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기획 / 김승현
서남미술전시관(폐관) 서울 영등포구 영의도동 동양증권빌딩 1층 Tel. 02_3770_3870
사진의 거짓 혹은 참 1. '지록위마'(指鹿爲馬)는 『사기』(史記)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서 비롯한 고사성어다. 이 말은 진시황의 사후에 황제의 자리를 탐하던 승상 조고가 허수아비 황제인 어린 호해에게 사슴 한 마리를 헌납하면서 말(馬)이라 우기고는, 당시 현장에서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슴이라 직언한 신하들을 후에 누명 씌워 죽여버리고 정권을 장악한 데서 연유했다. 이후로 '지록위마'는 조고의 음모와 같은 간사하고 억지스러운 상황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하지만 이 전시의 제목은 일종의 풍자다. 왜냐하면 이들의 사진이 비록 '사슴을 가리키며 말(馬)을 논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기만이라기보다 직언이기 때문이다. ● 2. 사진이 대상의 존재증명으로서 유효하다는 점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사진에겐 없는 것을 있다고 할 재간이 없으니 말하자면 모든 사진이 증명사진인 셈이다. 이론의 여지가 있다면 과연 그러한 존재증명이 무엇에 봉사하느냐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존재증명과 객관성의 신화 간에 불화가 생기는 것도, 사진에 권력의 문제가 얽히기 시작하는 것도 그 지점일텐데 이른바 분류와 감시를 위한 사진의 정치적 쓰임새는 그 비근한 예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것은 노골적인 사진의 도구적 기능일 뿐이며 그보다 은밀하고 제어되지 않는 면모는 사진의 존재 자체에 배어 있다. '미디어가 메시지'라 하지 않았던가. 이 짧은 말은 매체가 세상을 열어보이는 하나의 형식으로서 일종의 권력임을 시사한다. 요컨대 사진의 여러 가지 생득적인 특성들은 사람들의 보는 방법과 사고체계를 지배한다. 시선(視線)에 의해 생산된 사진은 또 다른 시선을 생산하고 그 시선은 다시 사진을 생산한다. 사진은 일상 속에서 이러한 순환을 거듭하면서 우리들의 사고와 태도를 각색한다. ● 3. 사진이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열어보이는 순진무구한 장치가 아니라 보는 방법을 지배하는 일종의 권력이라는 사실은 전혀 객관적이지 못한 사진의 재현체계를 살펴보면 다 밝혀진다. 예컨대 사진은 삼차원의 공간을 이차원의 평면으로 치환해내는 제한적인 눈속임의 재현체계 속에 머물면서 상하좌우가 잘려나간 사각의 프레임으로 부유할 수 밖에 없는 고립성을 지니고, 렌즈마다 다르고 인간의 눈과도 같지 않은 시야와 원근감, 심도와 촛점을 갖는다. 더구나 컬러사진의 경우라면 재현대상의 색이 지닌 정보를 사실과 다르게 왜곡시킬 가능성이 매우 클 뿐만 아니라 그 왜곡은 그리 쉽게 지각되지도 않는다. (동일한 카메라로 촬영하고 각자 생중계하는 방송3사의 국경일 기념방송 따위를 이리저리 오가면서 보노라면 방송국마다 다른 주조색과 선예도에 따라 행사장의 분위기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은 집집마다, 제조사마다 같지 않을 화면의 조정상태에 의해 차이를 더하지 않겠는가. 사진도 마찬가지다.) 그에 비한다면 모든 광선의 파장을 우리의 색채지각과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는 무채색의 톤으로 변환시키는 흑백사진의 경우는 소박한 축에 속한다. 사진의 재현방식이 지닌 이러한 작위성에 아울러 전시, 출판, 광고 등을 위해 행해지는 발췌, 편집, 검열의 과정, 그리고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발생하는 장소성에 따라 사진은 그 의미를 달리하면서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듯이 우리가 지각하는 실재와 사진은 어지간히 닮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사정들에 의해 죽도록 평행선을 그리며 달릴 뿐 영원히 가까와질 수 없는 관계다. 이른바 재현(再現)이란 그 평행선의 긴장관계를 사진 스스로 일컫는 말이다. ● 4. 비록 오늘날 사진의 인식론적 딜레마가 공공연히 언급된다고는 하지만 일찍이 사진에게 투명성과 객관성의 권좌를 부여한 세간의 암묵적인 협약은 아직 폐기되지 않고 있다. 