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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 서양화 / 감경규_강환섭_고영훈_김경복 김선희_김영자_김영환_김영환_김와곤_김종하 김진두_김춘자_김홍주_김희자_노재순_문범강 민경숙_박불똥_박승범_박종해_박진모_박현규 변종곤_신제남_신호철_안창홍_오경환_우창훈 유서욱_이강하_이두식_이석주_이재호_이종두 이호철_이황은_임옥상_임철순_전준엽_정광화 정규석_정인건_조성모_조성휘_한만영 홍순철_홍윤표_황용진_황학만_황효창 조각 / 김광우_김현근,류인_박상숙 박헌열_백윤기_성동훈_윤성진_이일호 임영선_임형준_조영자_최승호
책임기획 / 윤진섭
1992_0719 ▶ 1992_0803
덕원갤러리 DUKWON GALLERY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82.(0)2.723.7771~2 www.dukwongallery.co.kr
1992_0721 ▶ 1992_0806
현대백화점 현대미술관 압구정 본점_폐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456번지 Tel. +82.(0)2.547.2233
상상력의 눈-새로운 해석과 변용의 힘 ● 화가에서 있어서는 훌륭한 주제를 발견하고 그것을 제한하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화가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주제를 넘어서서 자연의 요소나 지적인 명제를 창조적인 예술로 변형시키는 자유로운 상상력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다. (리오넬로 벤투리)
예술가의 시각이 평범한 일상인과는 좀 다른 특징적인 면이 있다고 한다면 필자는 그것을 예술가들이 현실과 삶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속에서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밝힐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하고 싶다.
훌륭한 예술가란 그런 의미에서 사물의 외양이나 표면적인 현상에만 얽매이지 않고 진정으로 '창조되어야 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정신에 있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K. 야스퍼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 때 창조되어야 하는 것, 정신에 있어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란 실제로는 눈앞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의 이미지를 창조한다는 뜻도 되는데, 이 말은 상상력을 통해서 모든 가시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의식화한다는 말도 된다. 왜냐하면 형상화할 수 없는 비가시적인 것을 그려보일 수 없음으로 해서 하나의 구체적인 작품은 결코 추상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온 우주는 이미지와 기호의 창고에 불과하며 상상력이 이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주고 또 상대적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사료(思料)와도 같은 것이어서 상상력이 그것을 소화하고 변모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자연은 하나의 사전에 불과하다." 보들레르의 이 말은 자연이나 혹은 현실에 대한 일종의 불신이 엿보이긴 하지만 적어도 예술가의 상상력이 자연 또는 현실과 관련지워 어떠한 위치를 점하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상상력이란 눈앞에 존재하고 있지 않은 허구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협력하여 경험의 모든 사실을 관련시키며 지각작용에 의해 제공받은 이미지를 변형시키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긍극적으로 인간존재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작가의 가치관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은 두말할 나위없다. 따라서 벤투리 같은 경우는 이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하여 "상상력이란 현실로부터 이탈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에 침투해서 그로부터 예술가의 감각방식에 일치하는 양식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또한 현실과 이성의 인식에는 은폐되어 있는 것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흔히 상상력하면 단순한 창의력이나 마치 공상가나 비현실적인 예술가들이 현실도피의 수단 또는 그것의 탈출구로서 이용되는 것인양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것 같다. 그것이 정작 자연이나 현실을 보다 충실하게 탐구하기 위한 인간의 인식기능의 하나로서 적어도 예술가에게는 발상의 근원이 되며 주관과 객관, 물질과 정신, 현실과 비현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등의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고 있는 이원적인 갈등구조 속에서 균형잡기를 위한 적절한 메타포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고 있는 작가들은 많지 않다.
