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미술관 KUMHO MUSEUM OF ART 서울 종로구 삼청로 18(사간동 78번지) Tel. +82.(0)2.720.5114 www.kumhomuseum.com
존재의 근원에 대한 탐구 ● 김대수는 근 30년 가까이 사진을 통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찾고 있다. 그가 자신의 사진을 모아서 전시를 하는 것은 관객들과 더불어 그 무엇을 같이 찾아보자는 제안일 것이다. 그가 사진 속에서, 아니면 사진을 통하여 찾고 있는 것은 사진에 나타나는 사물과 물질의 일회적 현존성을 넘어선 삶의 지속적인 가치이다. 이전의 작품에서 그는 그 지속성을 태초의 시간이라는 아주 까마득한 지점에까지 끌고 들어갔다. ● 그런 그가 이번에는 대나무와 별의 이미지를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대나무와 별이라는 단순한 풍경일까. 몇 년 간 김대수의 작업 추이를 지켜 본 사람이라면 그가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96년까지 사진 이미지 위에 긁힌 자국을 낸다든가 동판을 부식시켜서 이미지를 찍는 등, 소위 '만드는(fabricated)' 사진을 하다가 최근에는 그냥 카메라를 곧바로 들이대는 '스트레이트한' 사진을 찍는다는 것에 대해 좀 의아해 할 것이다. 우선은 그간에 한국의 사진가들이 현대사진의 중요한 구별점인 것처럼 잘못 생각해 온, 만드는 사진과 찍는 사진과의 구별이 잘못된 인식론적 기초 위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만을 말해두자. 그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소위 찍는 사진에도, 기술적인 가공과정에서부터 의미의 가공과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만드는' 단계들이 개입해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이트 사진의 미학의 시발점으로 평가되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삼등선실」이라는 사진도 그 사진의 가치를 수립하고 인정해 주는 담론의 체계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인정받는 것이다. 파인프린트라는 '버릇'에서부터 스트레이트 사진이라는 '체계', 카메라워크라는 '제도'등이 어울려서 만들어진 것이다. ● 그러나 지금 김대수의 작업을 들여다보는데는 그런 잘못된 구분을 바로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들어 있다. 즉 그의 작업의 단층과 지속성간의 나선형적 관계이다. 예전부터 김대수가 사진을 통해 추구해온 것은 존재의 근원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즉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캐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를 의미 있게 해 주는 것이 무엇인지, 과거의 시간을 오늘의 시간과 연결시켜 주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캐보고 싶은 것이다. ● 그가 과거에 회화적, 판화적 기법을 사용한 것도 단순하게 다양하고 새로운 형식실험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로 하여금 좀더 존재의 근원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운반체(vehicle)로서의 매체를 찾은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이냐 회화냐 하는 구분도 김대수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 사진가가 다른 매체에 손을 대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김대수의 작업에서 매체의 표면, 혹은 매체의 분류를 보지 말고 그 속에,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는 마이너 화이트 같은 사진가에게서 영향도 받았고 영감도 얻었지만, 김환기나 박수근 같은 화가에게서도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마치 원자로의 가장 깊숙한 곳에 틀어 앉아서 서서히, 그러나 뜨겁게 핵분열을 일으키는 우라늄같이 김대수의 가슴속에 깊숙히 둥지를 틀고 그로 하여금 계속해서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작업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 혹은 욕망은, 도대체 인간의 존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이다. ● 옛날의 김대수와 요즘의 김대수가 차이가 있다면, 옛날의 그는 그런 문제의식 대한 해답을 조개껍질이나 나비, 자신의 데드마스크 등 막막하고 추상적인 이미지 속에서 찾으려 했다면, 요즘은 구체적인 한국의 땅속에서 찾으려 한다는 점이다. 즉 그가 이번에 전시하는 대나무는 예를 들어 전남 담양, 별빛은 영암 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장소에서 그가 찾아낸 것들이다. 이 경우에 그런 땅이 단순하게 사진의 소재를 제공하는 배경만은 아니다. 그런 곳들은 우리 땅에서 우리의 정서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좀더 구체적인 물음과 결부된 존재의 근원을 길어 올리는 원천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까 그의 작업이 지속성과 단층의 나선형을 그리고 있다고 말한 이유는, 김대수의 과거의 작업과 요즘의 작업이 그 소재의 성격이라는 점에서는 멀어 보이지만, 존재의 근원을 추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구심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사실 존재의 근원이란 보통사람들에게는 좀 막연한 문제이다. 