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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혐오 / 정서영의 탈원근법 ● 정서영의 작업은 모든 것을 위계적 좌표 속에 위치시키는 원근법적 지도 그리기를 벗어나려는 제스쳐다. 보르헤스의 우화처럼 땅을 뒤덮어 버리거나 심지어, 보드리야르가 목격하였듯이, 땅을 삼켜버린 지도가 아닌, 땅과 동등하게 의미를 교환하는 새로운 지도를 그리기 위한 것이다. 안 알려진 많은 길들이 그려지고, 여러 가지 축적이 뒤섞이고, 평면도와 투시도가 출몰하는, 심지어 이야기마저 담긴, 그리고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지도를. ● Ⅰ. 눈 ● 정서영의 작업은 시각중심주의에 대한 강력한 이의제기이다. 유리 위에 엣칭된 자동차는 마르셀 뒤샹의 활주기구(Glider Containing a Water Mill, 1913-1915)처럼 깊이의 일루젼을 실재로 오인하게 한 평면 캔버스에 대한 패러디로 읽힌다. 유리는 그 투명성으로 인하여 그림의 바탕이 일상세계에 속한 평평한 물체임을 주지시킨다. 그리하여 그 위에 원근법적으로 그려진 자동차는 유리의 촉각적 평면성과 이미지의 시각적 깊이 사이에서 방황한다. ● 정서영은 또한 시각중심주의에 의해 액자 밖으로 버려져 온 것들을 주워 모은다. 깜깜한 암흑 속에서의 손맛, 숨결 같은 것들이 그것들인데, 그것들은 이미 알베르티의 선원근법에 대기를 채우고자한 레오나르도에 의해 구제되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가 수증기와 먼지로 가득찬 대기를 그리고자 했다면 정서영은 그 속을 진정 걷고자 한다. 그녀는 원근법적 그림이 밀쳐냈던 몸을 적극적으로 살려낸다. 발을 땅에 붙인 채 멀찌감치 서서 관망하는 대신 사물이 살고 있는 공간 속으로 몸을 밀어 넣고 그것들과 촉감을 교환한다. 그녀는 사물의 껍질을 더듬으면서 그것을 불투명한 채로 놓아 두기를 택한다. 직각으로 깊숙히 꽃히는 시선의 메스로부터 사물을 구함으로써 그것의 살아있는 모호함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작은 이와같이 주체와 사물 간의 시각적 거리의 위계가 무너진 일종의 촉각적 풍경화이다. ● Ⅱ. 말 ● 정서영의 말투는 언어의 불투명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그녀는 꽃, 자동차, 파도, 길, 조각 등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소재들을 선택하고 그것들의 표면을 스쳐가는 말을 중얼거린다. '다른 꽃 두 개', '꽃병에 길', '고무줄 달린 조각'... 매우 당연한 말들, 사유의 깊이를 차단하는 맥락없는 언어들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사물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그녀의 언어는 사물 깊숙히의 어떤 곳을 지향하기 보다 그 주변을 무심하게 맴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물질은 언어의 그늘에 종속되지 않으며 오히려 언어를 압도하기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림, 유토, 도자기, 유리엣칭 등 다양한 물질로 만들어진 유령들은 '유령'이라는 하나의 말로 환원할 수 없는 복수의 물질적인 감각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 Ⅲ. 틀 ● 정서영은 이미 알려진 이미지들이나 오브제를 차용하거나 복제할 뿐 아니라, 자신의 작품끼리도 서로를 참조하게 한다. 드로잉과 조각, 조각과 조각 또는 그림과 그림이 서로를 베끼는 것인데, 예컨대 먹지 드로잉은 자신의 드로잉을 먹지를 대고 모사한 것으로 자발적인 드로잉과 판화 사이의 것이다. 그것은 오리지날한 창조라는 것이 예술가 정신의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어떤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따라서 예술적 창조와 복제적 기술 사이의 위계와 간극이 신화일수도 있음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 정서영에게는 '예술적' 형태와 '기능적' 형태 간의 위계도 거북하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의 표현대로, '필요에 의해서 생기는 형태'를 예술작품에 버젓이 수용한다. 「조각적 신부」나 스폰지 집을 버티고 있는 다리는 무엇보다도 조각을 세워놓기 위한 것이다. 제작 공정도 반드시 의도하는 형태를 실물화하는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으며, 기능이 형태를, 형태가 의미를 낳기도 한다. ● Ⅳ. 깊이 속으로 평행하기 ● 정서영에게 눈과 더듬이는 양자 택일의 것이 아니다. 그녀는 눈의 횡포를 비껴가는 일이 눈을 포기하는 일이 아님을, 더듬이만을 취하는 것도 변방을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폭력에 다름 아님을 알고 있다. 단지 눈을 조건지워 온 직선적 '깊이'라는 미신을 벗어나기 위하여 더듬이를 같이 동원할 뿐이다. 정서영은 하나의 중심을 지향하는 시선, 그것의 억압을 피하기 위하여 어정쩡하게 양다리 걸치고 빈 곳들을 들여다본다. 그것은 밝음과 어두움이 교차되는 세계, 깊이로 평행하는 세계에 이르기 위함이다. ■ 윤난지