필자가 보기엔 오늘날 한국 현대미술이 지닌 일반적 문제점 그리고 이 시대의 감수성도 바로 이러한 딜레마에 의해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작가들의 의식이 급변하는 시대상황을 뛰어넘지 못하고 그저 사물의 외양이나 현실에만 집착하여 상상력 빈곤현상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평면이니 구조니 환원이니 하면서 너무나도 협소한 형식주의적 동어반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 부분을 도외시켜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는 구상미술이든 추상미술이든 민중미술이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비판적인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시각체험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사실주의를 가장한 진부한 구상미술이나 급진적인 민중운동을 통해서 현실변혁을 이루려는 민중미술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구체적인 것, 즉 감각적, 현실적 인식의 직접적인 현상에만 관련시킴으로서 창조적 사고에 있어서 각 부분 전체의 발전에 의한 총합적인 인식능력이 결여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가 하면 일반적인 관념성과 사고의 유물화로 빠져들고 있는 추상미술의 경우는 외계공간에 대한 재현으로부터 자기 내부공간에만 탐닉함으로써 '그림 그 자체를 하나의 현실로 믿는'(J. 모리스) 편향된 시각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이 우리의 미술을 메마른 기능주의에 예속시키고 현상세계에만 집착하여 상투화된 문제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든가 관념적인 도식 속에서 무의미한 행위를 반복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어느 쪽이든 작가들의 인식세계의 범주가 지각 가능한 대상세계나 현상론에 제한됨으로써 정신적인 깊이를 상실하고 상상력 빈곤현상으로 노정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 무엇보다도 이들 중의 상당수 작가들이 이중영상(double image)이라든가 데포르마숑(deformation_, 데페이즈망(depaysment), 꼴라주(collage) 등 초현실주의 미술의 대표적 기법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초현실주의는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그것을 어느 정도 미학적으로 성취시켰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상상력에 대한 이해와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에 대해서도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고 보여진다. 흔히들 초현실주의 하면 앙드레 브르통 류의 자동기술법이나 프로이트 류의 정신분석, 꿈의 해석, 달리류의 편집증적 제작태도로서 이해하고 정작 초현실주의가 인간의 정신과 사고의 실제적 기능을 넓히기 위해 무수한 가능성을 실험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 부족한 듯 하다.
어떤 의미에선 초현실주의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그려낸다든가 전통적인 예술의 구성방식을 버리고 자유연상, 비논리적인 배열, 충격적이며 아무 연관도 없는 이미지의 병치 등 다양한 실험을 보여준 것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의식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확실히 존재하는 욕망이나 꿈 같은 것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혹은 평범한 일상적인 사물에 강렬한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서 그것들 사이에 새로운 질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간현실을 보다 충실하게 탐구하고 표현하기 위한 의도에 다름 아니며, 여기에서 상상력은 현실과 삶의 감수성을 확장시킬 수 있는 상징적인 거울의 역하를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 물론 이때의 상상력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욕구불만을 보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이미지라든가 그것이 일상과 현실사이에 아무런 유대관계가 없을 경우엔 도피주의란 비난을 면치 못할런지도 모른다. 실제로 마르쿠제 같은 경우는 초현실주의에서의 상상력의 극단적인 방임(예컨대, 오토마티즘)이 결과적으로 예술을 지나치게 비합리주의에 오염시킨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 이 점에 대해선 초현실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여기서 일단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초현실주의에 나타난 충격적 이미지라든가 비합리적인 세계, 꿈의 해석, 자동기술법 등은 모두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이지 본질적으로는 "상상력을 해방시키고 현실의 정의를 팽창시키는데 관심이 있었다"(C.W.E 빅스비)고 하는 점은 우리가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번 출품작가들의 작품에서 초현실주의적 시각과 그 기법의 차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예컨대 어떤 사물이 본래의 제 장소를 떠나서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든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상황이나 사물을 비교 혹은 대립시킴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고 있는 위치전환, 이미지 병치(depaysment) 기법은 이재호, 이종두, 이석주, 김와곤, 박진모, 황학만, 이호철, 고영훈 등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한 이미지가 엉뚱하게 다른 이미지로 바뀐다거나 서로 다른 두 이미지가 중첩되어 나타나는 이중영상(double image) 기법은 강경규나 신젠남, 정광화의 