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화, 그 해석과 비판의 소리 1

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展   1992_1013 ▶ 1992_1025

김난영_Man_천에 아크릴채색_45.5×37.9cm_199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네오룩 아카이브 Vol.19921013b | 풍자화, 그 해석과 비판의 소리展 2으로 갑니다.

참여작가 김난영_김성룡_박은국_안창홍_양인진_이태호 이흥원_이흥덕_정복수_정진윤_최석운_최윤정

책임기획 / 윤진섭

현대백화점 현대미술관 압구정 본점_폐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456번지 Tel. +82.(0)2.547.2233

『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 금번 현대미술관이 개최하는 『풍경화, 그 해석과 비판의 소리』전은 금년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장시간에 걸친 전시행사로 마련하는 『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 중 그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다. 제1부 『자연, 그 새로운 해석』, 제2부 『구상미술의 오늘, 꿈과 현실이 대결』, 제 3부 『풍자화, 그 해석과 비판의 소리』, 제4부 『인물화, 그 삶의 풍경』 등 총 5부로 진행될 예정인 이 기획전은 구상회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자각들의 독특한 미감을 반영하고 있다. ● '바깥 현실의 충실한 재현'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구상회화가 오늘의 미술적 상황 하에서 새삼스럽게 되물어져야할 가장 큰 이유는 구상미술이 그간 모더니즘이란이름 아래 전개되어 왔던 추상과 실험 일변도의 미술경향 하에서 그 가치 및 의미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모더니즘의 커다란 줄기를 이루는 모더니스트 회화의 핵심은 2차원 평면으로부터 일루젼적인 요소들을 배제하는데 두어졌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와 같은 회화적 규범 아래에서는 바깥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을 캔버스에 옮기는 것 자체가 그미시될 수 밖에 없었다. ● 서구미술이 진행과 거의 그 궤적을 같이 하면서 전개되어 온 한국현대미술은 현재 그것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서구가 앓고 있는 몸살(이른바 '해체'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문화현상 따위)과 유사한 징후를 보이고 있다. 70년대 한국화단을 점유했던 소위 미니머리즘 및 개념미술과 오브제 미학의 대두 그리고 80년대의 새로운 구상적 경향의 팽배 등은 비록 그 속에서 서구의 그것과는 변별되는 미감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문화가 갖는 역학관계상 고유한 우리의 것이라고는 주장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 우리의 미술이 지닌 이와 같은 한계는 대망의 2천년 대를 바라보는 '90년대인 오늘에도 그 현상적 징후 면에서는 대동소이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로 지칭되는 오늘의 문화환경 속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청산해야 할 유산인 모더니즘 그 자체의 문화적 조건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뒤에 다가올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현상을 감각적으로 수용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 풍경, 인물, 정물, 풍자, 심리묘사 등으로 그 범주를 정할 수 있는 『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는 이처럼 극도의 혼란된 현상을 보이고 있는 국내의 화단현실에 대해 소박하게나마 갈피를 잡아보자는 의도 하에 기획되었다. 금번 기획전시리즈에 등장하게 될 작가들은 굳이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는 딱딱한 명칭을 붙이지 않더라도 특유의 방법론을 통하여 대상세계의 해석에 접근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앞으로 전개될 각 기획전의 내용을 통하여 오늘의 구상회화가 지닌 문제점과 더불어 그것이 지니고 있는 참신한 전망을 엿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무쪼록 금번 기획전들에 등장하게 될 작품들의 편편(片片)이 우리미술의 풍요로움을 획득하는데 일조해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이것으로 기획의 변(辨)을 갈음하고자 한다. ■ 윤진섭

