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시간

사진 속의 시간과 의미 생성   한국영상문화학회 제7회 워크샵 발제문 / 이영준

한국영상문화학회 www.kavic.org

● 이 글은 지난 11월 13일날 있었던 한국영상문화학회 제7회 워크샵에서 발표된 글로 필자의 동의을 얻어 게재합니다.

사진을 만드는 것은 찍는 순간의 시간의 정지와, 그렇게 해서 고정된 이미지의 지속이라는 두 상반된 계기이다. 사진의 발명에 가장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은 카메라 옵스쿠라를 통해 맺힌 상을 화학적 합성물을 통해 고정시키는 문제였다. 이때부터 사진에서는 인간과 시간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것은 사진을 찍는데 걸리는 시간(즉 셔터 속도)을 단축하고, 찍힌 사진의 이미지가 변질되지 않고 남을 수 있는 시간을 연장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사진의 초창기에 니엡스가 찍었던 사진이 8시간의 노출을 요구하는 것이었던 데 반해, 오늘날의 가장 발달한 카메라가 1만2천분의 1초까지 찍을 수 있다는 것은 시간의 의미 자체가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디지털 이미지 등 첨단 매체가 발전해도 사진이 계속 남는 이유는 바로 이 정지와 지속의 변증법 때문이다. ● 사진을 통해 시간을 정지시킨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시각적 무의식'을 드러내 준다. 즉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반드시 시각적 무의식의 개념 속에 들어 있는, 고속도 촬영이나 저속촬영, 클로즈업 촬영같이 독특한 기법을 통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아주 평범한 사진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대상의 이미지가 가지는 총체적인 의미를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볼 수 있게 해준다. 지난 3월에 열렸던 오형근의 「아줌마」 사진전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사진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줌마를 가까운 거리에서 그렇게 빤히 들여다 볼 수 없다. 그러나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 그리고 그 결과물인 사진을 보았을 때, 우리는 아줌마를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특권을 얻는다. 사진은 우리에게 최초로 아줌마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아줌마는 그냥 우리 주위에 있거나, 우리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아줌마는 한번도 그렇게 딱 정지해 본 적이 없다. ● 여기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대상의 모습을 정지해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는 사진이 비디오나 영화와 뚜렷이 구별되는 지점 중의 하나인데, 대상의 모습을 정지해 봄으로써, 우리는 대상에 대해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이는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관찰만이 아니라, 미적인 관찰도 말하는 것이다. 이때 카메라에 찍힌 대상은 대상 그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정지해 있는', 즉 이 세상에는 사진 속을 제외하고는 있을 수 없는 상태의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사진은 대단한 사건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에 대해 새로운 감각을 부여해 준다. 즉, 사진 속에서 시간은 그냥 막연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단절되기도 하고, 이어 붙일 수도 있으며, 연장할 수도 있는 것으로 처리된다. 사진에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시간의 계기는 그러나 묘하게도 그 반대의 극을 향해 있다. 그것은 사진의 초현실적 특성이다. 사진이 시간을 정복함에 따라, 즉 더 빠른 셔터속도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됨에 따라 사진적인 특성이 나타나게 된다. 그 사진적인 특성이란 바로 우연성의 개입, 초현실적 화면구성 등을 말한다. 순간적인 이미지에 우연성이 개입해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사진찍힌 사물이 스스로를 구성할 수 있고, 카메라는 마치 자동기술법(automatism)에서처럼 인간의 의도나 주관적 의식의 개입 없이 사물의 이미지를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진의 속도는 사물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이 스스로 준비를 하기 전에 그것을 포착해 버림으로써 사물에 어떤 코드가 씌워지는 것을 막아버린다.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진이 위험하다고 말한 것은 아마도 이렇게, 사진이 인간을 편안한 의사소통의 세계에 담아주는 코드를 벗어나서 사물을 그대로 인간에게 부딪히게 만들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사물을 몇만분의 일초에서 백만분의 일초에 이르는 극히 짧은 순간에 사진 찍은 해롤드 에저튼은 MIT에 실험실을 가지고 있는 과학자였지만 어떤 예술가보다도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 그러나 이러한 속도는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차원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항상 역사라는 계기가 들어 있다. 