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인용 1

책임기획 / 윤진섭   1992_0901 ▶ 1992_0930

고영훈_시공(時空)_아크릴채색_85×120cm_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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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고영훈_권여현_김영진_김정명_김훈_박기원 박도철_박불똥_변종곤_예유근_유창현_이상윤 이호철_임봉규_최한동_한만영_홍수자

현대백화점 현대미술관 무역센터점_폐관 서울 강남구 삼성동 159-7번지 무역센터 현대백화점 8층 Tel. +82.(0)2.552.2233

『현대미술의 쟁점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 금번부터 무역센터 현대미술관이 장기간에 걸친 기획사업으로 펼쳐나갈 「현대미술의 쟁점 시리즈」는 압구정 현대백화점에서 진행되고 있는 「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와 함께 한국현대미술을 종합, 정리하자는 자뭇 거창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압구정 현대미술관의 「구상회화 재조명 시리즈」가 제목 자체가 암시하듯이 구상회화에 대한 테마별 접근이라고 한다면, 무역센터 현대미술관이 펼쳐 보일 「현대미술의 쟁점 시리즈」는 방법론적 접근이다. 이는 20세기 현대미술에서 나타나고 있는 첨예한 쟁점들 가운데 몇몇을 추출, 엄밀한 학문적·비평적 접근과 함께 오늘의 한국미술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을 분석, 이론적 토대를 공급하자는데 진정한 기획의도가 담겨 있음을 말해준다. 이번에 선보이게 될 혼성모방과 함게 설치, 평면성, 테크놀러지. 시물레이션(의태), 키치, 페미니즘 등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두루 아우르고 있는 핵심적인 개념과 방법론들을 엄밀한 비평적 접근과 함께 학문적 성찰을 총하여 그 위상을 확립, 향후 미술의 전개에 한가닥 좌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기획자의 바램이기도 하다. ■ 윤진섭

고영훈_5년 후_아크릴채색_85×120cm_1991
권여현_Illogical Triangle_혼합재료_213×303cm_1992
권여현_Time Kebeb-Mother_혼합재료_178×303cm_1991

혼성모방, 어떻게 볼 것인가?_1992_0715_03:00pm_무역센터 현대미술관 회의실윤진섭_오늘의 이 좌담은 무역센터 현대미술관이 앞으로 장기간에 걸쳐 진행해 나갈 「현대미술의 쟁점 시리즈」 중 그 첫 번째 행사인 혼성모방과 창작에 관한 논의를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금세기 이후 전개되어 온 현대미술의 추이는 혼란과 굴절, 그리고 파생의 연속이라고 할만큼 혼돈의 양상을 보여왔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미니멀리즘으로 대변되는 서구의 미술사조는 80년대 이후 전조적(liner)인 진행방향으로부터 이탈, 포스트모던 논의가 시작되면서 급격한 해체와 함께 '중심으로부터의 이탈'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역센터 현대미술관에서 향후 전개해 나갈 「현대미술의 쟁점 시리즈」는 폭넓은 시야에서 조망해 볼 구미에서 발원한 이와 같은 문화현상들이 동시대의 문화구조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은 또한 우리의 미술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서는 어떠한 현상을 야기시키고 있는가 하는 문제점들에 대한 종합적이고 심층적인 검증을 하자는데 그 주안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혼성모방(pastiche) 및 이와 연관을 맺고 있는 부수적인 현상과 개념들에 관한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는 후기 산업사회의 문화구조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개별 주체의 소멸이 -이는 개별양식의 소멸이자 독창성 개념의 소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만- 미술권 내에서 어떠한 전략을 취하면서 담론을 펼쳐 나가고 있느냐, 또는 그 담론의 내용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하는데 논의의 초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면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국내외 미술현상들에 대해 금번 주제를 두고 논의를 펼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재언씨께서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김영진_이성의 시대_프로젝터, 카리스마적 흉상, 청사진, 수평이동기, 와이어로프_260×240×120cm_1991
김영진_세 PART로 분리된 하나의 사건_혼합재료_400×500×200cm_1992

