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

2000_0209 ▶ 2000_0215

김재웅_비너스의 탄생

참여작가 고낙범_김두진_김재웅_김정명_김창겸_김형석_배영환 배준성_서상아_석영기_송차영_우도학_정보영_한만영_홍지연

공평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공평동 5-1번지 Tel. 02_733_9512

● 이 글은 린다 허치언의 「패러디 이론」을 중심으로 패러디의 범주와 제 이론 등을 참조하였음을 밝혀둔다.

패러디의 다양한 미소 -현대 미술 속의 패러디(Parody)의 미학적 기능과 가치에 관한 소고 - ● 예술은 인생을 모방하고, 패러디는 예술을 모방한다. 인생보다 예술을 모방함으로써 패러디는 자의식적으로, 자기비판적으로 그 자체의 성격을 인식한다. ● 들어가는 말 ● 19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현상적 흐름이 만연해 있었던 한국미술계는 미술대전 수상작의 표절시비로 한바탕 혼란을 겪은 적이 있다. 표절이냐 차용이냐의 시비가 분분한 가운데, 미술대전의 주최측인 미술협회측의 "포스트모던 기법 중 하나인 차용 혹은 패스티쉬로 인정, 표절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과 또 다른 여러 전문가들의 "미학적 근거의 부재 혹은 오해로 표절이 확실"하다는 의견이 공방전을 벌였다. 이 표절시비의 쟁점은 작가는 물론, 전문가조차 차용과 표절의 개념을 제대로 구별하지 않은 채 혼동하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이 글의 중심 개념이 될 패러디의 언급에 앞서 이런 사례를 앞세우는 것은, 패러디는 항상 차용과 표절이라는 공방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한 역사를 가졌기 때문이며, 지금까지도 이들이 체계적으로 변별되지 않은 채 혼용되거나 혼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명료히 하지 않는 한 아마 이러한 논쟁은 계속될지도 모른다. 현대미술의 중요한 방법론 중의 하나인 이런 차용과 인용, 그리고 패스티쉬와 패러디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오면서 훨씬 더 확장된 개념과 전략으로 수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재고된다. 따라서 이 글은 포스트모던 미술 혹은 현대미술의 주요 전략 중의 하나인 패러디가 '의도적이고 공공연한 차용'이라는 조건을 갖추고, 왜곡, 부정, 풍자, 아이러니, 알레고리 등의 방법을 통하여 보다 비판적 이념을 정리하는데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는 전제 하에 그와 혼동되는 타 개념들을 비교하며 다루어 보려고 한다. 어찌보면 다양한 패러디 이론을 작품의 다양성이 담보하지 못한다는, 자못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자행되는 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배제할 수 없다. 이 부분은 우리 작가들의 숙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어쨌거나 오든(W. H. Auden)의 말처럼 도서관에 비평에 관한 저서가 전혀 없을 때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유일한 비평적 훈련은 패러디를 쓰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대로, 패러디는 원래의 작품보다 더 기적적인 힘을 보여주는 하나의 고도의 지적인 게임으로서 작가들로 하여금 '비평적 안목으로서의 실천적 예술'에의 힘을 부여할 것이다. ● 패러디의 정의와 범주 먼저 패러디의 어원을 살펴보면, 희랍어인 paradia에서 para는 '반(反)하여'의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됨으로써 패러디를 텍스트간의 대비나 대조로 정의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para는 '이외에'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이는 대조가 아닌 일치와 친밀성의 의미로도 작용한다. 이 런 어원의 이중성으로 말미암아, 결국 패러디는 두 의미 사이에 중립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차이를 내포한 반복'이라는 확장된 개념을 갖는다. 이는 바로 상호텍스트성 혹은 초텍스트성(초맥락성 trans-contextualization 혹은 전도inversion라는 개념이 사용되기도 한다)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즉 이는 어느 한 텍스트가 필연적으로 다른 텍스트와 맺고 있는 상호관계라는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따라서 패러디는 발신자와 수신자 즉 기호입력자와 해독자 사이의 의사소통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만 한다. 이런 정의를 근간으로 한 패러디의 범주는 광범위하여 1. 