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 파라다이스

고명근展 / KOHMYUNGKEUN / 高明根 / photography   2000_1004 ▶ 2000_1014

고명근_슬레이트 지붕복제-3_컬러인화_180×248cm_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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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0_1004_수요일_05:30pm

SK포토갤러리(폐관) Tel. 02_758_2572

복제 : 기억의 퇴적물 혹은 갱생의 즐거운 약속 ● 인간의 환상 속에서 복제는 꼭 재앙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서유기』에서 손오공은 자신의 머리터럭을 뽑아 자신과 똑 같은 수많은 손오공을 복제하여 악마적 괴력을 지닌 적을 물리친다. 명대의 오승은(吳承恩)이란 사람이 당(唐)의 구법승 현장(玄奬)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천축에 가서 불경을 얻어왔다는 내용을 취재하여 장편소설로 집필한 이 기서(奇書)는 물론 전설과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이미 이 당시에 복제가 가져올 환상적이면서 전율을 일으키는 위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당시에 유전자 복제란 것이 있었을 리 만무할지라도 낯선 세계로의 모험에 동참한 반인반수(伴人半獸) 손오공의 활약은 과학이 도달할 수 없는 상상의 세계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인형 피노키오든, 괴물 프랑켄시타인이든 다같이 이미 죽어버린 대상이 생명체로 육화된 것인 반면 손오공의 머리털은 손오공의 몸으로부터 빠져 나와 또 다른 손오공이 된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있다. 즉 복제된 손오공은 실재하는 손오공의 유전자로부터 자기증식된 존재이며 따라서 자아와 또 다른 자아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필요가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 복제된 손오공은 늘 실재 손오공으로부터 명령을 받아 그것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고분고분한 졸개로만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생명연장 등의 명목으로 복제기술이 지향하는 바와 닮은 구석이 있다. 즉, 서유기의 작가는 비록 복제된 것이라 하더라도 실재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으므로 서유기가 지향하는 권선징악의 주제에 하등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과학기술의 결과로 나타날 복제인간과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복제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간극을 발견할 수 있다. 복제된 손오공은 자기에게로 귀속하지만 복제인간은 또 하나의 생명체로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에서 복제인간은 우리의 삶을 어지럽히고 위협하는 불길한 존재인 괴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세포분열을 닮은 복제 손오공과 이식과 배양을 거친 복제인간 사이에 가로놓은 장벽은 과연 극복되지 않는 장애물일까? ● 고명근의 작품은 이런 질문에 대해 낙관적이다. 그의 복제 시리즈는 무한히 자기증식하는 것이라기보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거울 속에 비친 대상은 평면에 불과하며 또 이 대치국면 사이에 물리적 공간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고명근의 데칼코마니된 복제와 거울보기에는 차이가 있다. 즉, 거울에 반영된 형상은 실재의 영상에 불과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주종의 관계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런 점에서 그의 복제는 실재의 반영이 아니라 동성분열된 세포의 병렬합성에 가깝다. 바람에 휘날리고 먼지를 뒤집어 쓴 비닐하우스나 슬레이트 지붕을 얼기설기 엮어놓은 옹색하고 누추한 폐광촌의 가옥들을 합성한 그의 작품을 보면 원형을 지각하기 이전에는 재현된 대상을 파악하기 힘들며 오히려 전혀 낯선 사물로 비쳐진다. 예컨대, 슬레이트 지붕들을 서로 맞댄 작품은 공상과학영화에서 보았음직한 우주선 속의 기계실이나 우주기지를 연상하게 만들며, 폐기된 채 녹슬고 낡은 철제 셔터 사이로 비집고 나온 식물을 합성해 놓은 작품은 아라베스크 문양보다 우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찢어진 비닐 위를 덮고 있는 청색 포장조차 색면구성의 한 부분으로서 제 역할을 훌륭하게 담당하고 있어서 그의 작품은 복제가 가져올 가공할 공포를 예측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즐거움을 누리게 한다. ● 사진매체를 활용한 병치와 합성은 사진의 기록성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인 기대를 전복시킨다. 즉, 마땅히 있어야 할 실재 대신 실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미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재현이 실재를 대신하는 전통적인 믿음을 소거시키는 한편 실재와 환영 사이의 위계도 해체한다. 즉 그의 작품은 실재로부터 빌어왔지만 실재와는 상관없는 새로운 종(種)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 복제가 야기할 디스토피아에 대한 불안을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어떤 메시지도 제거한 순수한 시각적 볼거리를 추구한 것은 아니다. 그가 유학시절에 이미 제작한 바 있는 브룩클린의 풍경을 복원해 놓은 「브룩클린의 콜로세움1-복제」를 보면 인간의 흔적이 사라진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도시의 한 단면을 기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설무대와도 같은 이 원형건축물은 물론 브룩클린의 현실을 재현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작가에 의해 선택되고 가공된 특정공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창백하고 불길한 문명의 황혼을 추억하게 만든다. 일상의 한 언저리를 분리하여 증식시키고 켜켜이 쌓아올린 이 건축물은 관광객의 눈요기로 전락한 유적처럼 일상 속에 놓여 있으면서 일상으로부터 분리된 기념물의 왜소함에 대해 발언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가 선택한 대상만 다를 뿐 문명의 기념비로서 콜로세움과 비닐하우스는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그의 시선은 늘 날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낡고 퇴락한 곳으로, 주변부로, 소외된 곳으로 향하고 있다. 그것은 고궁을 재현한 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의 중심에 있어야 할 궁전은 역사로부터 밀려나 있고 무대처럼 연출된 채 전시장에 놓여짐으로써 존재의 맥락으로부터 이탈해 있다. 여기에서 그는 사진의 기록성이 실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부재를 알리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진은 시간의 부재를 추억하게 만들고 그의 연출된 작품은 실재의 부재를 기념한다. 그러나 그 실재가 느닷없이 종적을 감춘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의 표면에 상처딱지처럼 달라붙어 우리의 뇌리를 엄습한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 복제된 대상을 플라스틱으로 고착시키고 가둔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채집상자 또는 박물지(博物誌)와 같은 맥락에 있다. 그것은 더 이상의 복제와 증식이 운명적으로 거세당한 표본에 불과하며 플라스틱 보호장치는 포름알데히드보다 더욱 완고하게 그 주검을 영속화시킨다. 방부처리된, 소진된 생명을 기념하는 그의 작품은 21세기 일상의 한 증거물이자 타임캡슐 속에 안장된 유적이다. 개발에 의해 사라져버릴 그 궁벽한 삶의 터전은 이제 지독한 가난에 대한 증거물로서가 아니라 정지된 시간의 증거물로 보존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작품이 지닌 탈감성적인 냉정함이다.