이재언_최근 창작의 분위기가 퇴조하고 기존의 혹은 전대의 스타일이나 기법, 언어를 차용하는 표현양식이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게 된 데는 미술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시대정신을 공유한 범문화적 차원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 문화가 독창성이나 진취적인 비전을 상실하고 있는 이유는 종래의 세계관이나 가치질서에서 벗어나 또 다른 중심을 희구하는 전환기 혹은 과도기에는 언제나 혼재된 시간의식을 가질 수 있으며, 오늘날의 미술현상이 차용의 보편화로 치닫고 있는 것도 역시 그런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후기산업사회의 구조 속에서 변질된 감수성이나 미의식의 토대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이러한 차용이나 혼성모방의 현상이 더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 미술 속에서도 그러한 차용의 양식이 시작되어 지금은 심각한 논란이 되고 있는 모방과의 변별 여부를 문제삼게 된 것이지요. / 윤진섭_예, 그러면 이 선생의 진단에 이어 차용의 실제적인 방법론이 야기되게 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 어느 분이 말씀해 주실까요? / 윤난지_우선 20세기 현대미술의 상황을 볼 때 80년대 모더니즘 움직임에 대한 하나의 반성과 거기에 대한 대안의 필요성이 느껴지는군요. 혼성모방의 문제만 보더라도 어쨌든 자기가 창조하지 않은 대상을 인용하는 방법이 등장하게 된 것은 전위정신의 퇴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전위 정신의 핵심은 전통의 부정인데 이는 패스티쉬가 전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인용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독창성과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다원화 현상의 문화전반에 걸친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의 한 종류가 패스티쉬가 아닙니까? 그런 상황에서 인용은 독창성의 개념을 놓고 볼 때 자연을 모방하거나, 예술작품이 아닌 인공물을 모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데, 예술작품 자체를 모방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미술의 전반적 역사를 보면 낭만주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예술적 가치를 결정하는 가치척도가 모방, 차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카데미즘 자체가 대가의 수법을 모방하는 것에서 시작되었고, 또 그때까지는 예술작품을 제작하는 의미가 내면적인 작업이기 보다는 기술, 장인으로서의 예술이었기에 남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세기 낭만주의가 등장하면서 예술가의 독창성 문제가 대두되었고 그 독창성이야말로 예술적 가치를 재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20세기 미술까지 이어왔고 모더니즘으로 이어져 온 것이죠. 시대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만 뒤샹의 레디메이드로부터 예술가의 독창성 문제가 의문시되고, 과연 예술작품은 유일한 것인가 하는 작품의 유일성 문제가 바로 이러한 싹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되고, 그것이 이어진 것이 팝아트라고 할 수 있겟습니다. 팝 작가들의 경우 다른 예술작품의 형상을 모방, 반복, 차용했지만 상업미술 영역에서 형상을 차용하는 경우, 그 의도가 문화현상의 완전한 풍자는 아니지만 냉소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사용되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서는 전반적인 다원화현상 속에서 절대적인 가치, 모더니즘에 대한 대안으로서 패스티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김정명_포켓 속의 작품들_합성수지에 아크릴채색_56×100×27cm_1989
김정명_잠든 지오르지오네의 비너스_캔버스에 유채_100×114cm_1982

이재언_패스티쉬의 역사는 현대미술을 둘로 나뉘었을 때 모던과 포스트모던으로 분류해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인 것 같습니다. 즉 모던 혼은 아방가르드=패러디, 포스트모던=패스티쉬로 말입니다. 오늘날의 시대양식으로 패스티쉬를 거론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패스티쉬란 패러디에 의해 이미 그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보편화된 것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포스트모던의 전형적인 양식으로만 보는데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가령 팝아트와 같은 모던 아트에서도 그러한 경우는 흔히 발견되는 것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 윤난지_역사적으로 비교를 해보면 인용을 하는데 있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고 보는데 대가들의 작품을 인용하는 경우가 있었고 사실상 현대미술에서 볼 수 있는 현상들, 예를 들어 달리, 고호, 들라크로와, 피카소 조차 대가들의 작품을 자기방법 대로 수용해서 변형시키는 그런 작업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작가들과 그 후예들은 미술의 역사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당대의 문화현실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기도 합니다. / 윤진섭_만약 비판의 태도를 갖는다면 그 비판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 윤난지_그것은 예술작품의 경향, 예술가의 독창성 문제, 고급미술과 순수미술에 대한 그러한 내용입니다. / 강성원_포스트모더니즘에서만 패스티쉬가 유독 거론되어야 할 어떤 이유가 있습니까? / 윤난지_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가 하는 실체는 아직까지도 규명되지 않고 있는 현재진행 중인 것이기 때문에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감각적으로 알고 있는 인용의 의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속성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인 지향하는 바의 어떤 목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더니즘이 지향하는 바가 예술의 순수성을 고수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김훈_이성의 사과_혼합재료_600×500×180cm_1992
김훈_시공간(視空間)_혼합재료_1991