전체 장르에 대한 패러디, 2. 한 시대나 조류의 스타일에 대한 패러디, 3. 특정 예술가에 대한 패러디(개별작품에 관한 패러디와 작품의 일부분에 관한 패러디로 구분됨) 4. 예술가 전체 작품의 심미적 양식상의 특징에 관한 패러디 등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개별 항목마다 더 세분화하여 패러디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패러디는 어떤 작품이나 텍스트를 패러디할 뿐아니라 예를 들면, 피터 콘라드(Peter Conrad 1980)는 달리의 전 작품이 유기적 물질계의 와해를 다룬 모더니즘과 패러디적 관계에 있음을 주장한다. 즉 달리의 작품에서 빛의 분열(인상주의), 추상(큐비즘), 기계화(레제, 피카비아) 등이 패러디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달리의 유명한 그림 「기억의 고집」은 늘어지고 매우 유기적이며 비기계적 시계들의 그림을 통해 유기적인 것에 공포를 느끼는 모더니즘의 관례를 패러디적으로 전도시킨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또한 마그리뜨의 「인간조건」같은 그림들은 예술의 전통과 시각적 인식의 전통을 모두 패러디한다. 또 어떤 패러디스트들은 모든 현대미술과 미술관까지도 패러디적 전복의 대상으로 보기도 한다. ● 패러디의 전형 ● 패러디되는 작품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당대의 혹은 전대의 인기있는 작품이 패러디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즉 누가봐도 알만한 공공연한 역사적 작품이어야 하며, 이를 '의도적으로 차용'했다는 납득할만한 객관적인 타당성을 지녀야 한다. 이렇듯 패러디스트들은 대부분 주의를 끌지 않는 작품에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지 않는다. 패러디는 크게 세 종류의 전형으로 나누어지지만 이들이 서로 혼재하여 나타나는 등 실상 분류보다 훨씬 다양한 전형들이 존재한다. ● 1. 조롱의 패러디 ● 전통적인 패러디는 실상 조롱이나 경멸조의 것이 많았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패러디의 대부분이 이 조롱이나 경멸의 그것이다. ● 2. 존경의 패러디 ● 마티스의 「금붕어」는 리히텐슈타인의 「금붕어와 고요한 삶」의 배경이 된 작품이지만 변경만 되었을뿐 조롱되지는 않는다. 또한 톰 베셀만은 그의 「위대한 미국의 나체 #26」에서 마티스에게 경의를 표한다. 유사한 존경 혹은 찬미의 관계는 또 재스퍼 존스와 뒤샹, 리쳐드 티본과 스텔라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다. ● 3. 중립적인 패러디 ● 전경화된 텍스트와 후경화된 텍스트에 대한 공격성이 전혀 없는 것들이다. 개인적 콤플렉스를 표현한 것도 아니고 단지 전 텍스트 혹은 그 작가와의 사실적 혹은 잠재적 관계를 위해 선택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그 경우 흔히 '인용' 혹은 '참고'라는 중립적 개념의 단어가 사용된다. ● 포스트모던 미술의 양식들 ● 1. 패러디와 그 밖의 유사한 개념들 ● 패러디는 자주 패스티쉬나 벌레스크, 표절, 인용, 인유, 풍자와 혼동되며, 따라서 그것을 변별할 근거가 필요하다. 벌레스크(戱作)나 트라베스티(서툰 모방)와 패러디의 차이는 전자가 반드시 조롱을 내포하고 있지만, 후자는 반드시 조롱을 지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패러디가 조롱이라는 단일한 정신으로 정의된다면, 벌레스크나 트라베스티로부터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다. 인용과 패러디의 차이는 전자는 모두 권위의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장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범주의 에토스가 허용되며 양쪽 모두 공유된 기호를 필요로 한다. 인유와 패러디 역시 자주 혼동되는데 인유는 상응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차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패러디와는 다르다. 그러나 아이러닉한 인유는 패러디에 가깝다. 또한 패러디와 풍자는 가장 혼동하기 쉬운 용어들인데, 풍자는 그 목표가 사회적 도덕적 개선에 있다는 점에서 권외적이고, 패러디는 다른 담론의 텍스트를 겨냥, 반복한다는 점에서 권내적이라고 할 수 있다.*(Linda Hutcheon, A Theory of Parody, 번역본 p.73) ● 이렇게 패러디와 혼동되는 개념들은 모두 '의도'의 문제의 개입여부로 패러디와 구분된다. 바흐친의 경우 패러디를 단지 은유적 의미에서의 인용으로 보고 있다. 