김난영_입큰 여자_천에 아크릴채색_100×80cm_1991
김성룡_주말_종이에 유성볼펜, 바니스_190×227cm_1989

1. 구조적 억압에 대한 대응"현실의 조직원리는 항상 폭력과 제도화하는 어떤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1) 송호근, 『시장과 이데올로기』(문학과 지성사, 1992, p. 128.)는 토크빌의 지적은 정치, 경제 등의 사회운영의 방법이 정세해지는 가운데, 대중조작과 지배의 논리가 발달할수록 더욱 명료한 구체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후기 산업사회로의 가속화 현상을 보이는 우리의 실정을 돌이켜 볼 때 이런 지적은 그 실감을 가중시킨다. 그러나 이런 지적이 현사회의 우리 삶의 근저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정당화의 논리로 쓰여진다면 그 끔찍한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사실 우리는 오늘날의 여러 사회현상들에서 이것이 반성이 아닌 정당화의 원리로 둔갑되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더구나 그것이 경제 제일주의라는 상업성에 매몰되어 몰인간성과 반윤리로 만신창이 된 우리 사회의 어두운 흐름과 맞아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탐욕과 욕망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말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개인의 존재가치는 어디 있으며,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라는 구성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대항할 수 있는 개인적 기제는 무엇일 수 있는지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속에서 예술작품이란 궁극적으로 무엇이며 인간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하는 의문도 갖게 된다. 엄혁이 지적한 대로 "문자시대의 종말이 다가오고 이미지 시대의 도래가 예고되는 현 시점"에서 예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어어야 하는가. 이런 사회적 상황에 대응하는 작가들의 작업세계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가 하는 질의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 예술은 우리의 삶을 다시 내보이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이미 있는 삶의 어떤 면들에 특히 주목하고 그것을 새롭게 구성하여 펴내는 구도이기 쉬운 것이다. 더러 말하여지듯이, 예술이 인생의 강렬화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2) 김우창, 『심미적 이성의 탐구』(솔, 1992, p. 28.) 『풍자화, 그 해석과 비판의 소리』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현실의 조직원리가 갖는 폭력과 억압에 대해 특히 주목하는 작가들로 일견되며 그런 특징을 재구성해서 체험케함으로 삶의 강렬화에 대한 예술적 신념을 확인하게 해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삶의 온전함이 손상'되어 있기에 그들의 작업은 더욱 강렬하게 느껴지고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이 병적 항진'을 요구해 보이는 것 같다. 그 요구는 이 시대의 풍자의 창출이라는 결과를 불러낸다. 그러나 이 전시가 왜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민중미술'이나 '현실비판' 등의 용어로 작가를 묶지 않고 '풍자'라는 용어를 선택하고 있느냐 하는 점은 기획의도와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그것은 우성 이 작가들의 작업이 주는 감명이 이 시대의 상황을 점검하고 반성한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가능한 한시적인 특징으로서 보다 근원적인 삶의 문제를 직시하고 있고, 그것이 보다 넓은 시간대에서도 유효할 것이라는 판단에 기인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자성이란 사실 이들 선정 작가들에게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대 어느 작가가 풍자성을 갖지 않은 경우가 있겠는가. 적어도 이 시대의 삶에 조금이라도 반성과 애증이 있는 자라면 이 시대에 어찌 풍자화가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대사회의 모순이나 그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부조리한 삶을 과격하지 않은 유머스러운 표현을 통하여 80년대의 민중미술과는 그 궤적을 달리하는' 작가들을 선정했지만 상당수 '민중작가'로 분류된 작가들도 끼어 있는 점으로 보아서 내용보다는 방법적 특징이 중요한 선정기준이 된 것 같다. 그것은 한편으로 풍자적 특징이 광범위하게 미술계 전역에 일반화되어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풍자화라는 이름으로 작가를 선정한 데는 '민중미술'이라 분류되는 작업에서 일차적 사고로 현실을 드러내는 사례에 대한 견제로서 의미가 짙게 보인다. "일차적 사고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가시적 현상'을 '본질'로 이해하는, 말하자면 현상의 뿌리에 대한 인식이 결여, 또는 진단과 처방의 단순성을 의미한다. 일차적 사고로는 미래적 의도와 외현적 행위 간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3) 김우창, 『심미적 이성의 탐구』(솔, 1992, p. 137.)는 것이다. 그런 반성을 ·80년대 일련의 작업들에서 보이는 '현실비판'의 한계로 보아낼 수 있다면 이번 『풍자화, 그 해석과 비판의 소리』는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들 선정 작가들의 작업에서도 "예술은 거창한 불평등과 질곡을 표현하고 묘사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런 것들이 예술적 차원으로 전치된다는 이유 때문에 단순히 카타르시스적인 방식으로 작용하여 그 과정에서 기존의 사회관계를 긍정"4) 자네트 월프, 이성훈, 이현석 역, 『예술의 사회적 생산』(한마당, 1986, pp. 119-120.) 하게 되는 취약점이 있다는 부분을 감안한다면 풍자화라는 웃음과 회한의 한계도 없지 않을 것이다.