강성원_그것을 모더니즘의 순수성이라고 한다면 그 모더니즘에서는 80년대 아방가르드 현상이 모더니즘의 순수성을 비판한 것이지, 모더니즘의 개념 자체를 규정한 것인지 수긍이 가지 않는군요? / 윤난지_모더니즘 속에 있는 반모던적 요소가 마르셀 뒤샹 작업이고 포스트모던이자 팝아트이지 포스트모던과 모던을 이분법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수성을 고수하려는 자세는 마르셀 뒤샹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작품 속에 모던과 포스트모던적 형태로 함께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는 그것이 주제가 아니라 80년대 이후 패스티쉬의 전개양상 자체가 주제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패스티쉬가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술작품의 가치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인데 그것이 예술작품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느냐 아니면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느냐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지, 단순한 방법으로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아직 그것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단순한 현상의 개관을 볼 것이 아니라 예술의 기치문제와 척도에 관련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 윤진섭_복제술의 발달, 이를테면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의 붕괴현상과 연관시켜 볼 대 현대미술이 대중화되는 맥락에서 짚고 넘어갈 필요는 없을까요?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예술작품의 진품성을 자꾸 얘기했는데 현대미술의 맥락에서는 예술작품의 속성이 유일무이성, 진품성에 있는 것만은 아니거든요. 마르셀 뒤샹이 모나리자의 복제판에다 수염을 그려 넣고 L.H.O.O.Q라고 제목을 붙힌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거대한 얘기들에 대한 반발의 움직임들이 있었다는 거죠. 현대미술의 상황 속에서 패러디라든가 패스티쉬 방법론이 하나의 전략으로서 나온다는 것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상당히 의미심장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 이재언_제가 패스티쉬와 패러디의 차이를 약간 언급했었는데 그 개념들의 차이를 여기서 다시 짚고 넘어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윤진섭_좋은 제안입니다. 도입부에서 패스티쉬의 개념을 좀더 정치하게 논의한 다음 인용의 방법과 사례에 대해 얘기해 보도록 합시다. / 윤난지_사전에 보면 원래 개념은 이탈리아어 pasticcio로 모방작품을 뜻하고, 최근에 와서는 혼성, 즉 여러 작품으로부터 내용과 형식을 인용해 오는 변형법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가치문제를 얘기했지만, 이것과 관련해서 패스티쉬 개념을 정의해 보면 단지 모방을 정의해 보면 단지 모방을 하거나 아니면 차용하여 빌어오되 작가 자신의 특정한 목표를 위해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빌어오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의 경우 관람자에게 이 사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리는 것이 전제됩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예술작품의 독창성이 문제가 도지 않겠느냐 하는데 저의 경우 독창성이라는 것을 굳이 형태에서 찾지 말고 이제는 의도에서 찾자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의도가 독창적이라는 의미에서 이 패스티쉬는 예술작품의 전통적 개념, 즉 독창성이라는 개념에 치환될 수 있다고 봅니다. 작품의 조형적, 내용적 의도 자체가 충분히 독창적일 경우 패스티쉬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며 이 경우 가치가 개입될 수 밖에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패스티쉬가 가치의 문제를 함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재언_잠시 윤선생 말씀 속에서 어떤 개념의 창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그러는데요, 의미론적으로 이완 혹은 해체되어 있는 상태에서 패스티쉬가 어떤 비판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군요. / 윤난지_대체로 비판적인 경우인데 그렇지 않은 것도 있지요. 패스티쉬의 분명한 목표는 비판적 목표뿐 아니라 다른 어떤 의미가 있는 내용적 목표가 있을 수 있죠. 그런 여러 가지 의도를 다 포함한 의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비교적 고전적 작가들의 작품에서 사용되는 인용의 방법의 예로는 그쪽 사람들이 좀더 문화의 전형 자체의 성격을 많이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이재언_그것은 패러디와 비교했을 때 작가들이 확실한 지향성을 갖고 있다거나 선명한 비판성을 지니고 있을 때는 비록 오늘날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패더디로 분류될 수 밖에 없을 것 가습니다. 결국은 이분법에 대한 이의제기입니다만, 따라서 철저히 중성화되고 자아가 분열될 수 밖에 없었던 정황이 전제될 때 패스티시 양식의 근거가 마련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 작가들도 최근 고전적 이미지나 전통문화 이미지들을 차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래에 있어 왔던 시간의식이나 주체에 대한 인식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례들이 패스티쉬로 규정될 수 잇는지는 문제가 되겠습니다만, 중심이나 주체를 상실한 환각적 현실 속에서 지향성을 상실한 정신의 양상이 반영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박기원_무제_혼합재료_76×56cm_1992
박기원_무제_혼합재료_76×56cm_1992

