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선분 時間의 線分

책임기획 / 김승현   1999_1001 ▶ 1999_1028

참여작가 이윤지_윤건혁_박병규_정주하_류은규 김기찬_최광호_강용석_배병우_권태균 한정식_강운구_김석중_김수남

서남미술전시관_폐관 Seonam Art Museum_closed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23-8번지 동양증권빌딩 1층 www.seonam.org

시간이라는 관념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발명이자 거짓말이 아닐까. 과거로부터 흘러와 현재를 스치고 미래로 치닫는다는 시간의 본질은 아무래도 인간이 날조해낸 편리한 관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세상에 시간 말고 이렇게 보편성을 획득한 관념, 모두 믿는 거짓말이 있을까. 우리가 '시간은 흐른다'는 명제에 감쪽 같이 속아넘어가는 것은 주변의 모든 현상들과 회자되는 말들이 그 거짓에 어김없이 들어맞기 때문이다. 감히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말하기에 그 합의는 너무도 단단하다. 그 소식통에 의하면 해가 다시 떠서 서쪽으로 질 수 있고, 내일 아침에도 대문을 열고 조간朝刊을 집을 수 있는 것은 다 돌아가는 시계바늘 덕이란다. 더구나 아직 버젓한 금언, '시간은 쏜 살'은 우리가 상정한 시간의 권능權能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에 필살必殺의 힘마저 아우르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게 대단한 시간 덕분에 우리는 모든 걱정을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믿으며 안심하게 되었고, 시간이 가면 젊음도 가서 머지 않아 죽음이 다가오리라는 두려움에 떨게도 되었다. ● 시간은 모든 관념처럼 인간이 상정해 놓은 울타리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세계를 구성한다. 우리는 나이테로 나무의 나이와 과거까지 캐낼 수 있지만 나무는 그냥 거기에 서 있을 뿐 말이 없으며 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두뇌가 없어서라기보다 인간의 세계와 나무의 세계가 완벽하게 다른 판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오로지 인간의 의식 안에서 흐를 뿐이다. 지상의 모든 짐승을 출발선에 세우고 백 미터 달리기를 하라 한다면 오직 우리만이 초침의 째깍거림에 흥분하며 질주할 것이다. ● 시간은 봄이 오게 하는 힘이 아니라 겨울 다음에 봄이 있음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다. 물론 있지도 않은 시간을 상정하지 않는 다른 사물과 생명체의 곁에도 봄은 오고 꽃은 피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들도 태어나고 노화해서 소멸하겠지만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사연 많은 과거가 묻혀 있다고 함부로 단언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사진은 모든 변화를 아쉬워하고 두려워하는 인간이 고안해서 집착해 마지 않는 '시간'이라는 관념의 적자嫡子다. 사진을 시간의 적자라고 단언하는 배경에는 사라져 부재不在하는 것에 대한 결핍감과 소유욕이 뒤엉켜 있다. 사진은 그 허기를 달래주는 도구다. 제삿상의 영정사진影幀寫眞이 그것을 입증한다. 영정이 죽은 자의 이승 모습이라는 점을 상기하라. 우리가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죽음이 해악인 탓이 아니라 죽음으로 인해 한 사람과 헤어지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의 결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영정사진이야말로 사진이 시간을 단속하고 있음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 영정이 아니더라도 오래된 사진 한 장쯤 손에 쥐고, 미소짓거나 가슴 미어지고 삶에 대한 의지를 다잡은 경험이 누구에게든 있을 것이다. 사진이 담고 있는 모든 과거란 부재不在의 다른 말이다. 그래서 그것은 쾌보다 불쾌에 더 가깝다. 불쾌한 기억을 되새기는 경우야 두 말 할 나위 없지만 유쾌한 추억을 꽃 피운다 해도 사진 속 과거는 지금의 것이 아니니 쾌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쾌를 가장할 뿐이다. 