김성룡_예감_종이에 유성볼펜, 메디움_91×116.8cm_1991
박은국_바로보기 Ⅱ_판넬에 꼴라주_90×180cm_1992

또한 이들 선정 작가 12명 중 10명이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거나 부산출신이라는 지역적 특성이 드러나는데, 이것이 기획자의 의도된 지역적 안배가 아니라 작업특성에 의한 엄정한 선정이라면 이 기획의도와 무관하게 부산 형상미술의 특성이 이번 기회에 부가가치로 정립될 수 있다는 의외의 결과물도 갖게 될 것 같다. 그것은 필자가 누차 주장해 온 부산 형상미술의 특성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시사적 사건에 대한 적당한 거리의 확보를 부산미술의 특성이라 본다면, 풍자가 갖는 대상과의 거리확보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번 선정작가들은 크게 세 개의 관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김난영, 양인진, 안창홍, 이홍원, 정복수에게서 찾아지는 성을 기제로 한 삶의 드러내기. 둘째, 김성룡, 박은국, 최석운에서 보이는 민담과 설화를 재해석하는 관점. 셋째, 이태호, 이흥덕, 정진윤, 최윤정에게서 보이는 현대문명과 사회적 상황에 의한 소외와 좌절이라는 점이다. ● 이런 분류에도 불구하고 서로 넘나드는 특징이 없지 않고, 무엇보다 개별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가들이라 분류 자체가 무의미한 일면도 없지 않지만, 최근 그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소재로 기준을 삼아 보았다. 소재의 "사회적 관념은 비교적 자명한 것"5) 김우창, 『심미적 이성의 탐구』(솔, 1992, p. 81.) 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들 작가들의 관점이 작가가 "선택하는 소재에 대한 태도, 또 소재의 선택 자체, 더 나아가서는 그 선택의 지평을 이루고 있는 생의 공간, 그 공간의 지향성을 조성하는 근본적인 삶의 방향 설정에서 직접 간접적으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표면적 심층적으로"6) 김우창, 『심미적 이성의 탐구』(솔, 1992, p. 80.)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 풍자는 일종의 그 시대의 삶에의 긴장의 소산이며, 긴장으로부터의 탈출이기도 하다. 당대의 삶의 현장에 대한 애증과 반성이 긴장을 낳게 하며, 그 긴장은 풍자로 풀어질 수 밖에 없다. 이들이 풍자는 삽화되지 않은, 시의적 의미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구조가 가진 긴장을 드러내 놓고 있다. 이들 그림은 대부분 적의로 가득차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약간 이완된 적의일 뿐 전통적 의미에서의 풍자는 보기 힘들다. 무겁고 격정적이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풍자호로 묶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이 시대의 무거움을 노출할 뿐, 그것을 풍자화 시킬만한 거리를 확보하고 있는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웃음이 없다. 깊은 회한을 주지도 않는다. 민중미술과는 변별성을 가지면서도 기지에 찬 웃음을 얻기에는 이 시대가 너무 무거우 것일까. 조선시대 말기에 보이는 그림 속의 해악은 그래서 탁월한 것일까?