윤진섭_강성원씨께서 패스티쉬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한 말씀 해주시죠. / 강성원_패스티쉬 문제는 작년 말부터 말이 많았고 글도 여러 차례 보아 왔지만 사람들마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패스티쉬, 패러디라는 단어를 쓰는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좌담회를 하건 토론을 하건 간에 늘 혼란스럽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이를 제 나름대로 정의해 보면 우선 패러디와 패스티쉬의 구분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패러디는 1920-30년대 아방가르드 운동에서 뒤샹이 레디메이드라는 오브제를 가지고 패러디기법을 사용해서 예술작품의 자율적 가치를 부정한 사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패스티쉬는 80년대에 와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 계통의 작가에서 나타나는 기법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패스티쉬가 잘못 받아들여져 급기야는 표절사태로까지 번지게 되었습니다. 고전적 모더니즘 자각들의 경우 미술사에 대한 지식에 근거하고 있고, 자기들 현실인식의 바탕위에서 패러디가 나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계 내에서 머물면서 패러디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최초에 패스티쉬를 했던 작가들은 바로 그 패러디를 행한 아방가르디스트 행위 자체가 사실은 고급미술을 창안한 모더니즘의 주류에 대항하는 그런 인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패스티쉬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패러디 기법을 차용한 아방가르디스트를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태까지 의도적으로 비판한 이 사람들은 미술의 지식까지도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더니스트들이 했던 패러디 기법조차 고급문화의 영역에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기법을 비판하려니까 절충, 키치적인 혼합방식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인데, 문제는 패스티쉬를 이해 못하고 스타일로 이해하면서 쓰고 있는 많은 패스티쉬 작가들에게 패스티쉬라고 붙여주는 평론가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혹은 유행처럼 패스티쉬를 사용하는 작가들은 비판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작가들이 패스티쉬의 원래 의미와 현상, 개념을 동일시 하는 데서 혼란이 오는 거라고 봅니다. / 윤진섭_그러니까 패스티쉬가 원래 가졌던 맥락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전형이 도면서 양식화되어 가고 있다는 말씀이죠.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잘못 이해되어서 마치 그러한 양식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 같고 또 일종의 유행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원래의 비판의식까지 소멸되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 강성원_우리의 작가들이 그런 식의 패스티쉬 기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 난 혼성모방 기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어라고 할 만큼 우리 미술사 내지 한국미술의 존재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 비판할 수 있는 작가가 있다고 보십니까. / 윤난지_그것만의 문제가 아니고 혼성모방 자체가 양식이냐 아니냐 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 기법이 진위로 나타나게 된 배경이 없다 하는 상황인데, 그것 자체를 작품에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비판할 것인가 하는 점이 이 시대의 평론가들이 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봅니다. 또한 그리고 기법과 현상을 해석하고 개념정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평론가가 할 일이라고 봅니다.

