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 / 1996_0206_월요일_05:00pm
책임기획 / 최금수
마포 서남미술전시관_폐관 Mapo Seonam Art Museum_closed 서울 마포구 마포동 140번지 다보빌딩 4층 Tel. +82.(0)2.715.9306
뷰파인더 캔버스'96전을 기획하며 ● 변화, 90년대 들어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변화는 굳이 '현실사회주의 붕괴로 인한 전지구적 자본주의화'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곳곳에서 연달아 발생했던 대형사고/사건들만으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미술의 변화 ● 80년대 끄트머리에서 90년대로 넘어갈 즈음 한국현대미술계는 시각 이미지의 난무 속에 거칠게나마 매체논쟁을 치렀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수많은 이들이 '탈모던' 내지 '포스트 모더니즘'을 거론하였다. 한편에서는 '기존 한국 모더니즘 미술로부터 벗어나려는 대안으로 탈평면'을 논하며 밀려오는 국제화 열풍과 맞물려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창하기도 했으며, 혹자는 현실과 문화지형의 변화에 주목하며 더 이상 그 폭을 넓혀 나아가지 못했던 80년대 민중미술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 환기장치로 '새로운 미술운동'을 설정하기도 하였다. ● 이 시기를 지나며 한국현대미술은 그저 10년 터울로 변화가 닥친다는 어수룩한 생각에서가 아니라 분명 변화국면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세계화/세기말이라는 분위기와 합류한 90년대 한국현대미술의 변화는 과거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 서라운드화를 추구하였고, 일각에서는 다양성이라는 이름을 빌은 면죄부가 남발되어 혼란이 조장되기도 하였다.
한국현대미술의 회화적 축적도 ● 작년 해방 50년을 치룬 한국사회는 현대미술도 차마 2세대를 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한국현대미술을 이끌던 1세대들이 젊은 작가 못지 않은 창작열을 과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으로 한국현대미술의 두께를 가늠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 많이 지적된 바 있지만 일제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한국현대미술은 이식문화, 이데올로기 대리전 등으로 인해 상당부분 제한된 폭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그리고 군사정권 시기에는 추상미술이나 개념미술을 도입하려는 작가들마저도 한때 빨갱이로 몰리는 우스꽝스런 풍토에서 어렵사리 성장해 왔던 것이다. 더구나 유신 독재체제가 구축될 즈음 허구적 민족정신과 절묘한 결합을 이루며 확고히 그 자리를 잡아간 한국현대미술은 아직도 그 역사적 굴레를 확연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후 80년대들어 뜨겁게 달아올랐던 사회 분위기에 발맞춘 민중미술 또한 어느 지점에 와서는 그나마 되찾게 된 미술의 폭넓히기 작업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그 힘겨웠던 역정을 되짚고 있는 것이 오늘날 그려본 한국현대미술의 자화상인 것이다. ● 과거를 돌이켜 볼 때 한국현대미술계에 우선 당면한 과제는 '미술자체 논리의 계발'이다, 다행히도 한국현대미술계에서는 미약하게나마 격변하는 시기 시기를 겪으며 그 틈새마다 나름의 미술논리 계발을 위한 노력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맹목적으로 순수라는 이름을 빌어 진행되거나, 미술계 외부에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 그 시대의 삶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미술논리는 축적되지 못하고 단발의 성과만 점철되어 왔을 뿐이다.
얇은 회화의 지층을 밟으며 ● 1996년, 몇년새 잦았던 어처구니없는 대형사고와 예전과는 사뭇 다른 정치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좀 부담스러웠던 '미술의 해'와 '광주비엔날레'의 포만감 때문인지 한국미술계에 활기가 느껴지는 곳은 해외작가 국내전과 대형화되어 가는 상업화랑들 뿐 아직 별다른 움직임을 감지할 수 없다. 또한 '회화의 종말'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는 화단 분위기는 설상가상으로 잇따른 대형 설치미술전이 열리면서 연초부터 한국현대회화의 미래를 어둡게 설정하고 있다. ● 90년대, 분명 과거에는 전위미술로만 일컬어졌던 설치미술/매체미술이 이제는 당당히 폭넓은 확산을 이루고 있다. 그것이 '탈모던으로서 탈평면'이던 '단순한 외래사조의 수용'이던 말이다. 분명한 것은 이제 설치미술/매체미술은 더 이상 전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90년대 설치미술이라는 것도 한국현대미술에 있어왔던 것과는 그 모양새를 달리하는 인스톨레이션이라는 새로운 동시대 서구 미술형식이 그 자리를 대체하는 방식으로 결과된 것이다. 그리고 작년 광주비엔날레에 채 다듬어지지도 않은 하드웨어들로 나열되어 '정보예술; 혹은 '첨단 예술'이라 포장되었던 작품들을 돌이켜보면 이 90년대 설치미술/매체미술 또한 여러 허점을 미리 노정하고 있는 것 같다.