박은국_서울 사람들-인왕_발포고무에 새김 채색_90×170cm_1991
안창홍_우리들의 일상_종이에 연필_79.5×109cm_1989

2. 성의 드러내기"마르쿠제는 선진 산업국에서의 알코올리즘, 야심에 찬 도착적 성욕 등이 쾌락추구의 표현이면서 깊은 의미에서의 불행과 소외 및 억압의 증후라 하였지만-우리가 삶의 어떤 부분의 병적인 항진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이미 비친 바와 같이 삶의 온전함이 손상되어 있기 때문이다"7) 김우창, 『심미적 이성의 탐구』(솔, 1992, p. 30.) 라고 지적하듯이, 김난영, 양인진, 안창홍, 이홍원, 정복수에게서 발견되는 성은 다분히 도착적이고 거칠다. 그리고 생경할 정도로 폭력적이며 노골적이다. "성폭력은 충족되지 못한 소유욕의 불법적 표출이라는 점에서 성문제이기 이전에 박탈감, 즉 소유권으로부터의 구조적 격리이자 자본주의적 소비의 표현"8) 송호근, 『시장과 이데올로기』(문학과 지성사, 1992, p. 137.)이라고 한다. ● 2-1. 육체의 상실, 성의 허상 ○ 김난영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성은 섹스가 아니라 성기의 드러냄이고, 그 성기가 곳곳에 깔려 있고, 모든 것들이 성기가 갖는 성의 유혹으로 교묘하게 치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성은 남녀의 육체가 결합하는 생생한 교접의 경험이 아니라 기호화된 성의 발견이고, 상품화된 성을 통해서 성의 쾌락을 얻는 전도된 성을 보이고 있다. 모든 곳에서 성의 징조를 발견하면서도 막상 개인에게서의 성이란 육체가 아닌, 실재의 경험이 아닌 기호적 경험이라는 비극적 상황인식 이다. TV나 싸구려 잡지에서, 여성용 화장품에까지 성의 욕구를 미화시켜 내놓으면서도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충족된 욕구와 살아 있는 삶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과장되거나 포장된 가상적 쾌감으로 충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 가랑이를 벌리고 성기를 내놓은 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얼굴로 한 「거울보는 여자」는 온통 성욕으로 가득찬 내심을 거울을 통해 드러내고 있지만, 그런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남자는 남자의 육체가 아니라 교묘하게 조작된 남자성기 모양의 립스틱이다. 속되게 여성기를 여자 입에 비유하고 그 위에 립스틱을 바르는 행위를 간접적인 성희로 보는 세간의 관심을 드러내 주고 있지만 그것은 성교가 아니라 가상적인 성이며, 성의 도착과 상품화이며 성의 자극일 뿐이다. 그것은 성이 박탈이고 직접적 육체로부터 소외된 현대인의 모습니다. 특히 TV속에 여자 성기만 드러나 있는 화면을 가슴에 안고 자위하는 한 남자의 모습은 상품화된 성을 통해 쾌감을 얻고 있는 모습인데, 이미 그곳에는 육체를 상실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육체가 없는 쾌감은 이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데 감각은 육체가 스스로를 확인하는 방법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가 세계로 나아가는 창문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육체의 상실은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상실을 의미한다"9) 김우창, 『심미적 이성의 탐구』(솔, 1992, p. 30.) 는 점을 상기한다면 김난영의 육체상실의 성은 세계의 상실을 의미한다. 실재가 아니면서 실재의 쾌감을 대신하는 구매 욕구로서 성은 오늘날 우리 성풍속을 보여준다. 주체가 없이, 또는 육체가 없이 허상들만 득실거리는 현대인의 모습은 가장 직접적인 감각인 성마저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허상으로 자위하는 「자위하는 남자」는 세계의 상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안창홍_위험한 놀이_종이에 색연필_79.5×109.5cm_1989
인진_관객을 바라보는 광대_장판지에 먹, 아크릴채색_195×247cm_1991

