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미술전시관(폐관) Tel. 02_3770_3870
화가의 욕망은 삶과 예술의 일치이다. 일상의 삶 속에 예술 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최은옥은 점찍는 행위를 통해 삶과 예술의 일치를 꾀하는 작업을 한다. 그녀의 점 찍는 행위는 하나의 창작적 놀이 행위이며, 매 순간 느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조와 관찰의 일기이다. 최은옥은 그저 하나 하나의 점만으로 인간의 숲을 그리고, 세상의 넓은 들판을 그린다. 「뜰에서」란 제목은 최은옥의 작업의 테마이자 내면세계의 풍경이다. ● 화가의 욕망은 적은 곳에 많은 것을 담는 것, 작은 곳에 큰 것을 담는 것, 가까운 곳에 먼 것을 담는 것, 보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담으려는 데 있다. 대자연의 거대한 품, 인간 세계의 수많은 사건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작고 큰 관계들, 인연들. 이런 거대한 담론들을 하나의 그림 속에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최은옥은 이 거대한 세상 읽기로써 하나의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점을 찍는 것으로. ● 작가는 세상을 향해 한걸음을 뗀다. 한 걸음이 출발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두발로 걸으면서 세상을 본다. 사람을 만난다. 세상은 너무나 풍부하고 충만하며 경이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사람들은 너무도 많고 가지각색의 개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것을 관조하는 화가는 장엄한 합창곡을 연주하듯 무수한 점들로 세상의 뜰을, 사람의 뜰을 표현한 것이다. ● 최은옥의 이번 개인전은 네번째로 이전의 작업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전의 전시에서 수묵을 사용하여 반복된 선과 점으로 화면을 채우는 방법으로 자연의 대상에 대한 내면적 탐구와 자동기술적 드로잉의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면, 이번 네번째 개인전에서는 수묵 대신 색연필이란 도구를 선택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변화는 흑백톤 대신 '가지각색'이 등장한 것이다. 화선지 위에 수묵의 번짐과 농담으로 표현하는 대신 색연필이란 다른 재료를 선택한 것은 하나의 과감한 시도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동양화니 서양화니 하는 장르적 구분을 의식한 것도 동양화가니 서양화가니 하는 형식적인 작가 구분을 의식한 것도 아니다. 그저 '그리기'의 화가가 색연필과 도화지를 만난 것이다. 가지각색의 세상과 인간의 뜰을 표현하기 위해서. ● 종이 위에 색연필로 찍은 무수한 점들은 개별의 점이 아닌 그냥 하나의 덩어리처럼 혹은 종이 위에 스며든 흔적처럼 보인다. 개별의 점들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원을 그린 듯 원형의 구조가 강조되어 있다. 점들의 집합은 하나의 원이 된다. 그 원은 하나도 완전한 원이 없다. 아마 완전한 원이란 이데아 속에 존재하는 환영임을 작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점들의 집합인 원들은 마치 수렴과 확산을 의미하는 수학적 집합구조처럼 보이기도 하고, 인구밀도를 표시하는 지도 위의 색점 같기도 하다. 색상 또한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다. ● 무수한 색점들은 종이 위에 밀착되어 그저 조용하게 침잠해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런 표현 자체가 수묵으로 점을 찍고 화선지 위에 스며들었던 이전의 작업 행위와 떨어질 수 없는 그녀의 독자적인 그리기의 세계인지 모른다. ● 작가는 고등학교 시절 수업시간에 선생님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노트 위에 점을 찍거나 빗금을 긋거나 하는 낙서들을 했다고 얘기한다. 나중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문뜩 발견한 것이 점찍는 것을 좋아하는 자신의 손장난이 작업하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심히 반복한 손장난은 하나의 드로잉 행위가 되고, 삶과 일상을 표현하겠다는 생각의 원천은 「뜰에서」란 테마로 작가 자신의 내면의 풍경과 세상에 대한 눈뜸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명상이 된 것이다. ● 「뜰에서」란 테마는 현재 진행형의 시공간에서 느끼고 부딪치고 마주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작가의 노래이다. 그 노래는 점들이 모이고 흩어지고 강조되고 지워지는 끝없는 그리기의 작업 과정 속에서 잉태된 조화로운 합창이다. 건조해지고 황폐화된 내면에 새살이 돋아나듯 그녀의 반복되는 점찍는 행위는 작업 속에 삶 속에 일기 쓰듯 그려나가는 희망의 노래가 될 것이다. ● 그녀의 점찍는 행위가 앞으로 더 완숙한 생각의 원천들이 쌓인 더 커다란 의미의 '무게'였으면 한다. 그 무게는 작업에 있어서의 완숙도일 것이며, 삶과 예술의 일치를 위한 작가로서의 치열함의 깊이일 것이다. '뜰에서' 사색하고 관조하는 과정을 통한 반복적 행위, 창작적 놀이로서의 점찍는 행위가 그녀의 삶의 통틀어 끝까지 좋은 원인을 짓는 행위로서의 '작업'이길 기대한다. ■ 강재영
Vol.20000223a | 최은옥展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