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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의도 우리 사회에서 '성'은 문학이나 영화의 소재로 활발히 다루어지면서도 일상생활에서는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터부와 위선을 동반하고 있다. 그 가운데 역설적으로 정치·사회면에서는 성과 관련된 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져 이목을 집중시킨다. 지난 5월 국가안보를 담보로 한 무기거래 로비 의혹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린다 김 사건의 경우 지난해 수사 대상에 오른 옷 로비 사건과 함께, 정치적 논란의 차원을 넘어서 어떤 의미에서 양지보다는 음지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사회적 존재로서 '한국 여성'을 생각하게 한다. 대조적으로 올해초 2월에 핀란드에서는 타르야 할로넨 외무장관이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일본에서는 오타 후사에가 여성후보가 오사카부 지사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가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함으로써 밝은 데서 활약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너무 대조되는 현실이다. 이제 우리 나라에서도 여성 자신의 사회·문화적 지위와 '여성'으로서의 주체성이 스스로의 각성과 정당한 제도적 차원에서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우리가 지난 02호의 「정치·디자인·권력」에 이어 이번 03호에서 「디자인과 성」을 특집으로 삼은 한 가지 이유이다. ● 우리는 먼저 '성'(性)이란 용어가 생물학적 성으로서 '섹스'(sex)와 사회학적 성으로서 '젠더'(gender)로 구분되지만, 서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상호작용하는 관계방식 속에서 규정되어야 함을 밝혀두고자 한다. 또한 제도적 장치 확보의 중요성 못잖게 성담론이 보다 구체적인 삶의 방식들과 상호작용하는 '디자인 문화' 차원에서 '동시에' 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위적인 각종 생산물 환경으로 이루어진 디자인 문화야말로 위의 논의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미묘하고 집요한 방식으로 성을 왜곡하고 불평등과 차별의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 최전방 접점이기 때문에 그렇다. 디자인은 언어와 같이 사물, 이미지, 공간을 사회적으로 구축하는 사고와 행위를 뜻한다. 예컨대 페미니스트 건축이론가 레슬리 와이즈만(Leslie K. Weisman)이「디자인에 의한 차별 Discrimination by Design」에서 말했듯이, "언어의 구문론처럼 건물과 공동체의 공간적 배열은 사회에서 성(gender), 인종과 계층 관계의 성격을 반영하고 강화한다. 언어와 공간의 사용은 타자에 대한 어떤 집단의 권력과 인간 불평등의 유지에 공헌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성 중심적 언어사용과 마찬가지로 남성적 사고로 구축된 디자인 문화 속의 사물, 이미지, 공간은 성차별의 온상이라 할 수 있다. ● 디자인 문화의 생산계에서 '젠더 의식의 부재'는 전 매체 영역에 공통된 현상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어떤 형식이건 간에 섹스와 젠더간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인간의 차이점을 존중하는 사물, 이미지, 공간을 디자인하고, 그러한 가치들을 안치시킴으로써 디자인 문화를 다시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이번 특집 주제를 「디자인과 성」으로 기획했다. ■