2-2. 무대 위의 존재, 무대의 성 ● 양이진의 작업은 일단 「관객을 바라보는 광대」라는 시점이 전도된 한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여러 번의 단체전을 통해 인물을 주제로 해서 작업을 보여왔지만 지난 4월에 있었던 개인전이야말로 그의 세계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주로 특정 장면을 연상케하는 무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 등장하는 인물도 주로 한 명이며 여자가 대부분이다. 그 여자들은 가면을 쓴 듯한 표정과 함께 옷을 입고 있지만 가슴이나 둔부의 표정이 유난히 돋보이도록 처리되어 있다. 가슴이 노출되고 성기도 숨기듯 하면서도 노골적인 묘사를 통해 내용을 구축하는 중요 부분이 되게 한다. 또한 인물들의 표정은 연극적인 장치와 함께 내용을 구축하는데 극적 효과를 상승시킨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광대를 바로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바라봄을 당하고 있다는 작가의 주장에 봉착하게 된다. 연전된 관점은 그 광대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논리가 가능해지고, 작품의 의미는 형상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전도된 상황을 통해서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게 하는 연극적 구성이 그것이다. 싸이고 드라마 같은 자기진단의 효과를 노린 논리를 보게 된다. 적당한 조명에 의해 강조된 인물의 표정과 표정을 통해 선정적인 몸매, 그리고 어딘가 공허한 표정을 통해 충동은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그의 인물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실재하는 여자의 모습이라기보다 성적 부분만이 유달리 강조된 인물임을 알 수 있고, 추악한 표정이나 인체 묘사를 통해 성적 충동이 도리어 사그러지는 일면을 발견하게 된다. ● 뒤틀린 얼굴과 커다란 콧구멍, 퀭한 눈, 가슴과 둔부가 커다랗게 강조된 반면 너무 말라서 뒤틀린 듯한 팔다리들은 성적 충동이 아니라 황폐한 현대인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런 모습의 「관객을 보는 광대」란 도대체 무엇일까. 광대는 실재의 몸짓이 아니라 꾸며진 행위를 보인다. 보여지는 몸매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광대의 몸짓이라는 기호와 기의, 말하자면 정보체계의 내용에 따라 움직여가는 인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광대가 보는 관객은 광대의 몸짓에 따라 반응하는 수동적인 관객의 모습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신랄한 비판적 대상으로서 인간의 모습이다. 나는 누구인가하는 주체의식을 잃어버린 광대를 토해서 복제된 자신을 바라보는, 남의 의지에 놀아나는 현대인의 단면을 보여준다. 성적 충동마저 자기가 아니라 무대의 광대에게서 확인되는 우리의 존재감의 상실이라는 심각한 국면을 만나게 되고 성욕마저 황폐한 경험으로 우리 앞에 던져져 있음을 깨닫게 한다. ● 2-3. 즐거운 식사, 성의 충동 ○ 안창홍은 70년대 중반, 그의 첫 출발기부터 세태풍자와 도시생활에서의 소외된 계층, 심리적 위축과 좌절을 나타내는 작업들을 해왔으며 상당한 기대와 평가를 받아왔다. 그의 작업들은 여러 변모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박신의의 지적대로 '훼손된 세계에 대한 공포와 고독감, 악몽에의 환각, 일상에 녹아있던 참혹함과 황량한 폭력적 야만성, 끊임없이 부활되는 파괴본능, 성도착적 집요함과 죽음에의 충동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시니컬한 현 세태에 대한 시선은 '80년대 민중예술이 본격화되기 훨씬 이전부터 형성되고 있었으며, 80년대는 도리어 그가 가진 비정치성 때문에 그런 직접적인 세태풍자에서 벗어나 이었다. 그는 역사 속에 묻힌 사진작업이나 색연필을 이용한 전쟁에 대한 우화적 표현을 통해 역사의 시간에 의한 변절과 이국적인 생생한 전쟁놀이이 모습을 통해 상징적인 접근의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요근래 몇 년 사이에는 연필작업과 콜라주 작업을 통해 직접적으로 현실 드러내기를 시도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마약과 핵, 퇴폐적인 술집의 모습들을 선택해서 현실적인 사회악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인간을 피폐화시키고 있는지를 형상화시킨다. 「우리들의 일상」, 「악몽」 등에서 마약이나 술, 사회적 부조리가 어떤 사회적 권력과 연계되어 있는지 하는 음험한 그늘을 제시해주고 있다. 특히 91년 작업들에서 보이는 콜라주기법은 이런 관심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사진콜라주를 통한 작업은 어떤 주제에 매여서 그의 방법들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면 이 작업에서는 콜라주의 기본 재료가 되고 있는 사진들의 독특한 형태와 내용, 색채들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주제적 형상이 다 만들어 줄 수 없는 다양한 정보들을 한꺼번에 구사할 수 있는 방법적 개안도 보인다. 이런 작업과 이 작업의 재료들은 도시의 퇴폐와 성의 상품화, 가진 자와 폭력, 무자비한 금권의 횡포, 과소비들을 보이면서 이런 횡포의 배경을 이루는 사회적 여러 현상들의 관계를 콜라주로 구축함으로 그의 사회적 악에 대한 시선이 복잡한 배후관계에까지 가 있음을 알게 한다. 그것은 그가 우리 시대의 신랄한 비판적 안목을 가진 작가로서 서 있게 한다. 「구름잡기」, 「즐거운 식사」 등에서 표현되고 있는 곳곳에서 흘러 넘치는 물질의 풍요와 기아, 그것을 곧 인간 심상의 황폐화와 사회적 구조로서의 불의와 소외로 연결시키는 그의 기지는 사뭇 독특하고, 콜라주라는 기법의 적절한 활용으로 이중적 구조라는 현대상을 보여주며, 특히 성적 기제가 될만한 재료들을 활용해서 소비적 성문화의 일면을 드러내면서 이 시대의 풍속적 모습을 보여준다. 콜라주라는 주체 상실의 다원적 재료와 흘러 넘치는 성의 충동들을 교묘하게 접합시켜 이 시대의 혼란과 고통의 한 면으로 성을 조명해주는 작업들이 돋보인다.