차가운 이성이 사진의 딜레마를 고민하고 있을 때조차 몸은 이미 객관성이라는 달콤한 신화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시에 출품한 다섯 사람, 권오상, 김민혁, 김영길, 한수정, 황규태의 사진들은 사진이 중립적 진리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는데 상당히 전략적인 냄새를 풍긴다. 이들의 작업은 전통적 재현방식에 순종하지만 한편으로는 심기를 건드린다. 사람들이 구가해마지않던 재현의 덕목들이 지닌 결함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과장하면서 사진의 영토를 관장하던 객관성의 이데올로기를 자기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의 인식론적 딜레마를 표현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셈이다.
5. 김영길의 사진들은 강가의 고만고만한 모래더미를 찍은 것인데 흡사 거대한 산처럼 보인다. 풍경사진의 전통적 규범에 기대어 제작한 일련의 고의적인 가짜 풍경사진인 것이다. 위압적인 대륙의 풍경을 선사했던 앤셀 애덤스의 사진 같아 뵈는 그 사진들은 말하자면 모래더미의 정교한 환영이자 산의 신기루이기도 한 셈인데, 그렇다면 전자는 진짜고 후자는 가짜인가. 또 우리는 그 둘 중 어느 것을 보아야 옳은가. 일단 그의 사진이 가짜임을 알고 나면 우리는 자신의 눈이 매체의 관행적인 재현방식에 얼마나 훈련되어 있는지를 깨닫는다. 예를 들어 멍청한 초점으로 흔들거리는 방송의 한 장면이 드라마나 쇼가 아님을 대번에 아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코드를 잠입 인터뷰나 현장감에 찬 보도물로 인지하게끔 학습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영길의 사진은 산 사진의 코드로 포장되어 있다. 그가 찾아낸 산 닮은 모래더미야 위조의 원료니까 빼더라도 렌즈가 만들어내는 아득함, 경외감에 차 올려다보는 카메라의 시점(視點) 등이 코드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풍경이 아니라 풍경사진의 코드에 '멋지군!'을 연발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진의 특성들마저도 그의 사진이 산 사진의 전범을 닮도록 자발적으로 돕는다. 즉 프레임은 주변의 잡다한 풍경들을 밖으로 배제해서 관람자의 비례감을 잃게 하며, 흑백의 모노톤은 황색 모래더미를 눈 덮인 봉우리로 만들어준다. 그 덕에 우리는 사진한테 속아넘어간다.
6. 한수정도 일종의 이미지 게임을 한다. 김영길의 게임이 주로 시선에 관한 것이었다면 한수정은 사진의 기계적 재현과정에 감추어진 거짓을 상대로 게임을 벌인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그러한 흑백사진의 허위성을 가중시키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무질서해보이는 색면들 속에 일찌감치 숨겨놓았던 이미지를 흑백필름의 색반응에 의탁해 발견하는 척 하는 식이다. 그의 관심은 흑백사진이라는 매체의 맹점을 추출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이차원 평면의 캔버스로 대상을 한정하고 그것을 촬영한 동일한 크기의 흑백사진을 옆에 나란히 제시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사진의 크기, 원근감 따위는 더 이상 혐의의 대상이 아니다. 게임에 동참한 우리는 그가 손수 그렸을 캔버스의 그림에서 허탕을 친 후 단지 그것을 찍었다는 인화지 위에서 오로지 필름의 감광성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허상(虛像)을 보게 된다. 그 이미지는 명도, 채도와 같은 시지각의 영역과 무관하게 순전히 사진기가 바라본 세계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흑백사진의 프로세스를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그 일련의 과정은 마치 엎지른 물과 같이 일단 모노톤으로 전환이 되고 나면 원래의 색으로 돌이킬 도리가 없다는 점에서 일종의 손실공정인 셈이다. 그처럼 흑백사진이 찬란한 현실의 광선을 무참히 거세한다는 사실은 흑백사진의 비사실성과 비객관성을 예고하는 것으로서 결국 그의 작업은 그러한 매체의 허위성에 대한 언급이다. 말하자면 한수정은 흑백사진이라는 색맹의 도구로써 자신의 그림을 완성하는 화가다.
