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디자인문화비평 창간호에 실린 배영환의 글로 안그래픽스와 배영환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미숙아! 받아보렴. ● 지금은 폭풍우 치는 여름밤이다. 정말 죽이는 밤이야. 빗물이 굉장한 바람에 실려와 창문을 때린다. 영화에서나 봤던 그런 바람이란 말이지. 이런 날은 꼭 神이 있을 것만 같다. 작업실 벽에 핀 곰팡이가 늘 형광등 불빛 아래서 파리해만 보이더니 오늘만큼은 자기가 기다리던 빗물을 온몸으로 느끼는 중인지 생기가 돌면서 싱싱해지기까지 하는구나. ● 미숙아! 넌 며칠 후 갑자기 날아든 내 편지에 놀라겠지? 낄-낄. 난 오늘 말이지 기분이 오랜만에 가라앉은 것 같아. 그런 김에 나의 유일한 후원자이자 신봉자인 너에게 넋두리를 좀 늘어놓으려고 펜을 들었단다. 그런데 막상 펜을 드니 후진 나의 내면을 니가 알아 버릴까봐 걱정스럽구나. 하지만 오늘은 폭풍이 무서워인지 마치 계집아이처럼 수다를 떨고 싶은 욕구를 떨칠 수가 없구나. 아무튼 내 수다를 넌 잘 들어주리라고 믿는다. ● 미숙아! 넌 내가 세기의 예술가쯤 되는 줄 알고 있지? 아니야 알고 보면 나 정도의 작가는 수만 명도 넘을 거야. 어쩌면 난 그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흔히 만날 수 있는 불평분자 중의 한 명이란 것이 더 정확할 거야. 아니, 심할 땐 작업은 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하면 잘 할거라는 생각을 너무 오래 한 나머지 자신을 훌륭한 작가로 이미 규정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확신범일지도 몰라. ● 나는 대개 한 달에 반은 예술가로 반은 무능력자 아니면 사회에 대한 불평분자로 살아가고 있단다. 내 주변이 후져서인지 모르지만 대한의 청년 작가들은 대게 그런 걸로 알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대학에 출강하며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며 살고 있지. 말하자면 니가 좋아하는 오직 예술을 실천하는 진짜 예술가는 가뭄에 콩처럼 보기 힘든 셈인 거야. 이게 네가 동경하는 한국 미술계의 미래를 짊어진 청년작가들의 현실이란다. 한심하지? 더 한심한 이야기를 해볼까! ● 이런 한심한 세월을 그래도 미술잡지나 여성지들은 인고의 세월이라고 표현해주기도 하지. 이것을 견디고 나서 좋은 작가란 소리를 듣는다든가 아니면 드디어 강사자리를 뛰어넘어 교수의 반열에 올라간다든지 하면 그야말로 인간 승리가 되는 거지. 유치하지?!. ● 미숙아! 난 니 앞에서 늘 세상의 고민을 다 짊어지고 있는 척 그리고 대한민국 예술의 미래가 내 어깨에 있는 척해 왔지만 사실 내 머리 속의 고민은 천하고 아주 한심하기 그지없어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이 편지를 읽으면 넌 날 떠날지도 몰라. 하지만 언젠가는 들킬 내 모습이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웬만한 건 다 불도록 하겠다. ● 난 오늘 이렇게 비가 퍼 붓기 전 까지는 전시를 마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썰렁하기 그지없는 황량함과 전시기간 동안 전시장을 지키고 앉아 있을 때 피할 수 없이 밀려오는, '내가 이 짓을 왜 했나?'하는 자괴감에 시달렸어. 그리고 그런 감정을 지우기 위해 광신도처럼 열렬히 나의 작업을 스스로 변호하고 칭송하다가 지쳐서 먹지도 못하는 소주를 마시고 말았어. 그리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후배에게 한국 미술의 열악함을 성토하는 척하면서 무명작가의 외로움을 퍼부었지. ● 미숙아! 