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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제(Objet)로부터 쉬제(Sujet)로 ● 이재삼의 작업은 출발 이후 내내 세계를 언급하고자 했고, 그렇게 해왔다. 그의 화폭은 자주 자신이 몸담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의 사유였고, 성찰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사유의 시원, 성찰의 귀결은 거의 언제나 발견된, 즉 우연히 입수된 '오브제(Objet)'들이었다. 손상된 파편들, 하찮은 일상의 작은 진실들, 그것들이 언제나 이재삼의 세상읽기의 입구이자 유일한 출구였다. 나뭇가지며 그 뿌리이고, 돌이기도 했던 그것들은 당시 작가가 유일하게 운용할 수 있었던 철자요 문법이기도 했다. ● 작가의 자리는 언제나 그 파편들의 대변(代辯) 뒤였다. 주관의 진술은 오브제의 객관적 그것들을 슬쩍 피하면서 우회적이고 간접적으로만 개입되었다. 오브제들의 절제된 조합 사이의 공백으로부터, 그리고 흑연의 편집적 윤기로 조율된 어둠에 의해 암시될 뿐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이같은 세계를 들어 「신비의 대지, Land of Mystery」로 칭하곤 했는데, 사실 이 신비로움은 역설적이게도 사물의 개관성과 명징성에 의해 전적으로 지지되고 있었던 것이다.단 몇몇의 오브제, 자연의 소산이며 우연히 작가의 수중에 입수된 그것들로만 유일하게 이정표를 삼는 이재삼의 세계는 평론가 김영재의 "물(物)자체의 주장을 극대화하는데서 출발하는" 그것에 다름 아니었다(1988). 같은 문맥에서 평론가 이재언도 그의 세계가 "자신의 이상과 의식을 대상에 집요하게 투영시키는"과정에 다름 아님에 주목한다(1990). ● 극대화된 물(物) 자체의 주장 안에서 정작 작가 자신의 의견은 드물게만 주장되었다는 사실에 밑줄을 그을 필요가 있다.(어쩌면, 자신을 드러내는데 있어서조차 역사적이거나 동시대적인 매개를 경유하는 것이거나) 물론 매우 제한적이긴 하지만, 오브제의 객관성에 대한 주체의 침입이 전무하지는 않았다. 작가는 우연하게 입수된 나무뿌리의 한 모서리를 날카롭게 하거나, 표면 전체를 매끈하게 연마하기도 하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도상학적 체계 안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했었다. 그렇더라도, 나뭇가지는 나뭇가지의 설화를 맴돌고, 돌도 자신의 역사를 웅변할 뿐이었다. 오브제의 표면에 상처를 내는 동안에도, 작가는 물자체의 그 객관성의 결정적인 가해자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고작해야 소개자이자 기록자고, 그다지 엄격해 보이지는 않는 관리자 정도일 수밖에. 중요한 것은 그의 경험이 양보적으로만 고백되었다는 사실이고, 입수된 오브제에 등재되는 한에서만 고백될 권리를 가졌다는 점이다. ● 그러나 90년대초로 들어서면서 이재삼의 '세계읽기'는 더 이상 오브제의 매개를 경유하지 않는다. 사실이지 오브제는 자신의 과도한 명증성으로 시간과 역사의 추상성으로부터 너무 쉽게 추방당하곤 했던 것이다. 오브제는 자신의 시간을 입증할 뿐, 이재삼의 시간을 대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드러나는 것으로 판단될 뿐인 세계가 사물의 세계이므로, 본질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사실들에게 사물은 적절한 수단이 아니었던 것이다. 핏기없는 창백함, 주체로부터의 이탈, 혼과의 결별, 그것이 사물의 모습이고, 그것으로는 지금 이재삼의 눈 앞에서 진행되고 뒤통수에서 와류되는 세계의 총체성, 역사적 전체를 지시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1992년으로부터 이후 몇년간, 우리는 이재삼의 사유체계에서 일어난 이같은 일련의 변화를 목격할 수 있다. ● 바로 이 즈음, 즉 이재삼이 작품의 문패에 「에필로그(Epilogue)」를 적기 시작하고 있을 1994년 무렵, 평론가 이종숭은 그의 이미지로부터 '자기환원적'이라는 의미심장한 형용사를 포착해낸다. 자기환원적, 혹은 자신으로의 회귀, 이를테면 보다 자기적인 경험으로의 천착... 우리에게 이재삼의 이 자기환원적 경향은 (이종숭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중요한데, 왜냐하면 작가는 어느 정도 오브제로부터 후퇴하는 동안 파생된 잉여공간에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만 독해 가능한 일련의 사진 이미지들을 개입시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브제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는 정확하게 그만큼 주관적 경험이 침투해 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1994년 집중적으로 보여졌던 「어느 공간을 위한 에필로그」 시리즈였는데, 여기서 이전에 객체들에 할애됐던 자리의 절반은 이미 어떤 주체들의 이미지로 대체되어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후 이재삼은 자신의 과천 아틀리에에서 더 이상 '오브제(Objet)'에 의해 지지되지 않는, 전적으로 '쉬제(Sujet)'로 가득 찬 초상, 일련의 '독단적 드로잉'들을 제작하고 있었다.