박도철_Vincent Van Gogh_캔버스에 유채_194×262cm_1992
박도철_반 고흐 연구_혼합재료_145×209cm_1991

이재언_80년대 초부터 민화 및 설화적인 분위기나 이미지를 절충적으로 화면에 끌어 들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 강성원_80년대 이후 패스티쉬는 자기 역사 발전이 필연적 계기에 의해 그런 의식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60년대 말 모더니즘의 노화라는 것은 모더니스트들이 보완해 나가는 새로운 기법들이 더 이상 나올 수 없으며, 따라서 미래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작품들이 쌓아 놓았던 역사가 갖고 있는 문화적 한계가 있으며, 그 속에서 현재가 소진된 상태의 원인은 결국 모더니스트들의 잘못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 작가들이 혼성모방으로 재조정, 재구성 작업을 한 거죠. 그러나 대부분 서구적인 것의 모방이나 아류에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결국 과거의 빈 공간을 보여주고자 한 그런 작가들이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 이재언_아닙니다. 패스티쉬 개념이 우리나라에서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최근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류의 화면들은 훨씬 이전에 우리 화단에서 보여졌거든요. 그러면 그것을 모방으로만 볼 수 있을까요? / 강성원_그럼 안 볼 수 있다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 이재언_우리가 패스티쉬 개념을 여러 매체나 저널리즘, 비평 등을 통해 접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질적으로 판단하고 구분하는 것과 매도하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 윤난지_패스티쉬 개념은 넓고 또 하나의 기법이기 때문에 거기서 가치를 배제하고 접근하게 되면 모든 사용자를 패스티쉬로 보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가치가 있고 중요한 의미를 갖는 패스티쉬가 있는 반면 단순히 모방만을 한 패스티쉬가 있는데 그것을 변별해 주는 것이 평론가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미술사에서 보면 기법적으로 보면 모두가 패스티쉬입니다. / 윤난지_좌우간 방향을 우리나라가 혼성모방의 기법을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받아들인다면 어느 쪽으로 지향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 같군요. / 이재언_개념의 윤곽이 나와야 이 시대의 미술 한계를 가늠해 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개념차나 적용의 폭이 다른 것만이라도 확인한다면 이 자리의 소득이지 않을까요.

박불똥_행복예감-새(鳥)도시_사진 콜라주_80×110cm_1991
박불똥_썸머 콜렉션_사진 콜라주_108×79cm_1990

윤진섭_이제 다음으로 넘어가서 현상진단과 방향제시, 가치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살펴보는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느 분께서 인용의 방법, 인용의 역사를 간략하게 요약해 주시죠. / 윤난지_작품을 모방하는 것, 소재로 빌어와 직접 수용하는 것이 있겠고 양식적으로 변형하는 것을 인용의 방법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 중에서 여러 가지 작품을 하나의 작품에 인용하는 것을 패스티쉬라고 보는데, 과거 천부적인 대가들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후대의 화가들이 방법적인 면에서 더 이상 개진해 나갈 수가 없다는 데서 그 다초가 찾아질 것 같습니다. 이태리 매너리즘 화가들도 독창성이 없다고 비판을 받았지만, 그 중 몇 명은 자신의 독창성을 발휘한 화가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엘 그레코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지요.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세기말의 작가들도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윤진섭_그러면 문화적인 배경에서 살펴볼 때 현대미술에서 패스티쉬, 키치, 패러디와 같은 어법들이 나타나는 전반적인 상황이 이 시대의 구도와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어떤 전망을 지니고 있는지 말씀해 주시죠. / 윤난지_희망적으로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 윤진섭_아방가르드와 연관지어 생각하면 패스티쉬가 나타나는 상황이 단지 아방가르드 정신이 퇴조해서 나타나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의 연장으로 볼 수 있겠는지요? / 강성원_패스티쉬 사용자들이 자본주의의 냄새나는 지점을 정확하게 지적할 수 있다면, 그래서 표절이 안되려면 상상력이 발동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그런 의식을 지닌 작가가 없다고 봅니다.