전망대 / 정서영의 사물 ● 「잘/못 볼만한 조」의 이중 이미지는 친숙한 것이 낯선 것으로, 또는 그 반대로 아주 쉽사리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작품처럼, 정서영 작품들은 친숙하면서 낯설다. 그러나 이것은 게으른 인식의 습관을 들깨우기 위한 충격이나, 작품과의 비평적인 거리를 확보하기 위한 단절, 혹은 체험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그간의 문학 예술의 방법들과 약간씩 결을 달리한다. 그녀의 작품들은 그렇게 눈에 띄게 쇼크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치 충격이 어떻게든 이미 흡수되고 난 후의 '공간-심리적'인 상황에 관객을 '내던져 버린다'. ● 이것은, 그렇게 놀랄 것이 없는 결과에 대한 선선하고도 훈련된 승인 - '권태'라는 저 흥미로운 '자본주의적' 감정 때문일 것이다. 작품 [-어]에서처럼, 대상(이 경우에는 문자)의 기호화와 미화는 오히려 반대로 사물이나 재료, 혹은 제작방법의 평범성을 그 이상의 숭고한 상태나 비범한 계기로 끌고 가지 않는 장치들이다. 이들은 언 듯 우아한 미적 대상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시종 물건됨의 윤리랄까, 물건으로서의 자격을 강조한다. 애초에 그것들은 물건이었으며 마지막까지도 물건이다. ● 작품들은 기술과 노고의 낭비라고는 없이 만들어진 대단히 기능축약적인 사물로 보이다가도, 때로는 심오한 알레고리로 보이기도하고, '상징의 숲' 속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나친 범용성은 역설적인 특수성을 낳기도 하며,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가도 불현듯 '뭔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관객의 의미에 대한 갈구에, 작품이 냉정하게 뒤돌아서 있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이 물건들을 처음 대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별다른 해답을 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난다. ● 정서영 작업의 사물성(혹은 객관성)과 분위기(혹은 주관성)는 그녀가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앞에서의 설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정서영은 언어에 실체를 부여하는 언어의 객체화와 사물화를 주요 방법으로 삼고 있다. 정서영이 착안하는 지점이 바로 이 언어적 모방에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이 본래 갖고 있는 생생한 구체성의 죽음과 그 체계로부터 벗어나려는 '말(speech)'의 주관적이고 창조적인 능력, 혹은 신비이다. ● 카펫, 전망대, 선인장 등은 목적과의 내적인 조응을 상실한 어떤 수단들 자체이며 형태, 면적과 위치들로 이루어진 어떤 의미의 덫들이다. 이들은 의미가 없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아니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의미라는 화물을 사물로부터 땅위로 내리듯이, 실체의 무상성 속으로 걷게한다. 수수께끼의 진정한 가치는 엉뚱한 대답에 있는 것이다. ● 이는 근본적으로 소설가보다는 시인의 태도에 속한다. 사르트르가 이미 50여년 전에 통쾌하게 말했던 바, '시는 전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오히려 시는 말에 「봉사」한다' 간단히 말해서, 시인에게 의미 있는 언어란 일종의 사물에 가까운 것이다. ● 만약 사물들이 그 자체 속에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선택된 물건들의 임의성과, 공간 속에서의 배치이다. 정서영의 최근 작업은 특히 이러한 물건들의 근원 없는 임의성, 혹은 부조리한 분위기로 인도한다. 이 작가에게 전시회는 어떤 부조리한 인테리어 디자인이다. 여기서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것은, 물론 장식, 상징, 효용을 일사불란한 계획 속에서 충족시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물건들의 '디스플레이'라는 인테리어 디자인의 빙점(氷點)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이다. 