고명근_복제 파라다이스 #3._플라스틱에 채색_40×25×19cm_2000

● 손오공은 현장에 의해 순화되고 교화되었기 때문에 위험한 모험에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중심적이고 교만한 원숭이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징벌로 바위산에 억류당해 있어야만 했다. 비록 현장이 그 감금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으나 손오공은 머리 위에 족쇄와도 같은 고문기구를 뒤집어 쓴 채 현장을 수행해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통한 도술은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라기보다 억압을 연장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수많은 동종의 손오공으로 복제된 터럭들도 억압의 연장선 위에 놓여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복제의 운명이다. 질병의 치유와 생명연장을 위해 지놈의 비밀을 파헤치고 유전자복제를 서슴지 않는 인간들도 동일한 운명 앞에 놓여있다. 현재 제3세계에서 에이즈 환자나 보균자의 수가 확산되고 있는데 '부적절한 관계'에서 발병한 비율과 비교할 때 부모로부터 천형(天刑)처럼 물려받거나 수혈과정에서 감염되는 비율도 무시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한다. 복제기술이 이런 질병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줄 수 있는 복음이 될지는 모르지만 인간을 또 다른 파멸의, 극단적으로는 멸종의 위기로 내몰 수도 있을 것이다. 복제기술의 발달이 가져올 파멸이 과장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배제'와 '차별'을 심화시킬 위험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때 문명의 우월함을 내세웠던 소수의 인간들이 열등하다고 생각한 다른 부류의 인간이나 종족들을 단종(斷種)시킨 적 있다. 문명의 이름 아래 자행된 범죄행위는 인간복제술에도 적용될 것이다. 인간을 위험에 빠뜨릴 혐의가 있거나 별로 유익하지 않은 열등한 인간들이 생명연장의 축복으로부터 소외될 것은 뻔한 이치이다. 더불어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로 가난한 사람 또한 배제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성인자만 모아 안전하게 배양된 세포는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위해 공급될 것이고 가난이 대물림되듯 인위적인 수명연장의 특혜도 되물림될 것이다. 기술이 계급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현대의 복제기술도 또 다른 억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위험 앞에 노출된 인간을 향해 고명근이 던지는 '유쾌한 도발' 혹은 '상상력에 의지한 구원에의 가능성'은 성인을 복제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발상이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마 타종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것도 종족우월주의와 같은 맥락으로 비쳐질 수 있을 것이지만 예수나 석가모니는 성인의 상징일 뿐 마호메트가 되든 공자가 되든 상관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거룩한 존재로 이 두 교주를 내세운 듯하다. 두 성인 사이에 동일한 키로 작가 자신을 배치함으로써 그는 인류구원이란 심각한 주제를 유머로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는 분명 허황된 것이며 설득력을 상실한 동화임에 분명하지만 복제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작가의 기대가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즉, 컵에 있는 물을 보고 아직 반이나 남았군 하고 반응하는 사람과 벌써 반이나 마셔버렸어 라고 반응하는 사람 사이의 차이를 읽을 수 있다. 고명근의 경우 아마 후자에 가까운 성격의 소유자인 것 같은데 그것이 그의 작품을 흥분으로 내몰지 않는 요인일 것이다. '그래도 내일이 오늘보다는 좋을 거야'라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여유가 그의 작업을 동기화시키는 힘이라면 그에게서 오늘보다 나은 작품을 기대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리라. ■ 최태만

Vol.20001001a | 고명근展 / KOHMYUNGKEUN / 高明根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