마가렛 로스의 경우 패러디를 "희극적 효과를 내면서 이전에 형성된 문학적 언어를 비평적으로 인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린다 허치언은 이 모든 정의 속에서 "패러디로서 한 텍스트를 언급하는 것과 인용으로서 텍스트를 언급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패러디와 인용은 모두 '초맥락화'시키는 형태이므로 문맥의 모든 변화가 해석상의 차이를 필연적으로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계속하여 그녀는 패러디는 단순한 인용이나 인유보다 강력한 양텍스트적(bitextual) 결정성을 지니며, 이는 반드시 차이를 전제 혹은 유도해야 하고, 또한 아이러닉한 인유는 보다 패러디에 가까운 것이라고 본다. ● 2. 패러디와 패스티쉬(혼성모방) ● 패러디는 자주 패스티쉬와 혼동되며 그 구분이 어렵다. 패스티쉬는 타 작가의 작품으로부터 거의 변형됨이 없이 차용되는 것으로서, 주로 구(句), 모티브, 이미지, 그리고 에피소드 등으로 구성된다. 표절과는 달리 표면상의 일관되고 고답적인 세련된 효과를 지향하는 패스티쉬는 남을 속이려고 하지 않는다. 패러디와 패스티쉬는 양쪽 모두 인정된 차용이지만, 패러디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에서 변형 혹은 각색이고 패스티쉬는 피상적 모방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또한 패스티쉬라는 개념은 패러디에 보이는 바와 같은 희극적인 불일치의 느낌은 수반하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을 차용(모방)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만큼 패스티쉬는 별스러울 정도로 포스트모던한 종류의 '무표정한 패러디(blank parody)'라고 보는 견해(프레드릭 제임슨, 현대문학·문화비평 용어사전/콜롬비아대 출판부) 또한 수긍할만한 것이다. 주지하듯 패스티쉬라는 용어는 대체로 프레드릭 제임슨의 에세이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사회』의 영향으로 포스트모던 문화에 관한 논의에서 널리 통용되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패스티쉬는 자기생성적 스타일이라는 관념이 과거지사가 되어버린 시대에 패러디가 도달한 결말이다. 모더니즘의 위대한 실천자들은 모두 이런저런 방식으로 독특한 개성적 스타일의 창조자였으며, 그 스타일은 흉내낼 수 있었고 따라서 은근히 가지고 놀 수도 있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 전에는 아방가르드였던 그러한 실천이 사회전체의 조건이 될 만큼 사회생활이 단편화되었다. 그래서 확고한 참조점이나 정상이라는 개념이 없어졌고 패러디도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그 패러디를 대신하는 것이 이 새로운 형태의 비(非)패러디, 즉 패스티쉬인 것이다. ● 3. 패러디와 풍자 ● 패러디와 풍자가 혼동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둘다 아이러니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풍자와 패러디가 동일하게 부정적 의미를 내포함으로써 조롱이나 경멸의 에토스를 지닌 것으로 정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패러디의 경우 가장 인기있는 유명한 작품들이 대상이 된다는 점만 보아도 결코 조롱이나 경멸의 에토스만으로 정의할 수 없다. 물론 패러디가 풍자적 목적에 사용되는 경우는 있다. 이 경우 풍자의 대상이 되는 것은 패러디된 작품이 아니라 다른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이며, 패러디는 단지 그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많은 이론가들은 암암리에 패러디가 풍자의 한 형태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같은 사회적, 계몽적 기능을 부여하는 방법은 패러디의 개념을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감이 없지 않다. ● 4. 패러디와 아이러니●패러디의 전경과 후경이 되는 텍스트 간에는 비평적 거리가 암시되며, 이는 통상 아이러니에 의해 표시된다. 패러디의 아이러니가 주는 즐거움은 특별한 유머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상호텍스트적 도약에 독자가 개입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난다. 패러디가 텍스트의 차원에서 확대적으로 작용하는 동안 아이러니는 의미론적 차원에서 축소적으로 작용한다. 이런 구조적 유사성 때문에 패러디는 아이러니를 용이하고 자연스럽게 수사적 장치로 사용한다. 어쨌거나 패러디는 아이러니에 의해 새로운 차원의 의미와 자유로운 환상을 창조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 포스트모던 패러디의 미학적 기능 ● 오늘날 야기되는 패러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창조방법 중 하나로서의 연장선상에서 고구되어야 한다. 