양인진_비어있는 사람들 Ⅱ_장판지에 먹, 아크릴채색_259×193cm_1991
이태호_수세미 꽃과 아이들_종이에 유채_50×60cm_1992

2-4. 황망한 옷벗기 ● 고백컨데 이홍원의 작업은 실재 작품을 본 적이 없어 낭패하다. 그동안 필자의 글쓰기의 태도로서는 그의 작업론을 아무리 짦게라도 쓴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없고 해서 기획측에서 보내온 팜플릿에 의존할 수밖에는 없다. 그것도 겨우 일곱 장의 사진이 들어 있는 것이어서, 그 의미를 읽어내는 데는 별지장이 없다 하더라도 화면 가득히 엉겨 있을 작가의 미세한 의미망이 될 섬세한 표현력은 아무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 부분이 큰 오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몇 자 의미의 문맥만을 좇아 보고자 한다. ● 그의 작업들 중 여섯 작품이 성과 관련을 갖는 것이다. 대형 스크린 속에서 타액을 흘리며 절정에 달한 듯한 눈초리로 섹스에 빠져 있는 남녀의 모습이 나오고, 그 장면을 보고 있는 관객들의 반응을 분절하듯 잡아놓은 「영화보기」는 분명 이 시대의 가장 일상적인 한 모습을 잡은 것이다. 껴안고 있거나, 얼굴을 가린 손가락 상로 더 자세히 드려다 보는 듯한 여자, 같이 앉은 여자의 허벅지를 만지는 남자의 손길, 껴안은 채 가슴을 만지는 남자, 얼굴을 붉히며 볼에 손을 갖다대는 여자, 껴안은 채 영화관 입구를 들어서는 남녀, 선정적인 극장간판, 어둠 속서 좌석을 찾아주는 아가씨의 손전등 불빛 등은 요즘 극장가에서 흔히 보이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 장면들이 객관적인 화면으로 잡혀졌을 때, 실은 스크린 속의 교접 장면보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직접적이다. 스크린은 하나의 허상이다. 하우저의 말대로 연극이기 때문에 극중의 살인에 대해 관객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허상이 아니라 실재이다. 「처녀 어머니」라고 캔버스에 제명이 적힌 「젖먹이기」와 「패션쇼」는 화려한 영화의 섹스와 현실을 대비적 상황으로 제시하면서 이 시대의 성풍속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현실과 허상의 이중적 구조를 통해 성이 어떻게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으며, 우리에게 어떻게 제공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가슴을 내놓고 「낮잠자는 여인」이나 「옷벗는 여인」은 안방 술집같은 데서, 아니 흔히 술집에서 있음직한 일의 표현이다. 이홍원은 이런 표현을 세련되지 못한 인물의 표정과 거친 묘사력으로 애잔하게 표현하면서 우리 성의 슬픔을 나타낸다. 잘못 벗기우고 있는 「옷벗는 여자」의 황망한 눈빛은 얼마나 크고 선량한가.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옷을 벗는다. 제대로 생기지도 못한 몸매를 내보이려고.

