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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마지막 문턱에 들어서면서 그야말로 며칠 남지 않은 끄트머리를 장식하기 위한 크고 작은 미술행사들이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그야말로 세기말이다. 그리고 새천년이다. 그러나 아시아 농경사회에 있어 새로운 천년이 지니는 의미는 아무래도 서구사회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아직도 아시아 농경사회에서 공유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명절인 구정이라는 설날을 서구사회에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서구의 새천년 또한 엄연히 문화가 틀린 아시아에서 제대로 이해되기를 바라는 것은 좀 과한 욕심일 것이다.
모든 세대에 통용될 수 있는 젊음 ● 전지구가 하나의 커다란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해버린 지금 굳이 구차하게 서구와 비서구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를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문화 특히 시각 이미지의 차원에서 보자면 엄연히 서구와 비서구는 존재한다. 그래서 세기말에 열렸던 대형 미술행사들의 슬로건이 '경계를 넘어서' 또는 '타자他者에 대한 관심'으로 집약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여기서 말하는 경계는 서구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경계이고 타자 또한 그들의 타자이다. ● 새천년은 새로운 문화를 요구하고 있다. 한국 정부에서도 새천년을 '문화의 세기'로 부르고 있다. 과거 같았으면 '통일의 세기' 또는 '화합의 세기'라 부름직 했을 터인데 무언가 달라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새롭다는 것은 무언가 변화를 추구하면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주역은 젊음으로 포장된다. 한동안 유행했던 '신세대'가 드디어 하나둘씩 '신지식인' 또는 '신문화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한국 현실에서 이 '새로움에 대한 강박'은 자연연령을 뛰어넘어 빠른 속도로 파급되고 있다. ● 따지고 보면 시각예술에서 '새로움'은 20세기를 아우르는 익숙한 키워드로 이미 낡고 닳도록 쓰여진 바 있다. 19세기말부터 대두되기 시작한 이 '새로움의 역사'는 이미 그 신선함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에서도 80년대를 지나며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것에 별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다. 현대미술의 역사가 겨우 백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각예술 창작은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고작해야 과거의 것들을 되풀이하는 그게 그것인 막막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90년대 한국 현대미술뿐만 아니라 세계 현대미술 또한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 하지만 인쇄매체, 영상매체 등에서 읽혀지는 현실 시각 이미지는 부단히 성장해 왔다. 새천년을 코앞에 둔 지금의 위치에서 뒤돌아보자면 현실 시각 이미지는 시각예술의 과거 이미지들을 끈임 없이 축적시켜 왔을 뿐만 아니라 그 축적된 이미지들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첨단기기에 입력시켜 활용함으로써 자화자찬하며 자만에 빠져있던 시각예술 창작자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예술 특히 시각예술에 있어서 이 현실과 예술의 역학관계에 의한 영역싸움은 사실상 오래 전에 판결이 났었다. 물론 예술이 완패했다. 사실 오늘날 전지구 차원에서 유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시각예술 창작은 과거 우아하고 고집 쌨던 예술관념으로부터 탈선하여 현실과 보다 적나라하게 부딪힘으로써 시각적 힘을 얻는다. 그리고 몇몇 급진적인 작가들은 기존 예술로부터의 '일시적 탈선'이나 '계약된 배반'이 아니라 애시당초 기존 예술과 예술행위에 독한 적개심을 품고 전혀 엉뚱한 비예술의 영역에 자리를 잡고 민망할 정도로 유치하고 자극적인 발언과 행동을 일삼고 있다. 비예술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이들은 오늘날 시각예술에 있어 진정한 시각 이미지 창작자로 이해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기왕의 시각예술 또한 바로 이런 현실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도발적인 도전'으로 시작했었기 때문이다. ● 모든 예술행위가 그렇지만 그 주축이 되는 것은 '젊음'이다. 물론 이 젊음은 자연연령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20세기를 관통하며 성장해온 104세의 늙은 베니스비엔날레가 올해로 48회를 맞이했다. 20세기 마지막 행사인 올해 내건 슬로건이 바로 'APERTutto - 모든 세대에서 통용될 수 있는 젊음'인 까닭도 바로 늙은 권위에 빌붙기보다는 새로움의 영역에서 회춘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 했던 까닭이다. 아마도 그 회춘의 묘약을 답답한 시각예술에서 찾기보다는 광활한 현실에서 직접 얻어내겠다는 것이 오리무중에 빠진 오늘날 현대미술이 그나마 내리게된 결론인 것 같다.
1900년대 마지막 가을, 한국의 형상미술 ● 새천년을 맞이한다는 것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송구영신送舊迎新이다. 이 말은 과거를 지워버리고 앞으로의 것만을 생각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시각 이미지의 새로움은 무작정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 '과거' 혹은 이미 낡아버린 '과거의 새로움'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반성을 바탕으로 한 증오가 없이는 오히려 과거를 답습하는 것보다 더 보잘것없는 결과가 나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직 제대로 된 형식실험을 경험해 보지 못한 미천한 역사의 한국 현대미술에 있어서는 그 함정은 도처에 숨어있다. 서구는 벌써 세번째 밀레니엄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극심한 문화단절로 인해 고작해야 1세대라 부르는 30년이 될까 말까한 현대미술의 역사를 가지고 새천년을 준비한다.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다. 그래도 노스트라다무스가 경고했던 그날이 무사히 지나갔으니 새천년은 오고야 말 것이다. 차마 아직은 젊다고는 할 수 없고 어리디 어린 유아기의 한국 현대미술은 새천년을 앞두고 그나마 '형상미술'이라는 하나의 맥락을 잡은 것 같다. ● 우선 여성미술제 『21세기 팥쥐』전이 9월 3일부터 9월 26일까지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열린다. 이 전시는 김선희(여성의 감수성), 김홍희(섹스와 젠더), 임정희(여성과 생태), 백지숙(집속의 미디어), 오혜주(제식과 놀이) 등 여성 전시기획자들이 꾸려낸 것으로 70여명의 여성 형상미술 작가들이 출품한다. 그리고 유제길, 정준모, 박영택, 오병욱, 최승훈 등이 '인간탐구'이라는 커다란 테마를 갖고 200여명의 작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해 9월 15일부터 10월 30일까지 광주비엔날레 전시장에서 『대한민국 미술축전』라는 형상미술분야 종합전시를 마련했다. ● 그리고 '99독립예술제 미술행사인 『호부호형』전이 인디문화와의 수평 횡단교류를 목적으로 강홍구, 김일용, 윤여걸, 안창홍, 이종빈, 이흥덕, 최경태, 최민화 등 30여명의 작가들이 자극적인 이미지의 형상작품들을 출품하여 9월 13일부터 9월 26일까지 예술의 전당 미술관 3층 제5전시실에서 전시를 갖는다. 또 이외에도 99명의 작가가 참여하는 류병학 기획의 전국 순회전『구땡전』등 여러전시에서 형상미술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다. ● 이렇게 올 가을 한국의 여러 전시들이 형상미술로 집중되는 까닭은 기왕의 영상 매체미술의 확산에 힘입어 현실 시각 이미지의 속도를 비교적 빠른 속도로 따라잡고 있으며 한국현대미술의 처음에서부터 80년대 민중미술, 90년대 매체미술의 제 경향들을 함께 총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최금수
Vol.19990829a | 형상미술의 현실-시각 이미지 따라잡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