뷰파인더 캔버스 : 회화에 대한 신뢰 ● '뷰파인더'는 영상기기 입력장치에 장착된 것으로 피사체에 대한 정보를 입력에 적합한 신호(제한된 범위의 화면 재구성 또는 디지탈 신호)로 전환시켜 가출력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즉, 영상제작 주체(작가)는 '뷰파인더'를 통해 각 현실들을 선택/입력하는 것이다. ● 전시 이름으로 '뷰파인더'에 '캔버스'를 합성시킨 까닭은 『뷰파인더 캔버스'96』展에 참여한 화가들이 공통적으로 '현대 영상기기가 만들어낸 이미지들로부터 강력한 현실 흡입력과 객관화 능력을 빌어와 현실세계로부터 떨어져 있던 회화표면을 현실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뷰파인더 캔버스'96』展의 부제는 '시각 이미지 시대의 화가들'이다. 여기서 굳이 '작가'라는 말보다 '화가'라는 단어를 사용한 까닭은 손으로 그려지는 '회화'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동시대 첨단 시각 이미지들을 담아내고 있지만 영상기제 하드웨어의 직접적 노출이 아닌 '회화'로 변화시킨 화폭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들 화가들은 동시대 영상이미지에 휩쓸려 기존 회화의 가능성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영상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화폭에 도입시켜 한국현대회화의 폭과 깊이를 더 확대/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뷰파인더 캔버스'96』의 작품들에서는 문학, 음악, 무용, 영화 등과 분명 다른 '오늘날 한국현대회화'만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 결국 『뷰파인더 캔버스'96』는 실시간/다량으로 공유되는 현란한 시각 이미지들을 '90년대의 화폭에 담아내는 화가들'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 이미지 시대의 화가들 ● 여의도 모 방송국 건물에는 '21세기 앞으로 ****일'을 셈하고 있는 전자간판이 설치되어 있다. 분명 21세기는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뷰파인더 캔버스'96』전에 출품된 작품들의 내용과 형식에서도 21세기를 예감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뷰파인더 캔버스'96』展의 작품들은 오히려 19세기말/금세기초 미술사의 계단을 되밟고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 출품작들의 내용과 형식이 '주체로서의 삶'을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고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금세기 현대미술과 대중문화가 주체의 상실로 진행되어 왔음을 감안할 때, 이들 작품들은 분명 보는 이들로 하여금 주체가 생생하게 살아있던 과거 회화를 향수하게 만든다. ● 그리고 몇몇 작품에서는 당당히 회화적 주체회복을 주장하거나, 과거의 주체와 객체를 교란시킨 후 다시 역사적 주체를 인식하게 만드는 방식을 꾀하고 있다. ● 티비, 인쇄 및 역사다큐멘터리, 만화와 기호, 비디오와 영화, 브로마이드와 포스터, 사진과 컴퓨터 그래픽 등이 뿜어내는 객관의 시각효과들을 되씹는 『뷰파인더 캔버스'96』의 화가들은 각기 다른 성향과 내용을 갖고 있지만 공통의 출발/귀결점을 '회화'라는 곳으로 잡고 있다. 그런 까닭에 『뷰파인더 캔버스'96』展은 '첨단영상매체'와 '회화'의 가능성과 한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 더 나아가 '뷰파인더'가 암암리에 '영상매체미술'과의 연관을 유도하고, '캔버스'가 '회화'를 상정한다면 『뷰파인더 캔버스'96』전은 '회화'와 '영상매체미술'과의 변별점과 유사점을 가늠해 보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 최금수
『뷰파인더 캔버스'96』展은 당시 책임기획자인 최금수님의 허락을 받아 복원된 것입니다. 참여작가님 중에 이미지의 보완 또는 삭제를 원할 경우 [email protected]으로 연락 주십시오. 즉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Vol.19960206a | 시각 이미지 시대의 화가들-뷰파인더 캔버스'96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