꼴라쥬(Collage)에서 드로잉(Drawing)으로 ● 오브제(Objet)에서 쉬제(Sujet)로의 개종이 있은 후, 이재삼의 작업은 '붙이기' 대신 '그리기'에 의해 진행된다. 세계와 역사의 참조는 더 이상 오브제로부터 제공되는 대신, 화폭 내부로부터 발생되고, 우연히 발견된 것들로부터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손끝에서 생성된다. (작가는 더 이상 관찰자나 선택자가 아닌 생성자요 창조자인 셈이다) 사실 드로잉의 저변이 무엇이던가? 질료와의 일차적 소통이자 무엇보다 화폭과의 대화가 아니던가. 이 때 화폭은 외부에서 고정되고 일방적으로 통보되는 그런 진실의 매개자인 대신, 그 자체가 하나의 심연인 어떤 것으로 된다. 단지 가시화되지 않았을 뿐인, 그러나 무한한 진실을 그 안에 잉태하고 있는 자궁으로. 이렇게 해서 오브제와 꼴라쥬로부터 드로잉과 화폭으로의 전이는 화폭의 내부며 근육의 미말로부터만 분비되는 어떤 더 긴밀한 진실들의 계통학을 허락한다. ● 물론 작가의 드로잉은 여전히 무언가를 선택한다. 「저 너머」로부터의 아내와 소년들, 그리고 다른 것들로부터 하나의 앵글을 선별해낸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는 그 불가피함, 혹 우회의 불가함으로 인해, 이미 선택인 대신 필연에 다름 아니다.('우연히' 입수된 오브제들에 기댔던 이전과 비교해 보라) 이재삼은 이전엔 조심스럽게 정의하고자 했던 그것들을 이젠 정의가 결여된 채로 제시한다. 불가피함이 용인한 담담함으로. 혹은 당당하게 목탄과 화폭의 거친 마찰을 기대하고, 머릿결과 털 쉐터의 그 선명한 식상함들과 마주한다. 분명한 것은 이러하다. 이제 그의 이미지는 (적어도 작가 자신에겐) 그것이 아니고선 세상의 모든 진술이다 무용한 그런 진실의 필연적인 경유지인 것이다. ● 이재삼의 세계는 이제 단 하나의 필연인 단 하나의 이미지로 충분하다. 이전에 몇몇의 오브제로 분산됐던 빛은 이제 그것이 아니고선 자신의 규명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를 비추고, 그 외의 다른 메시지들은 더 이상 부름을 받지 못한다. (작가의 세계가 흑연으로 조율된 어둠 속에서 언제나 절제를 표방해 왔음은 물론이지만) 이 단 하나의 이미지로만 조건 지워지는 미학은 단순한 절제 의미를 넘어 독단으로 나아간다. 여타의 어떤 수평적 참조들도 불허하는 것으로서의 독단성, 세계의 등가물인 대신 주체의 고백을 배회할 뿐인 독아론. 여기 어디에도 세계는 (그가 이전에 그토록 집착했던) 없고, 역사도 (마찬가지로 그토록 규명하고자 했던) 부재할 뿐이다. ● 그렇다면 이재삼의 드로잉, 그것은 바로 세계와 역사에 대한 보편적 이해를 포기한 댓가로 얻어진 자기인식의 어떤 '이해 불가능성'의 차원이 아닐런지? 전술한 자기환원성이고도 더욱 독단적이고 집약적인 자기환원성, 이를테면 푸코적 의미의 '절대적 밀집성'! ● "모든 담론의 형식을 한 마디 말로, 모든 서적을 한 쪽의 페이지로, 전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재통합하기, 혹은 사상은 그 자체의 총체성 내에서 그 자체를 한번 더 밝히게되어 있다는..." ● 그리고 단 하나의 초상만큼이나 단 하나의 풍경으로 세상 바라보기. 설화를 구성하거나 세계를 설명하지도 않으면서 신화나 몽환으로부터도 아닌, 그런 단 하나의 존재, 단 하나의 앵글에 의해. 혹은 거대함의 단독자가 초대하는 비역사적인(혹은 초역사적인) 차원, 과거의 부름도 없고 미래의 요구도 없는 시간의 즉자적인 단절 혹은 정지에 의해. ● 이재삼의 독선적 앵글, 배경을 지니지 않는 인물과, 존재를 등장시키지 않는 배경을 이 '절대적 밀집성', 혹 '한 순간의 통찰'과 유비하는 것은 과한 비약일까? 어떻든 분명한 사실은 지금 이 독선적 공간과 정지된 시간이야말로 세계와 역사에 관한 이재삼의 최대한의 메타(Metapher)설화라는 점이다. ● 지금 작가는 역사를 진술하는 대신 생성하고 있다. 세상의 설화를 옮겨 적는 대신 구성해내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시간과 공간의 모든 객관화된 매개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방식을 배워 나가고 있다. 영원히 객관화되지 않을 공간인 캔버스를 더 의존하고, 단 하나의 필연인 어떤 현존을 끊임없이 확대시켜 나가는 방식을 말이다. 여기서 전술한 '독단', 즉 '모든 정의들을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지식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그런 의미의 독단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이를테면 이해하려고 하는 대신 알 수 없는 것을 그대로 제시하기'로서의 독단, 혹은 니체적 의미의 '능동적인 잊기' 혹은 푸코가 말한 바 있는 '모르기의 구체화'... ●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 이재삼은 자신의 능동적인 잊기를 통해 수동적인 지시하기를 반추해내는 것이며, 자신의 '모르기'를 들어 이전의 '알아가기'의 오류를 직시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이 독단의 불가지적 담화들이 철학적으로 준비되어온 하나의 언어로 소통되기를 고대하면서 말이다. ■ 심상용
Vol.20000106a | 이재삼展 / LEEJAESAM / 李在三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