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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 / 1999_1217_금요일_04:00pm_대강당
서남미술아카데미1999 마지막 강연회 강연자 / 김상철_한국화의 회고와 전망
서남미술아카데미1999는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으며, 수강료는 없습니다.
서남미술전시관_폐관 Seonam Art Museum_closed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23-8번지 동양증권빌딩 1층 www.seonam.org
지났다. 지나버린 것이다. 그림이라는 것이 무언가를 그리워하기 위해 그려지는 것이라면 그 그리움의 시효時效가 끝나버린 것이다. 기억 속에서 이미 잊혀져 버린 것들을 애써 되살리려는 안타까운 마음은 화폭畵幅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든다. 그래서 머릿속 생각들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화폭만은 되살려야겠다는 환쟁이의 욕심慾心이다. 시효가 지난 그리움은 더 이상 구체적이지 않기에 새로운 그리움의 대상對象을 찾으려 노력해 본다.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점점 더 빠르고 어지럽게 진행되는 세상사世上事는 오히려 과거過去만 못한 것들이 태반太半이다. ● 우선 어렴풋한 과거의 그리움으로부터 벗어날 생각으로 꾀를 부려 보았다. 여지껏 그리움에 빠져들게 했던 과거의 대상이 무의미無意味해진다면 애타게 그리워하며 수많은 날들을 지새웠던 당사자當事者만 덩그마니 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화폭에 그리움의 대상이 아닌 여지껏 그리워했던 그 당사자를 추스려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워하는 당사자를 화폭에 그림으로써 그 그리움의 대상을 유추幼雛할 수 있겠다는 속셈이다. 그리움의 당사자는 대상과 달리 무척 구체적이다. 그리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대인 까닭에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 수묵화水墨畵 그리고 채색화彩色畵. 시간의 속도速度에 버거워 하는 것은 굳이 이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남한의 시각 이미지 생산에 있어 거의 모든 장르가 세상世上의 변화變化를 힘겨워 한다. 전통傳統이냐 현대現代냐를 따지기 이전에 우리는 이미 전통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기억할 만한 것들을 담아내지 못하고 모두 폐기廢棄시켜버린 지금 전통에 대한 그리움은 그저 막연漠然하기만 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을 추스려 보지만 보잘 것 없음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궁여지책 窮餘之策으로 생각해 낸 것이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라 그리워하는 당사자인 것이다. 그 당사자는 어찌되었건 분명 어제로부터 오늘을 살고 있는 까닭이다.
아직도 저 푸른 초원 위에 흐드러진 풀꽃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이김천의 화폭에는 과거도 현재도 아닌 애매한 시간時間들이 담겨져 있다. 그리움의 대상도 그렇다고 당사자도 아닌 것들이 복잡하게 꼬여 넝쿨처럼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촘촘하게 '흐드러진 꽃'들이 서로 얽혀 있다. 얼핏 초원을 그리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그 풀꽃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풀꽃들이 기다리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그곳에 머물다가 떠나가 버린 것일 수도 있고, 아직 모습을 보여준 바 없는 전혀 새로운 것일 수도 있다.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설래임이 함께 섞여있는 풀꽃밭이 알록달록한 화폭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풀꽃밭의 밀도 때문에 때로는 이로써 그림이 마무리될 수도 있겠다는 성급한 생각을 해보지만 분명 이김천의 풀꽃밭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장소場所로써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기다리던 주인공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기약도 없이 떠나버린 것들이나 언제 올지 모를 무엇인가를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은 무척 허기虛氣가 지는 일이다. 만약 주인공이 화폭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었다면 풀꽃밭에 그리 집착執着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주인공이 부재不在한 화폭에서 주인공을 향한 뼈저린 애정이 풀꽃밭으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때로는 섬세하고 때로는 징그럽게 흐드러진 풀꽃밭은 그 그리움의 뚜렷한 증거證據로 화폭에 존재存在한다.
이제 견공犬公으로부터 세월을 호흡하는 법을 배운다. 어느날 풀꽃밭에 견공이 들어왔다. 세상사란 원래 그렇고 그런 것이니까 속편히 생각하라고 타이르는 듯한 견공의 표정表情은 정말 '개팔자가 상팔자'다. 이 견공은 그리움의 대상이 아니다. 즉 풀꽃밭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풀꽃밭에 드러누운 견공은 그리움의 대상을 애타게 그리워했던 바로 당사자의 모습이 감정이입感情移入된 것이다. 어차피 그리움이라는 것이 쌍방이던 한쪽만이든 대상과 당사자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떠나버린 화폭에는 나머지 한쪽인 당사자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사자는 화폭에서 억척스럽게 살아온 지난날들을 보여주려 한다. ● 견공이 드러누운 풀꽃밭은 이제서야 장식裝飾이 아닌 장소場所로써 기능을 발휘한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갔음을. 그리움의 시효가 지나버렸음을 다시한번 각인刻印시킨다. 이제 될 대로 되라지. 마음이 훨씬 편해졌다. 새로 태어난 강아지들과 포근한 한때를 지내고 있는 견공은 지난날의 고달픈 기억記憶들을 무색無色하게 만든다. 이제야 편안하게 오늘과 내일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과거도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젊은날의 삶이란 과거를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먹고사는 것이라는 것을 견공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던 까닭이다. ■ 최금수
Vol.19991215a | 이김천展 / LEEGIMCHEON / 李金泉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