● 차례 기획의 글 03호를 발간하며 ● 특집: 디자인과 성 ∥ 황두진_건축 공간에서의 성차별 ∥ 김성복_공주패션과 미아리 텍사스 블루스 ∥ 박인하_애니메이션 속의 히로인과 섹슈얼리티 ∥ 서정남_'젖소부인'을 훔쳐보는 시선들: 한국 에로 영화 벗기기 ∥ 이영준_이동통신 광고와 여성의 정체성: 이미지는 의미하는가? ● 창작과 불평 강태영_ "원맨쇼" ● 가로지르기 ∥ 정재서_이미지의 제국 (I) : 신화 속의 몸, 몸 속의 신화 ∥ 임홍배_괴테의 색채학, 그 현대적 재조명 ∥ 이정구_서울에 온 영국의 미술공예 운동 ● 그림 이야기 데이비드 마주켈리_"거시기 털을 막아라" ● 디자인과 삶 ∥ 김현도_白日夜話 ∥ 나선희_미래 여성에 대한 명상: 「총몽」과 「이온 플럭스」를 통해 본 ∥ 이성욱_ 문화마름질방 ● 별도 기획: 모내기 사건의 교훈 ∥ 한인섭_신학철의 「모내기」와 국가보안법 ∥ 김민수_시각문화의 '모내기' ∥ 김민수_신학철 선생과의 인터뷰: "본능의 미학" ● 비교문화비평 ∥ 웨시 링_"수지 웡 드레스"와 홍콩적 옷 입기: 홍콩패션의 이데올로기 ∥ 송진영_여신에서 악녀까지: 중국 고전 속의 여성 이미지 읽기 ■
● 주요내용 「특집: 디자인과 성」에서는 건축, 패션, 애니메이션, 에로 영화, 광고에 나타난 성차별과 성 정체성, 섹슈얼리티 문제를 논의한다. 과연 만화, 애니메이션, 광고, 그래픽, 패션, 영화와 같은 상품미학의 차원뿐만 아니라 도시와 건축의 공간미학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디자인 문화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어떤 성적 정체성을 생산해내고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남근 중심적 가부장 질서와 성 차별 이데올로기를 조장하고 있는가 등의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었다. ● 황두진은 "건축 공간에서의 성차별"에서 문화로 포장되고 공공성으로 변론되는 건축 이면에 작용하는 차별과 불평등의 근원을 건축가 자신의 시선으로 성찰했고 김성복은 이번 "공주패션과 미아리 텍사스 블루스"라는 글에서 한국 패션계의 두드러진 현상인 '공주패션'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공주패션'이 근절되지 않는 한, 여성은 남성이 상상하는 관음적 눈요기감에 지나지 않으며, '세련된 노예'로서의 삶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박인하는 "애니메이션 속의 히로인과 섹슈얼리티"에서 애니메이션이 무의식적으로 성을 어떻게 디자인해내고 있으며, 그 안에서 여주인공이 어떤 성 정체성을 담고 있는지 파고들었다. 서정남은 "젖소부인을 훔쳐보는 시선들: 한국 에로 영화 벗기기"에서 한국 에로 영화의 역사적 맥락, 유형, 그 전형적 내러티브와 인물상, 제작기법의 문제점 등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 에로 영화의 현 주소를 짚어주었으며, "이동통신 광고와 여성의 정체성: 이미지는 의미하는가?"에서 이영준은 최근 이동통신 광고에 등장하는 여성 이미지의 특징을 신체적, 표상적 정체성과 결부된 '이동성의 지층변화'로 파악하고 상징계와 상상계의 틈바구니에서 'N세대, X세대' 등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 「창작과 불평」에서 시각이미지 생산가, 강태영은 아직 준비중인 미래의 디자이너이지만 세상에 대한 자의식을 글과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으로 표현하였으며 이번 호에는 중문학자, 독문학자, 신학자들이 각각 '이미지와 몸 담론,' '근대 시각과 색채론,' '건축과 디자인'을 넘나드는 세 편의 「가로지르기」가 시도되었다. ● 「그림 이야기」에는 뉴욕에서 활동하는 만화가 마주켈리의 "거시기 털을 막아라"(Stop the Hair Nude)를 실었다. 작가가 실제 일본에서 경험한 일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이 만화는 얼마 전 영화 「거짓말」을 둘러싼 검열의 문제를 환기시켜주며, 이러한 일들이 얼마나 '편집증적인 자기 확신' 속에 이루어지는지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 「디자인과 삶」에서 먼저 김현도는 성욕과 남근 이미지에 대한 한국판 "백일야화"를 들려주고, 나선희는 "미래 여성의 몸에 대한 명상"에서 만화 「총몽」과 「이온 플럭스」를 통해 본 '사이보그 여성 신체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이성욱은 "문화마름질방"에서 이미지가 지배하는 현대적 삶의 풍경에 시선을 보냈다. 