마이클 뉴만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 창조 전략을 트랜스아방가르드, 저자의 죽음, 알레고리, 도취와 불가사의, 브리꼴라주, 모조, 패러디 등 여덟 가지로 분류하며, 또 다른 학자들은 패러디(린다 허치언), 모조(보드리야르), 차용(레오 스타인버그), 그리고 혼성모방(프레드릭 제임슨) 등을 주요 창조방법이나 특성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어쨌거나 패러디는 포스트모던의 지지자나 반대자 모두 포스트모더니즘의 요체로서 간주되어온 것만큼은 사실이다. 이처럼 후기 산업사회의 재생산 방식에 대응하는 양식으로서의 패러디는 과거 원전들의 고유성과 관습적 규범들을 고의로 파괴하는 예술적 전략이며 문제적 복제 형식이다. 과거와의 비판적 대화양식이라는 점에서 패러디는 고정된 기존 관념이나 과거의 고정된 전형들을 깨뜨림으로써 오히려 형식과 담론 사이의 관계를 갱신하는 긍정적 변화 곧 '쇄신'의 징후이기도 하다.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생적 수단으로 폄하되고 주변화 되어왔던 패러디를 주류적 장치로 새롭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 이러한 패러디는 예술적 독창성과 유일무이성 그리고 자본주의의 소유권, 재산권에 관한 개념들 같은 인본주의적 관점을 검증한다. 즉 패러디에 의해 희소성이 있고, 유일하며, 가치 있는 진품성은 여지없이 의문시된다. 이것은 예술이 이제 그 자체의 의미나 가치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새롭고 다른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패러디 작품은 '재현의 정치학'(Linda Hucheon, The Politics of Postmodernism, p.94)을 전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포스트모던 패러디에서 공인된 관점은 아니다. 지배적인 해석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과거 형식들을 자유롭고, 장식적이며, 반역사적인 방식으로 인용할 수 있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각종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현사회의 가장 적절한 문화적 모델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렇듯 근대의 자아반영(self-reflexiveness)의 중요한 형식으로 포스트모던 패러디는 낡은 형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해방의 기능으로서 현대 예술의 근본적 변화를 야기시켰다. ● 패러디와 최근의 경향 ● 패러디는 더이상 새롭지 않다. 앞으로 어떤 식의 패러디가 등장하더라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불감증에 걸려있어서가 아니라 등장하는 작품들이 너무나 미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패러디는 새로운 힘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은 아무리 언급해도 지나침이 없다. ● 해외에서는 일찍이, 1978년 뉴욕의 휘트니 뮤지엄에서 「예술에 관한 예술(Art about Art)」이라는 전시가 있었다. 이 전시는 현대미술에서 다른 작가의 작품을 전체적, 부분적으로 차용하는 것을 과제로 삼은 작품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며, 또 미술사에서 다른 화가의 작품을 차용하는 일이 얼마나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는지를 조명하는 전시였다. 우리의 경우, 92년에 있었던 '창작과 인용'(무역센터 현대백화점 미술관 개관 4주년 기념전)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전략으로서의 패러디를 비롯한 패스티쉬 등의 방법론을 다룬 첫번째 전시였다. 그러나 그 전시는 본격적인 의미에서 패러디와 패스티쉬를 비롯한 인용과 차용의 문제를 한국미술과의 연관속에서 심도있게 다루었다고 보긴 좀 어렵다. 이를테면 당시의 한 때의 패션과도 같은 양태의 것으로, 개별 작품의 미술사적 의미와 성과, 그리고 비평적 평가에 대한 논의가 유보된 채 이루어진 아쉬움이 있었다. 10여년이 지난 오늘, 또 다시 '서양미술사'라는 제목으로 현대미술에서의 차용과 모방의 문제를 다루는 전시가 열린다. 각 작가의 개성만큼 다양한 방법론이 보여질테지만, 어쩌면 그것이 철지난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며, 여전히 패러디와 패스티쉬, 차용이나 인용, 인유 등의 개념이 혼동된 채 사용될 소지 또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반예술'(선행하는 것에 대한 부정, 패러디화, 한국 고유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출발한 젊은 작가들이 패러디의 고정된 개념을 확장시켜, 앞선 이론을 능가하는, 우리시대의 예술이 요구하는 바에 부합 혹은 초월하는 새로운 다양한 작품으로 거듭날 때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 유경희

Vol.20000208a | 서양미술사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