한국에서 젊은 작가의 인생이란, 더구나 무명일 경우(한국에서 특히 지방에서는 서른이면 동네 이장도 하는데 미술판에서 서른은 사회에서의 중딩이 정도의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다. 물론 몇몇의 천재적인 작가는 제외하고) 그들이 하는 전시는 관객도 없이 치러지는 '3류 사이코 드라마'와 닮은 점이 많아. 너를 꼬실 때 "작가는 말이야 누가 알아주든 말든 간에 세상에 끝없이 무엇인가 송신하는 자야"라고 목에 힘주며 했던 말, 혹시 생각나니? ● 그런데 그런 자신감이란 것은 아주 하찮은 거지. 예를 들면 작업실의 방세를 내야 할 날은 가까워지는데 주머니에 돈은 하나도 없을 때, 비장 처절함 없이는 비참해서 못 견딜 때, 그 고통을 예술혼으로 승화시켜 생활고를 견디려 할 때, 그럴 때 쓰이는 임시방편의 진통제일 뿐이지. 그러고 나서 조금만 제 정신이 돌아와도 사회 속의 자신을 보고 스르르 무너지곤 한단다. ● 그런 씹주구리한 생각의 나날을 보내면서 전시 준비를 끝내고 전시를 열면 말이지 아는 사람들과 만나 오픈 날 오바해서 놀고 난 후에는 전시장이라는 공간에 나 혼자 버려진 것처럼 멍하니 혼자 남지. 그 어색함이란 정말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의 골 때림이지. ● 미숙아! 네가 내 전시의 오프닝에 안 오겠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한 말, 너 기억해? 화랑이나 미술관은 너에겐 아무래도 어색하다고 한 말 말이야. 열흘 내내 전시장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말이야 나도 너처럼 전시장이 어색해졌어. 네가 미술관이나 화랑에 가면 작가는 물론이고 심지어 그 공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너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별종들로 보인다고까지 했지? ● 나도 요즈음 그런 심정이 들어. 방학숙제로 전시회에 오는 학생들,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전신이 권위로 꽉 찬 중년의 남녀들을 보면 내 작업들이 걸려 있는 공간인데도 전시장이란 곳이 갑자기 낯설어지더라고. 여기서 내가 왜 고생해서 만든 작품들을 걸어놓고선 낯선 사람들 앞에서 빨가벗고 앉아 있는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구. ● 그리고 참 생각나서 하는 얘긴데 요즘 미술동네엔 니가 생각하는 미술가들, 말하자면 영혼의 물감을 찍어 발라서 인류를 감동시키려고 자신을 불사르는 고흐들은 거의 없어. 그런 고흐들의 뜨거운 가슴보다는 냉정한 지성으로 뭐가 뭔지 모르게 하는, 그래서 자기 자신도 모르는 작품을 해야 안심하는 설치 작가들이 더 많아. 아니면 일반인들은 도저히 낯이 뜨거워서 못하는 짓을 천연덕스럽게 해버리는 행위 미술가들이 대부분이지. 난 니가 이런 행위미술이나 설치미술을 쉽게 설명해달라고 할 때가 제일 곤란해. 실은 나도 잘 모르겠거든. 아무튼 요샌 전시장에 들어서면 낯설고 다른 세계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 넌 내가 남의 전시회에 가서 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니? 특히 내 또래의 작가가 어마어마하게 크거나 수적으로 엄청난 양의 재료들을 늘어놨거나 고가의 장비로 전시를 하고 있을 때 말이야. 실은 난 그 작가의 내면이나 세계성, 작품의 의미 뭐 그런 것보다는 저 인간의 아버지는 얼마나 부자일까?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해. 정말 한심하지? ● 넌 이런 나의 반응을 태생적인 피해의식이라고 하겠지. 그 말도 맞지만 이토록 다양한 것들이 사실은 모두 획일적이라는 우리 미술판의 현실도 나의 콤플렉스만큼이나 문제라는 생각은 혹시 안 드니? 