우리는 사진 속에 구체적인 역사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즉, '1950년 11월 3일에 경기도 연천에서 찍힌 사진'이라고 인식한다. 우리가 그 사진 속의 사건을 이해하고, 거기에 공감하거나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잇는 것은 그 시간과 자신의 시간을 동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 속의 시간은 우리가 동일시할 수 있는 시간이다. 사건이나 내러티브의 전개순서가 그것이다. 그러나 어떤 영화의 시간은 우리가 동일시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에서 나쁜 놈들이 어린애를 죽인 다음 방안에서 약 5분간 아무런 장면의 변화 없이 그 아이의 부모가 흐느끼는 장면이 있는데, 그 5분간은 일반관객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시간이다. 그 5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생각하는 5분과 질적으로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시간도 우리에게 그렇게 주어져 있다. 역사 속의 시간은 수 많은 이질적인 계기들과, 그것들 간의 모순적인 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역사 속의 시간이 우리에게 자동으로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과거의 역사시계와 오늘날의 역사시계를 일치시켜주는 장치의 도움이 필요하다. 사진의 내러티브가 그런 일을 한다. ● 바르트가 사진의 특성을 "지금, 여기"에서 과거에 한때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을 때, 사진과 역사의 관계를 이루는 내러티브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시간의 문제이다. 즉 다시 말하면, "역사시간은 어떻게 구성되는가?"하는 문제이다. 역사시간은 그냥 우리에게 과거로부터 물이 흐르듯이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관점에서 항상 구성되는 것이다. 즉, 역사시간은 현재를 현재화하고, 과거를 과거화함으로써 구성된다. 즉 사건성을 끊임없이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그 역사시간의 구성은 "한때 있었던" 현존, 혹은 사건성을 환기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필요로 하고, 사진은 그 필요를 충족시켜 준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에서, 바르트가 문제시한 바로 그 실증적인 역사기술의 (불)가능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건의 크고 작음을 구별함이 없이 모든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얘기하는 연대기 기술자는 다음과 같은 진실, 즉 이 지상에 언젠가 일어난 모든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역사에서 주목되어야 한다는 진실에 공정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과거가 완벽하게 기록될 수 있는 것은 인류가 구원되고 난 연후이다. 다시 말해 구원된 인류만이 그들의 과거의 하나 하나를 남김없이 인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인용문에 따르면, 인류가 구원받기만 한다면 과거를 완벽하게 기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구원은 어떤 형태로 오는가? 그것은 항상 승리자의 관점에서만 기록되었던 역사기술에서 억압되어 있던 담론들이 풀려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벤야민 특유의 '정지상태의 변증법'이 작용한다. 흔히 변증법은 역사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는 모델로 설명되어 있고, 시간의 축을 따라 전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벤야민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점진적인 완성이나 발전이 아니라 갑작스런 충격과 정지, 혹은 파편화이다. "보편사의 방법은 첨가적이다. 그것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사실의 더미를 모으는데 급급하다. ... 사고에는 생각의 흐름만이 아니라 생각의 정지도 포함된다. 사고는, 그것이 긴장으로 충만된 사실의 배열 속에서 갑자기 정지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사실의 배열에 충격을 가하게 되고 또 이를 통해 사고는 하나의 단자(單子, Monade)로서 결정화된다." ●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시간은 동질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실들의 집적이 만들어낸 어떤 것일 뿐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 새로운 역사시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단지, 최근의 한국의 상황에서는 역사시간은 강력하게 과거로 회귀하는 성향을 띠고 있음은 확실하다. 