그건 매운 풋고추의 통증을 즐기는 식사와 같다. ● 누구든 자신의 인생이 시간의 유구한 흐름 속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에겐 언제나 현재가 주어질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떠난 과거에 불과한 사진 속의 세계가 현재의 우리를 변화시키는 까닭은 무엇일까. 썩 유별나지 않은 사진이 누군가를 사로잡아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진술의 천부적인 힘 덕분일 것이다. 재현을 향한 사진의 욕구는 시간에 대한 집착과 다르지 않아서 과거일지언정 언제나 현재로 올라와 '지금의 여기'를 구성한다. 슬그머니 흘러가는 시간을 낚아채고 저장하는 사진은 그래서 걸작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좌우지간 모두 함께 한 약속이니 시간의 존재와 그 엄정한 빠르기에는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사진기에 걸려든다는 '순간'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신뢰할 수 없는 공중누각의 관념 같다. 정오正午의 하늘을 날아가던 제비를 1/250의 셔터속도로 멋지게 포착한 자가 자신이 잡아낸 결정적 순간에 기뻐한다면 지나가던 겁 없는 자가 반문할지도 모른다. 도대체 천분의 일초가 네 개나 들어가고 만분의 일초라면 무려 사십 개나 들어가는 그 시간이 왜 순간이냐고. 또한 그건 12시 00분 00초라는 시각부터 12시 00분 0.004초라는 시각까지의 엄연한 역사라고 훈계할런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그의 말대로 사진이 찍히는 '순간'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서 아이는 그만큼 자라고 노인의 여생은 그만큼 줄어든다. ● 하나의 점點이 면적을 가질 때 이미 그것은 점이라고 할 수 없다. 면적도 없이 위치만 가진 것이 점이고, 그 점의 꼬리가 선線이라면 그 점과 선을 보려 하거나 연필로 그리려 해서는 안될 테다. 하지만 우리는 커다란 붓으로 쿡 찍어 놓고도 점이라 부르고 노랗게 색깔마저 가진 물감덩이더러 '중앙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순간과 점과 선은 매한가지다. 그것은 합의된 좌표 속에서 움직이되 눈에 보이거나 손에 쥐어지지는 않는 순수한 관념의 소산인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결의한 약속을 스스로 어기는 일이지만 우리는 큼직한 붓자국을 점이라 부르고, 이백오십분의 일초 동안의 역사를 별다른 저항 없이 순간이라 부른다. ● 찰칵하는 '순간'의 개념적 모호함이 쿡 찍은 '점'의 모호함과 유사하다는 사실로부터, 정점관측定點觀測으로 얻어진 '두 장의 시점時點'사이에 그어지는 일체의 감정과 숱한 사건들을 '선분線分'이라 부른다면 그 '시간의 선분'이 가진 무게는 인화지 두 장의 무게를 넘어서지 않을까. ●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출발한 시간이 많은 것을 머금고 다른 한 장의 사진에 도착한다. 한 장의 사진이 '순간'이듯이 두 장의 사진은 포획된 두 '순간'에 불과하지만 그 두 장의 사진이 그어 놓은 '선분'의 다사다난함은 시간의 마력을 증명한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시공時空을 담았어도 증명한다.

우리의 인생이 시간이라는 모종의 좌표 속에서 움직인다면 과거는 가장 견고한 하나의 값이다. 삶의 좌표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만 현재만이 유일한 변수로 남아서 지분거릴 뿐. 과거란 현재의 누계이기 마련이니 앙탈을 부려도 소용 없는 노릇이다. 요컨대 현재는 과거라는 뿌리로부터 양분을 얻지만 동시에 과거를 더욱 깊히 뿌리 내리게도 한다. 도식화하자면 그리도 중요한 것이 현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로부터 늘 새롭게 그어지는 '선분'의 이야기에 귀를 세운다. 기억상실증 환자에게 '선분'이란 없다. 좌표를 잃은 현재의 '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기억상실이 질환으로 분류되는 까닭이다. 사진이 과거를 담는 방이라면 그는 열어볼 필요가 없겠지만 새까맣게 많은 과거의 '점'을 보유한 이들이라면 그 방을 들락거리는 재미와 뜻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요즘 그들은 갈수록 보채서 자승자박하는 세기말의 시간이 애초에 시간을 날조한 자의 속셈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빌고 있다. ■ 김승현

Vol.19991005a | 시간의 선분 時間의 線分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