이태호_구름과 엉겅퀴_종이에 유채_72×93cm_1992
이태호_의자와 그림자_종이에 유채_36×95cm_1992

2-5. 몰인격의 생명체의 자궁 ● 정복수의 작업에서 인물은 언제나 현실감이 없다. 그것은 현실의 모습이 아니라 관념적인 인간이 형태와 생체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남녀의 두상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내장기관의 표시나 인체의 구조는 한방의 인체도, 혹은 경혈도에 보이는 조략한 구성도로 되어 있다. 여자는 가슴과 성기로, 또는 태아를 통해 남자와 구별된다. ● 그의 인물에는 인간적인 인격이나 품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시선은 인간에 대한 어떤 애증도 증발시켜 버리고 생태적 특징으로 인간의 육체를 부각시킨다. 사실적이기보다 개념적이긴 하지만 너무 적나라하게 인간의 생태적 특징만 강조해 놓아서 짐승같은 두려움마저 느끼게 해준다. 그러므로 그의 성은 징그럽고 피하고 싶은 조잡한 생물도감적 설명일뿐 인간의 감성을 위무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인물은 인간이라는 존재감의 묘사가 아니라 특정한 의미전달을 위해 채용된 소재로 보여진다. 평면화된 인물의 표면에서 더욱 그런 화신을 갖게 한다. 물론 그의 작업들 중에는 입체감이 뚜렷한 것도 없지 않다. 그러나 입체적 관심은 아닌 것 같다. 그가 인물을 평면화하고 남녀의 성구별을 고대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내장이나 성기의 개념적 표시는 그의 관심이 구체적 인물이나 개별성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해준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표현이기보다 표상이며, 그 표상은 개념에 충실한 인체로서 성의 영원성을 보이려는 것이다. 변하지 않는 인간이 특징적 표상을 인간으로서의 인격이나 문화적 표지가 아니라 인체의 생체적 특징으로 잡아내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수식, 말하자면 지성이나 인격이니 덕이니, 혹은 입고 있는 옷이니 멋진 몸매 따위의 모든 수식어를 벗어던진 인간의 본질을 형상화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사물의 본질이나 진실보다 수식에 더 끌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많은 것을 잃게 하고 오류를 가져온다. 정복수는 이런 인간의 습성을 간파고 있는 듯하다. 그런 간파 다음에 인간은 어떻게 보이는 것일까. 흔한 말로 현대인의 소외와 주체상실일까. 인간이 갖는, 특히 현대가 갖는 모든 문화적, 문명적 요소들을 제거해버린 인간의 모습은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이룰까. 아니, 인격도, 인감됨의 어떤 요소들까지도 모두 정보화되어 버린 현대인에게서 그런 정보의 허상을 모두 깨어 버리고 나면 애증도 원한도 엇이 그저 한 생명체의 자궁으로 남은 인간의 모습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자궁마저 위협당하는, 그것마저 상품화되고 있는 몰인격의 순간, 극명하게 와 닿는 존재감의 경험, 그것이 정복수의 작업이다. ■ 강선학

『풍자화, 그 해석과 비판의 소리』展은 당시 책임기획자인 윤진섭님의 허락을 받아 복원된 것입니다. 참여작가님 중에 이미지의 보완 또는 삭제를 원할 경우 [email protected]으로 연락 주십시오. 즉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Vol.19921013a | 풍자화, 그 해석과 비판의 소리 1--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