그는 생각하고 음미하는 '숙성의 시간'을 버리고 점차 시각의 직접성 속으로 함몰되어가는 우리 자신과 인간 관계에 대해 묻고 있다. ● 이어서 별도 기획으로 지난 10년간 국가보안법 위반 논란 끝에 1999년 8월 대법원에서 이적표현물로 최종 유죄 확정을 받고, 금년 5월 4일 유엔 인권위원회에 제소된 신학철의 「모내기」 그림 사건을 다룬다. 법학자 한인섭의 글과 신학철 인터뷰, 김민수의 글은 우리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물로 남겨질 것이다. ● 이번 호에는 두 편의 「비교문화비평」을 실었다. 홍콩 폴리테크닉의 패션평론가 웨시링은 "수지 웡 의 섹시 청삼: 홍콩 패션의 이데올로기"에서 홍콩 패션에 담겨져 있는 이데올로기를 분석해냈다. 수지 웡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이 입었던 미니 청삼이 어떻게 서구인들의 인기를 끌고 홍콩의 지역적 드레스 코드(dress code)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사회·문화적 맥락을 짚어내고 있다. 이와 함께 한국의 중문학자 송진영은 "여신에서 악녀까지: 중국 고전 속의 여성 이미지"라는 글에서 현대 한국 사회에 만연된 가부장적 유교 이데올로기의 뿌리로서 중국 고전에 나타난 여신에서부터 현모양처와 경국지색, 요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별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여성 이미지의 실상과 허상을 밝혀주었다. ■
● 디자인문화비 평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디자인 문화 비평지 「디자인문화비평」은 01호 우상, 허상 파괴: 한국 디자인 문화의 진단과 처방(1999년 9월), 02호 정치/디자인/권력(2000년 3월)을 내놓고 2000년 7월 03호 '디자인과 성'을 발행하였다. ● 전 서울대 교수이자 디자인문화비평가인 김민수 박사와 한성대 예술대학 김성복 교수가 주축이 된 [디자인문화실험실]에서 기획, 편집하고, (주)안그라픽스에서 발간을 담당하고 있다. 편집자문위원으로 김선정(아트선재센터 큐레이터), 서현(현 건축소장), 성완경(미술비평가, 인하대 미술교육학과 교수), 안상수(그래픽 디자이너, 홍대 시디과 교수), 이정우(철학가, 철학아카데미 원장), 정병규(정디자인 대표, 홍익대 겸임교수), 정재서(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최정화(가슴시각개발연구소 간섭자) 씨가 참여하였다. ● 비기간행물(무크지)로 발간되는 디자인문화비평은 '이미지 시대'에 시각언어로 이루어진 일상 삶과 문화의 상호작용과 실천방식을 이해, 창조, 소통시키기 위한 학제적 통합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비평지는 디자인을 대중문화의 상태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진맥점'으로 보고, 모든 인위적인 생산물(제품, 시각 커뮤니케이션, 광고, 패션, 뉴미디어, 만화와 애니메이션, 건축, 도시 등) 환경에 의해 일상 삶과 문화가 어떻게 생성되고 소비되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또한 디자인문화비평은 이미지 시대의 새로운 인문적 성찰과 지혜를 구체적인 문화현실 속에 접지시키기 위한 통합학문적 실험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 '이미지 시대, 문화적 저항과 재생산을 위한 신랄하고 도발적인 질문과 논의'를 표방하는 이 비평지는, 매 호마다 제도적 힘과 무관심 속에 묻혀져 좀처럼 제기되지 않은 예민한 주제를 특집 기획물로 다룰 예정이다. 또한 내용 중에는 독자들에게 친근한 대중문화 속의 디자인 문제를 학문 분야의 벽을 뛰어넘는 시각으로 논의하는 '디자인과 삶', 국제적인 관점에서 문화를 바라볼 수 있는 '비교문화비평', 학맥과 인맥에 관계없이 현장에서 작업하는 이미지 생산가들의 생생한 목소리와 신선한 작업을 발굴하는 '창작과 불평', 문자 위주의 메시지 전달에서 벗어나 시각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 '그림 이야기' 등이 다채롭게 구성된다. ■
Vol.20000817a | 디자인문화비평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