7. 황규태는 한수정이 보류한 공간과 크기의 문제를 건드린다. 그는 번데기를 수백 배로 확대해서 SF에나 등장할 법한 가상의 생명체를 상상케 한다. 이윽고 번데기임을 알고나면 확대, 축소가 자유로운 사진의 특성이 존재의 무게를 전복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웃게 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우리의 눈이 작게 보는 것에는 노련하지만 반대의 경우엔 초보라서 그렇다. 우리는 실물보다 졸아든 모습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시각매체와 원근법적 시각에 단련되어 있는 것이다. 증명사진에 자를 갖다대고 머리가 손톱 크기라며 깜짝 놀라는 자는 없다. ● 모든 대상은 원근법이 작동하는 삼각뿔 모양의 시야와 눈의 초점범위 내에서만 오류 없이 지각될 수 있다. 따라서 번데기 따위를 각막 앞으로 가져와 시야를 온통 뒤덮더라도 그 형상은 커질지언정 우리는 그것을 번데기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번데기가 그렇게 커질 즈음 눈의 초점은 공황상태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든지 크기를 부풀릴 수 있는 사진은 우리의 지각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이런 경험은 유리탁자 위의 물방울들이 은하계로 둔갑하는 그의 다른 사진 앞에서도 거듭된다. 사진의 세계에선 찻잔의 폭풍이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듯이 어떤 대상이 시지각의 능력을 조롱하며 육박해올 때 우리는 약간의 멀미를 느끼게 된다. 눈의 고지식함이 머리의 선입견과 다투면서 일어나는 증세일 것이다. 나룻배만한 번데기 앞에서 군침 흘릴 자 누구인가.
8. 권오상은 사진기로 사람과 사물을 찍는다. 대부분의 사진가라면 이제 찍었으니 현상소나 암실에 갈 일만 남았겠지만 권오상의 경우는 그제서야 시작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진에 의존해 대상의 표면을 이차원 평면으로 옮기고는 그 결과물인 수십, 수백 장의 사진들을 짜맞춰서 처음의 실물과 유사한 덩어리로 다시 환원해내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의 작업은 사진의 이차원성을 극복해보려는 조각적 사진이자 조각에 구체적인 현실성을 부과해보려는 사진적 조각인 셈이다. ● 그의 사진기는 대상의 외관만 훑고 그것을 에워싼 주변풍경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는 고정된 시점(視點)을 강요하지 않는 재현된 오브제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을 조각으로서 읽는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묘사(描寫)의 의무를 사진에게 떠넘긴 편리한 방식의 조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증적 재현을 의식하는 사진의 범주에서 파악하자면 미심쩍다. 작업의 재료가 되는 낱장의 사진들이 한 대의 사진기로부터 나온다는 점은 그 의혹을 푸는 실마리다. 그의 촬영시간이 한 시간을 훌쩍 넘긴다는 사실은 처음 컷으로부터 마지막 컷에 당도하기까지 많은 시간의 분절들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그의 작업은 시차(時差)를 가진 사진들의 집적체다. 그러니까 그의 콜라주 작업이 꽤나 당당해 보이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내포된 시간적 불일치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 점을 고려하면 권오상의 재현물은 당장 시간의 허물로 만든 누더기가 되어 어처구니없는 허구의 세계로 전락한다. 그리고 이건 사족이지만 그의 모델들이 촬영을 위해 팔다리를 들었다 놓고, 광선 좋은 곳으로 이리저리 몸을 돌려주는 광경을 떠올리면 그의 공간성도 그리 미덥지 않다.