요즘 건축이나 카페의 실내장식, 의복 등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폭넓게 나타나는 복고적인 경향은 실증주의적인 역사시간 마저도 부정하고,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한국적인 역사시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거기다가 '한국적인 역사시간'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연대기나 박물관, 역사교과 등의 체계를 통해 역사시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관리한 서구에서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1990년대 말이라는 시점에 여러 가지 요인들의 복합에 의해 갑자기 1950년대, 60년대라는 과거가 현재의 시점에 점프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미지들이 보는 이에게 요구하는 것은 과거로의 침잠이다. 그런 한에서, 그런 이미지들은 나름대로는 구원에 대한 갈망을 품고 있다. 즉 60년대가 1999년에 대한 대안으로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시간은 아무도 시간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즉 그것은 60년대의 공간으로만 인식되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최근의 복고적인 경향들은 불건강하다. ● 그것에 비하면 역사적 담론을 이루는 사진들을 보면서 그 의미들을 읽어내는 것은 과거로의 침잠은 아니다. 물론 그런 이미지들도 복고적인 역사시간의 구성물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가 사진과 역사의 취약한 상호의존성에 대해 비판했던 맥락과, 또한 벤야민이 공허하고 동질적인 역사시간을 비판했던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이 사진들을 본다면 과거는 우리에게 확정된 명징한 내러티브를 강요하는 지식의 권력으로서도 아니고, 복고적인 침잠으로서도 아닌, 비판적 읽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역사의 사진을 어떻게 비판적 읽기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는가? 그것은 스티븐 밴이 말했듯이, 역사기술을 이루는 다양한 수사들을 협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질성들을 살려냄으로써 가능해 진다. 예를 들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진은 "19XX년에 일어난 무슨 사건에서 누가 무엇을 하는 모습"하는 식으로 단선적으로만 의미가 규정된다.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객관적인 역사라는 프레임이다. 그러나 우리는 프레임의 사고를 탈피하여, 사진을 모호하고 이질적인 담론들의 복합체로 봄으로써 사진을 특정한 방향으로만 해석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즉, 역사의 사진은 거대담론에 속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기록으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잘해 보이면서도 중요한 사항들, 예를 들어 페르낭 브로델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썼듯이, 일상성이라든가 유행에 대한 기록으로서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기록'이라든가 '증거'와는 다른 패러다임을 써야 한다. 즉 사진을 기록이나 증거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진의 프레임 바깥에 있으면서 사진의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을 규정해 주는 요소들을 간과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사진의 프레임 '속'에 들어가 있는 발화의 내용들 뿐 아니라, 사진이 발화(發話)하는 형식, 제도적 틀, 그것들이 사용되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은 이미지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이미지를 둘러싼 담론적 구성체이다. 즉 이미지의 정당성을 지지해주는 여러 체계들의 복합체이다. ● 따라서 우리가 사진에서 역사라는 시간의 계기를 본다고 했을 때, 그것은 세가지 다른 층위의 구성에 대해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진을 역사의 기록으로 볼 뿐 아니라, 그런 기록의 역사, 다시 말하면 어떤 사진의 기술과 형식이 어떤 시각의 기록을 가능케 하였고, 그런 기록은 어떤 경로를 거쳐서 신빙성과 진실성을 인정받게 되었는가, 나아가서 그런 기록은 어떤 경로를 거쳐서 독자에게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다른 층위의 역사에 주목해야 한다. ● 그러나 우리가 교과서나 박물관에서 보는 공식적인 역사는 끊임없이 불안한 상태에서 떨고 있는 역사의 단자들에 담론의 권력을 행사하여, 그중 어떤 것을 진리의 수준으로 격상시키고, 나머지 것은 배제함으로써, 다의미성을 단선적인 의미로 축소시키고, 떨림을 정지시킨다. 그런 담론의 제도를 통해서 알려진 역사가 어떤 종류의 프레임을 통해 규정되고 있는지 인식함으로써만 역사는 구제되기 시작한다. 즉 이 프레임은 공간적인 것만이 아니라 시간적인 프레임이기도 하다. 그런 인식이 가능할 때 사진 속의 시간은 지겨운 동질성으로부터 풀려나, 이질적이고 다양한 시간으로 인식되게 된다. ■ 이영준

Vol.19991117a | 사진과 시간-사진 속의 시간과 의미 생성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