생각나니? 강남 역에서 내가 다른 여자들을 자꾸만 힐끔거리니까 니가 한 말? 그 말하고 지금 내가 한 말이 비슷한 말일 거야. 니가 요즘 여자들은 다들 개성 있게 지지고 볶고 자르고 쳐 발랐는데도 다 똑같아 보인다고 했지? 미술판도 그거랑 똑같단 거야. 그런데 천한 언론은 그것이 마치 문화의 첨병인 양 아니면 우리 사회가 선진사회의 입구에 있는 증거가 바로 이것인 양 떠들어대니 정말 답답하지. 그래서 그런 전시를 보면 짜증나기 십상이야. ● 미숙아!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작가보다 교수가 더 대접받는단다. 교수면 교수로서만 대접받으면 되는데 교수가 되면 자동으로 좋은 작가처럼 취급되니 정말 우습지 않니? 하지만 이런 우스운 일도 알고 보면 좋은 교수가 좋은 작가라고 인식하는 말도 안되는 사회적 인식에 더 책임이 있지. 너 군대는 줄이라는 말 들어봤지? 미술판의 교수자리도 줄이야! 줄! 이 정도 되면 군사정권이란 말처럼 군대미술이라는 말도 생길 법도 하지 않냐? 자꾸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출세 못한 내 자신의 콤플렉스 때문이기도 하지만 명백하게 미술판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기도 해. 암튼 미술판이 니 생각처럼 아름다운 동네가 아니란 것만은 명심하길 바래. ● 미숙아! 넌 내가 지난번 니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예절 없이 굴었다고 불쾌해 했지. 나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거야. 진실이 없는 예절? 이건 내가 그 날 그 자리에서 느낀 감정이야. 난 그런 거 못 견디거든. 그날 자리가 끝나고 나서 넌 나에게 왜 그렇게 상식적이지 못하냐고 말했지. 이제 와서 말이지만 말이야 난 그날의 자리가 꼭 우리 나라 미술판 같았어. ● 영숙이? 맞지? 의사라는 니 친구! 그리고 역시 의사라는 그의 남편! 그들의 거드름과 그리고 니 친구들의 행동은 마치 권력을 잡고 있는 미술계 인사와 그 주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분위기와 비슷했어. 난 권력이 그것 자체로 상식이 되는 것이 싫어. 권력 또는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면, 그것이 옳건 그르든 간에, 상식 없는 놈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은 더더욱 말 할 것도 없이 싫어. 적당하게 서로를 치켜세워주고 나쁜 점은 슬쩍 덮어주는 공범자들의 예절. 그것이 상식이라니 정말 구역질이 난다. 네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말길 바래. ● 난 말이야 우리 사회에 상식이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상식으로 알려진 것들은 대부분 몰상식이야. 몰상식! 몰상식한 곳에서는 상식이 오히려 분위기를 망치는 역할을 하겠지. 정말 슬픈 현실이다. 상식이 힘인 것은 분명 맞는 이야기 같아. 그렇기 때문에 어떤 상식이 그 사회를 지배하는가는 너무도 중요한 일이지. 나쁜 상식이 지배하는 나라는 나쁜 나라고 좋은 상식이 지배하는 나라는 좋은 사회란 말. 정말 상식의 힘은 대단하지? 내가 너무 단순 바보틱한 말을 하고 있냐? 하지만 이런 바보 같은 말을 안 하게 생겼는지 주변을 좀 둘러봐! 위선자들이 단결하여 제도를 만들고 제도는 상식을 만들고 자본을 만들고 상식과 자본은 무엇보다 강하니까 진실이 되어버리잖아? 아, 위선이 결국 진실이 되다니. ● 미숙아! 난 정말 이런 동네에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냐? 정말 끔찍하다. 차라리 다 집어치우라고? 