게는 여러모로 자신의 것으로 자리잡은 기법이다. 다양하고 조리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요소들을 병치시키는 것은 재미있고 혹은 교훈적일 수도 있다. 세련된 기교(작가 자신은 부단히 감추려하지만 숙련과 능숙은 분명히 그의 자산이다)속에 감추어져 있는 문화적 약호와 기호학적 약호는 관람자에게 정교한 풀이를 요구한다. 이러한 생각에서 작가는 상대적인 고정성과 유연성의 이항구분들을 인과적(또는 필연적)이지 않으면서, 종합적이지 않게, 그리하여 명료하지 않게 꼴라쥬 기법으로 뒤섞어 두었다. 색이나 형태도 순수 시각적인 이미지를 산출하는데 사용될 뿐이어서 고정적인 내러티브나 일화와 결부되지 않는다. 아쉬운 것은 작가의 뛰어난 색채 사용이 관람자로 하여금 비재현적 색채 자체의 표현을 통해서 대상과 이미지가 출현하는 경험을 기대하게 하지만, 작가는 지각 가능한 대상과 시각적 대상을 구별하지 않는 듯 하다. ■ 임정희
Vol.20001004a | 신대섭展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