변종곤_무제_61×112cm_1991
변종곤_무제_61×112cm_1991

윤진섭_그러면 한국미술계에는 그만한 독창성을 가진 작가가 없다는 얘기입니까? / 윤난지_의도의 독창성을 너무 비판적으로 보시는 것 같은데 조형적인 측면에서의 패스티쉬도 그 가치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강성원_조형에서이 인용의 의미는 패스티쉬가 아니라고 봅니다. / 윤진섭_그런 부분이 패스티쉬는 아니라도 패스티쉬 개념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 이재언_어느 정도 패스티쉬와 패러디의 한계는 명료해졌다고 보는데, 그러면 우리의 과거전통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혼합절충하는 것에 대해 달리 부를 개념이 있습니까? / 윤진섭_그런 작가들을 어느 범주에 넣을 것인가 그런 유형들이 한둘이 아니고 군을 형성할 때는 범주설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을 차용했을 때는 패스티쉬로 간주될 수 있지 않을까요? / 윤난지_혼성모방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대한 저의 입장은, 패스티쉬와 표절을 구별할 것이 아니라 패스티쉬에 표절이 상접될 수 있고, 잘하면 창작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는 하나의 중성적인 기법이기 때문에 이를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 못하느냐로 판단해야 합니다. 기법적으로 혼성모방한 것, 즉 구분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가치판단 하는 것은 성립이 안됩니다. 이번 전시회도 넓게 정의하지 않으면 누가 판단하겠어요. / 이재언_사실 방법적으로 합성양식이라는 것이 꼭 어떤 시간의식의 산물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의 정황을 감안할 때 추상과 재현적 구성의 합성방식도 이러한 범주에서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유근_최후의 심판_종이에 아크릴채색_164×100cm_1989
예유근_최후의 심판_혼합재료, 종이에 아크릴채색_73×116×48cm_1988

윤진섭_그렇다면 전망과 관련해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술작품은 무엇이냐에 대한 개념으 재정립의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고 보는데, 이런 시대일수록 냉철한 비평이 요구된다고 보여집니다. 현대미술의 올바른 방향에 대한 대안을 논의해 보기로 합시다. / 윤난지_저는 전통적인 이미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강성원_미술품의 가치평가는 작가들이 얘기하고자 하는 소통의 매카니즘, 즉 이 사회에 발언하고자 하는 면들을 오브제에 의한 반영, 반성, 비판의 형태로 정확히 대중에게 전달되었을 대, 그래서 세계, 사회, 인간관의 발언이 진실성과 조형미를 얼마만큼 구현해 냈는가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또한 소통하고자 하는 바가 진실한 내용이고 남의 양식을 빌리지 않았을 때 독창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윤진섭_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대중들로 하여금 정확한 인식의 틀로 작품을 보고 해석하게끔 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창작에 있어서 범주를 선명하게 변별시켜 줌으로써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과연 어떤 것인가를 인식의 차원에서 주지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작가 자신의 몫이어야 합니다. 이번 카셀도큐멘타의 테마도 '이탈(displacement)'이었는데 과거 어떤 시점에 있던 위치가 급격한 전환을 가져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구인들도 그런 발상을 하는 걸 보면 르네상스 이후 미니멀까지 어어져 오는 발전의 계기, 즉 지속으로 보는 역사관이 변하고 있다는 조짐으로 여겨집니다. 즉 그들 스스로도 이데올로기적 질곡, 허위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라고 보는데 그것을 결과적으로 보면 미래의 전망과 관련지워 볼 때 어떤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되는 위기의식을 스스로 느끼지 않느냐 하는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한국미술은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점을 놓고 볼 때 이제까지는 미술자체가 차용의 역사였고 인용의 역사였는데, 오늘 이처럼 실천적인 의미에서 인용의 문제를 다루어 봄으로써 우리 나름대로 밖으로는 서구미술에 대응해 나가야 되겠고, 안으로는 우리 역사를 통해서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계기로 삼는데 이번 전시는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장시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윤난지_이재언_강성원_윤진섭

『창작과 인용』展은 당시 책임기획자인 윤진섭님의 허락을 받아 복원된 것입니다. 참여작가님 중에 이미지의 보완 또는 삭제를 원할 경우 [email protected]으로 연락 주십시오. 즉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Vol.19920901a | 창작과 인용展 1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