존재의 근원까지 가지 않아도 돈 벌 수 있고, 시집, 장가가서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존재의 근원을 따지는가? 더군다나 아주 물질적이고 과학적인 예술인 사진을 존재의 문제와 결부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군다나 그 사진의 대상이 대나무와 별이라는,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존재고 근원이고 가까이 갈 수 없을 것 같은 경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힌트는 별과 대나무는 둘 다 한국문화의 특수성 속에서 긍정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는 대상들이라는 점이다. 즉 우리에게 밤하늘의 빛을 던져 주는, 무한히 멀리 있는 존재인 별과, 우리와 가까이 있으면서 그 꼿꼿함과 절제로 언제나 신선한 느낌을 주는 대나무는 언제나 처음 만나는 것 같은 산뜻한 긴장 속에 서 있다. ● 따라서 그런 사물들에 대해 강하게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카메라의 렌즈 앞에 있는 사물과, 그것을 사진 찍은 사람의 존재 사이에 어떤 복잡하고 강한 연관성을 설정함으로써 긍정적인 함의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은 사진 찍는다는 행위를 가볍게 생각하지만, 어떤 물건이 렌즈에 의해 포착된다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사건이다. 그 짧은 순간에 많은 의미가 생겨난다는 점에서 그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시간 속에 움직이는 사물을 정지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하나의 사건이지만, 또한 그 정지의 순간에 별과 대나무는 우리를 '위한', 우리에 '대한' 별과 대나무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몇 시간 동안의 장노출을 통해서 생겨난 별의 궤적과, 무언가를 저 뒤에 감추고 있는 듯이 보이는 대나무의 줄기들은 그 표면적인 인상은 다른지 몰라도, 밤하늘을 지키는 별빛의 밝음과 대나무의 곧음은 둘 다 우리에게 살아갈 길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 그런데 바로 이런, 상징물로서의 별빛과 대나무를 표현하기 위해서 작가는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작가는 사진이라는 언어가 가진 한계, 즉 그 가능성의 가장자리를 탐색하고 있다. 그것은 막연하게 검은 톤에 대한 형식주의적인 추구나, 심미적인 이미지를 위한 세련된 인화에 대한 추구가 아닌, 대상의 시각적 이미지가 가진 상징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고투였다. 결국 김대수가 이전의 작품에서 회화처럼 보이는 작업을 했던 이유도 사진적 언어의 가장자리가 어디까지인지를 탐색하는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사진과 그 이외의 것과의 경계를 그으려 했다기보다는 그 사이를 넘나들었던 것이다. 반면, 이번의 사진들은 사진의 테두리 안에서 그 언어의 성격을 탐색한다는 점에서 더욱 집중적이다. 김대수가 사진 찍은 대나무는 그냥 대나무의 물질적 특성으로서의 대나무가 아니라 사진적으로 극한까지 해석되고 처리된 대나무의 이미지로 귀결된다. 그래서 그는 대나무의 줄기가 가지는 미묘한 톤을 여러 가지로 조절하고, 심지어는 포지티브(陽畵)를 네가티브(陰畵)로 반전하여 인화하는 시도까지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사물을 항상 포지티브로만 봐 버릇하는 것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실제로 마이너 화이트는 포지티브인데 네가티브로 처리된 것 같이 보이는 사진을 만들기도 했다. 김대수가 마이너 화이트에게서 영향을 받은 점이라면 화이트가 사진의 톤과 콘트라스트의 조절을, 음악으로 치면, 화이트가 한참 활동할 때 활약했던 바이올린의 명인 야샤 하이페츠나 피아노의 명인 빌헬름 박하우스와 같은 정도로 밀도 있고 치열하게 밀고 나감으로써,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를 탐색했던 바로 그 점이다. 따라서 외관상으로는 그저 스트레이트하게 보이는 이 이미지들은 사물의 겉모습을 사진 찍어서 거기에 상징성을 부여하려 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실험적인 시도이다. ● 따라서 김대수의 사진적 실험은 우리가 대나무를 보면서도 대나무 아닌 어떤 것, 그것을 삶의 근원이라고 해도 좋고, 한국적 정서의 끈이라고 해도 좋으며, 아니면 개인적 정서라고 해도 좋을 그 무엇을 볼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그것을 본다는 것은 우리가 상품을 소비하듯이 편안하게 앉아서 알맹이를 빼먹는 식이 아니고, 보는 사람에게 눈으로 볼 수 있는 한계까지 가 보고, 사물에 대한 상상력을 최대한 밀어붙여 보라고 권하는, 뭔가 수고를 요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김대수의 사진 작업은 실험적이다. 그것은 정서의 실험이며 사고의 실험이다. 앞으로 그의 실험이 어떤 경로를 거치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 이영준
Vol.19991027a | 김대수展 / KIMDAESOO / 金大洙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