글쎄, 이렇게 청춘을 바쳐서 미술판을 욕하면서도 미술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난 사실 무엇인가 벗어버리고 싶어서 미술을 하는지도 모른 생각을 해보긴 한다. 뭘 창조한 다기보다는 벗어버리고 싶은 것들. 뭐 그런거지. 가벼워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벗어버렸다는 말도 될 수 있잖아? ● 미술판에 얼쩡거리다가 보면 말이지 두꺼운 모피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인간들을 많이 보게 돼. 그 사람들은 모피가 인격이나 사람의 역량으로 보이나 봐. 하지만 사이 사이 나처럼 무엇인가 벗는 것을 작업으로 알고 계속해서 벗으려는 사람들이 간혹 보여. 그럼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 우린 한 눈에 알아볼 수 있거든. 그날은 정말 오바하는 날이 된다. 서로 외로웠으니까 말이야. 그건 마치 너랑 내가 눈이 맞을 때의 감정과 맞먹을지도 몰라. 암튼 반가운 그런 사람을 만나면 촐랑거리면서 밤새 놀게 된다. 악을 쓰며 몸을 흔들며 밤을 새지. 모피들이 있건 없건 우린 이 시간만은 날아갈 것 같은 희열을 만끽하지. 이 맛에 사는지도 모르겠다. 난 심지어 잘 놀고 나면 삶의 보람 같은 것을 느끼기도 해. 참 내가 왜 입이 닳도록 미술판을 욕하면서도 떠나지 않는가 말하려던 참이지! ● 너 강준만이란 사람 알지. 힘센 사람들 욕하는 것을 평생 업으로 삼은 사람 말이야. 난 그 사람이 노는 것이 재미있어. 뭐라고 할까, 좋은 작업 같아. 이런 사회에서 잘 나가면 안되는데 잘 나가는 것들에 대한 훼방! 이거 정말 죽이는 작업이지 않냐? 난 말이야 이런 비슷한 작업들을 모두 '상식 회복운동'이라고 부르고 싶어. 좀 거칠긴 하지만 말이야. 내 작업도 이런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거룩하게 말하면 한국사회의 몰상식과 그 몰상식들이 단결해서 만든 모피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일이 시대적 사명인 것 같기도 해. 모피들은 고춧가루가 정말 싫을 거야. 흐흐흐? 모피들이 대개 고춧가루들에게 하는 말은 이런 것들이지. "천박해!" "예의범절이 없어!" 뭐 이런 것들이겠지. 그래 우리 고춧가루들은 천하고 예절이 없어. 하지만 진실엔 우리가 더 가까이 가있지. 모피들의 귀하심과 예절의 내력을 한번 들춰볼까? ● 난 뜨면 꼭 이런 말을 할거야. "모피들아 들어라! 그토록 고귀한 너희들의 핏줄은 면면히 내려온 식민의 피이고, 천한 우리 고춧가루들의 핏줄은 저 옛날 만주 벌판에서 거룩하게 쓰러진 단독자들의 핏줄임을 알아라"라고. 그리고 또 "너희들의 예절은 공범자들의 직업의식에 다름 아니다"라는 말도 꼭 해주어야지, 우하하. 미숙아! 이젠 내가 왜 매일 불평 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가끔은 신이 나서 작업을 한다고 설쳐대는지 알겠지? ● 이렇게 비바람이 무섭게 부는 날은 꼭 신이 있을 것 같다고 처음에 말했지. 신 때문은 아니지만 미숙아 우리 착하게 정말 상식적으로 살면서 각자의 길을 가자. 밤에 술도 안 먹었으면서, 앞으로 반은 예술가로 반은 무능력자로 살아갈 거룩한 결심을 하는 내가 대견하지 않니? 날 지켜봐줘. 미숙아 불평을 들어줘서 정말 고맙다. 몇 가지 빠진, 그래서 오늘 다 못한 이야기는 만나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아무튼 잘 놀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상식인 척하는 몰상식들에게 열심히 고춧가루를 뿌리자. ● 미숙아! 내가 고춧가루를 멋있게 그리고 멀리 뿌릴 수 있도록 도와줘. 그럼 안녕. ■ 배영환
Vol.19991026a | 창작과 불평-폭풍의 여름밤에 청년작가가 미숙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