그것은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사물들이란 정서영의 작업처럼, 서로 결합하여 '어울린다'든지 하는 어떤 의미체계를 만들어 내기에는 처음부터 너무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 사물들이 모인 결과(디스플레이)는 결국 하나의 '분위기'이다. [수십개의 그림과...]보다 이후 작업인 금호미술관의 [유령 불 파도]의 설치는 더욱 그렇고, 선재 출품작은 이러한 측면을 더 끌고 나갔다. 정확히 말하면 정서영의 사물들은 '분위기 메이커'이며, 그것이 원래 사물들의 공약수인 것처럼 나타난다. 그것은 사물들로부터 나오는 힘이지만, 동시에 유령이나 불처럼 사물 자체가 갖고 있는 사물의 베일처럼 보인다. ● 분위기는 한편으로 대상을 신비화하기 쉽다는 문제를 언제나 안고 있지만, 그 사물들이 있는 세계가 애매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에는 적절하다. 왜냐하면 '분위기'야말로 우리가 사물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다는 것의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서영의 사물들이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서영이 이 작업을 통해 '무엇이든' 분위기를 풍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데 있다. ● '의미의 베일', 혹은 분위기의 이중성에 관해 더 나아가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서영의 작업에서 의미는 덫과 같은 것이다. 정서영의 물건들은 의미의 압박을 받아들이는 체할 뿐으로 보인다. ● 실제로 우리는 '누보 로망'에서 소설가가 보는 세계, 소위 '주관적 객관주의'의 세계와 정서영의 어법이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사물을 마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처럼 기술하지만, 실은 그러한 기술이 사물과 세계에 대한 주관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는 하나의 원칙을 공유한다는 점에서이다. 그러한 글쓰기는, 주관(작중인물, 작가)이 사물이나 세계에 투사되어 대상을 인간주의적으로 정복하거나 세계를 세계관의 통합된 질서 아래 도구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은 사물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인' 상태에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어야만 한다. 인간의 시선에 의해 세계는 남김없이 묘사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미지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세계는 언제나 애매하다. 따라서 애매함은 심리적이거나 논리적인 혼란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명석함이나 진실의 수준을 획득하며, 특히 시간이나 인식의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이 잠정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는 상태를 표현한다. ● 이러한 방법은 현대적인 체험, 특히 덧없는 일상의 리얼리티를 보장해준다. 탑처럼 말려올라간 카펫은 변두리 나이트클럽의 바니타스(vanitas)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러한 상상은 잠정적, 자의적일 뿐(정확한 약속에 기초해있지 않다는 의미에서)이고, 그것은 그저 나선형으로 말려 올라간 카펫 이상으로 볼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렇게 됨으로써 사물은 고유의 무상함을 드러낸다. 그것은 권태의 미덕이다. '권태는 생활의 행위 끝에 오는 것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의식의 운동을 시작하게 한다.' 그리고 '사물의 궁극 목적은 길을 가로막아서 사람을 그 자신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 전반적으로, 정서영의 작업은 지금의 한국에서 (그리고 아마도 여성으로서), 주체의 불안과 불확실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이것은 현대생활의 폭력에 대한 실존적인 '우려'와 자구책에 대한 평가, 특히 이 몹쓸 나라에서의 그것에 대한 평가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 한국의 조각에서 정서영의 자리를 가늠케 한다. ■ 박찬경
Vol.20000317a | 정서영展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