9. 김민혁은 필름과 인화지에 가하는 정교한 수정작업으로 사진 속 남성들의 성정체성을 흔들어 놓는다. 자고로 사진관에서 시술되어온 수정술의 궁극적인 목표란 대상인물의 이상적인 전형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즉 수정술은 일상적인 대면을 통해 기억될 대상인물의 이미지를 상정하고 그것에 간섭하지 않는 여타의 정보들을 '미(美)의 부각과 추(醜)의 은폐'라는 원칙 하에 다듬는 작업이다. 남성이 남성적이기를, 여성이 여성스럽기를, 노인이 더 젊기를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결국 고객의 만족을 우선으로 하는 사진관은 반점이나 흉터, 멍한 눈동자, 창백한 안색 등을 말끔한 피부와 초롱초롱한 눈동자, 건강한 피부로 만들고, 심지어는 광대뼈와 안면근육, 치아까지 돌보게 된다. 흉터나 반점이 제거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숭배대상이라 할 수 있는 초상사진의 역할에 위배되는 비미적(非美的) 가치이기 때문이다. 반짝 창궐하고 말 여드름을 졸업앨범에 넣으려는 학생은 없으리라. ● 사진수정술은 사진이 실제 인물의 재현물임을 확인시켜줄 '최소공약수'를 건드리지 않는다. 다만 그 나머지의 것으로 이상적인 재현에 이바지할 따름이다. 김민혁은 최소공약수는 보호하지만 수정술의 목적은 배반한다. 그는 보편적인 여성미의 코드들, 이를테면 동서고금 미인의 공통분모라는 촛농처럼 맑은 피부 말고도 성적인 매력을 도드라지게 하는 붉은 입술과 커다란 동공, 건강과 활기를 상징하는 희고 깨끗한 흰자위 등을 남성에게 덮어씌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보는 것은 느글대는 남성상인데 그것은 사회화된 성(性)과 그 사회화를 알선하는 사진적 재현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언급하는 것이다. ● 10. 살펴보았다시피 크기의 비약으로 시지각적인 혼란을 꾀하는 황규태와 성별이 전도된 사진수정을 통해 사진이 실천해온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김민혁의 사진은 석연치 않은 이미지로 관람자를 주춤케 하는 반면 집착적 재현행위에 내포된 허구성을 드러내는 권오상이나 풍경사진의 관행적 재현코드를 패러디하는 김영길의 작업은 짐짓 친숙한 모습으로 접근한다. 그런가 하면 흑백사진을 통해 매체의 태생적 결함을 부각하고 있는 한수정은 에두르지 않고 참과 거짓을 대질한다. 이처럼 이들의 작업은 각각 전술을 달리하지만 사진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사진으로 허문다는 점에서는 한 통속이다. 추궁은 집요하고, 질문은 저마다 달라서 유구하던 재현의 논리는 정말이지 진땀을 흘릴 수 밖에 없다. 멀쩡하던 재현의 권위를 임기 끝난 대통령처럼 앉혀놓고는 심문을 하는 것이다. ● 만약 이들의 작업이 당혹스럽다면 그것은 이들이 우리를 기만해서가 아니라 사진의 본질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실재와 재현의 괴리가 사진의 숙명적 전제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사진의 참이란 재현의 습성 속에 가둬지는 것이 아닌가 보다. ■ 김승현
Vol.20000927a | 지록위마 指鹿爲馬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