작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 와서 눈에 보이는 외형을 무시하고 현상너머의 세계, 비현실적인 세계, 또는 존재의 밑바닥에 있는 어떤 것, 무의식이나 욕망 등 일상적인 지평을 넘어선 경이롭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포착해내는 작가군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김춘미, 우창훈, 김영환, 김선희, 조성모, 유성숙 등의 작품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 그 밖에도 극사실주의 기법과 일종의 트롱플뢰이유(trompe-loeil, 눈속임술) 효과에 의해 그려진 물체가 실물인지 허상인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재현하면서 두 개의 낯선 이미지를 결합, 재구성해내는 정규석, 고영훈, 이호철의 작업이라든가 카탈로그, 잡지 등에서 인쇄물, 사진 등을 오려내어 재편집 해왔던 신학철의「한국 근대사」시리즈나 박불똥의 사진 꼴라주 작업도 일종의 초현실주의 기법을 차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각의 경우에는 작가들의 주된 소재가 인간형상에 제한되고 있는 경우가 많은 만큼 일반적인 인간존재에 대한 이해를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는 작가들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때 주관과 객관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인식을 구체적인 재현으로서 보다는 또 다른 의미를 암시하는 변형이나 왜곡(deformation) 등의 상징적 수법으로 나타내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다. 김광우, 류인, 임형준, 백윤기, 이일호, 박헌열 등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짦은 지면을 통해 일일이 이와 관련된 작가들을 모두 열거할 수는 없으나 일단 최근의 현대미술이 초현실주의적 시각과 기법을 두드러지게 차용하고 있음을 엿볼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에 나타난 기법적 특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이들이 초현실주의와 어느 정도 미학적 관점을 공유하고 있는지, 그것과의 유사성은 무엇이며 차이점은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여진다. ● 이 점에선 상당수의 작가들이 초현실주의의 미학적 기본이념과 맞물리고 있다 하더라도 작가들 스스로가 이러한 카테고리를 거부하리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왜냐하면 앞서도 잠시 언급한 바 있듯이 미술사상에서 초현실주의 하면 합리주의,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인간의 잠재의식과 무의식, 우연성, 의식이 자발성을 강조한 현실의 반대급부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서 이해하는 풍토 때문이라고 받아들여진다.
더욱이 농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지구촌 사회, 정보사회, 후기 산업사회로 급속히 편입되고 있는 우리사회의 급변하는 현실상황이라든가 이러한 환경변화에 발맞추어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트랜스 아방가르드니 하면서 새로운 비평용어가 자구 거론되고 있는 이즈음 초현실주의를 하나의 정신적 태도가 아닌 지나간 미술사상의 양식쯤으로 해석할 경우 초현실주의라는 용어는 너무나도 낡은 개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실제로도 이들 참여작가들 중에는 초현실주의 기법을 단순하게 차용하고 있을 뿐이지 관심의 대상을 현실의 문제에 한정짓고 그것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현실주의적 입장이라든가 사회, 역사의식을 강하게 풍기는 문명비판적인 작업, 그리고 소비사회, 대중문화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팝아트적인 요소 또한 적지않게 검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는 이들의 이러한 작업은 오히려 다양한 실험을 통한 모더니즘 양식의 고갈 이후 최근 현대미술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 '형상으로의 복귀'나 '과거 미술양식에의 차용'이라든가 혼합주의, 절충주의 방식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들 작품에서 초현실주의의의 미학적 기본이념을 일정 부분 공유하는 점을 찾는다면 무엇보다도 이들이 눈에 보이는 현상세계에만 집착하지 않고 인간의 꿈과 욕망,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비현실 등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는 세계를 상상력을 통해서 새롭게 해석하고 변용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특히 초현실주의가 지향하고자 했던 바가 단순한 의미에서의 현실에의 부정이라든가, 미지의 영역에 대한 동경, 또는 예술이 형태적인 혁신이나 혁명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고 자연과 인간 혹은 세계와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삶과 정신세계의 혁명'에 있었다고 볼 때 적어도 이러한 미학적 카테고리에 들어올 수 있는 작가들은 상당수가 된다고 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관과 객관, 물질과 정신, 합리와 불합리, 꿈과 현실 등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순과 갈등, 편향된 정신세계를 극복하고 통합하기 위한 일종의 '부정의 변증법'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수사법은 유효하게 작용하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문제는 이들 작업의 분류상의 범주화가 아니라 이들이 이러한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차용하거나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얻은 '새로운 현실'에 우리는 주목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이들 작가들의 작품은 현상세계에 얽매여 진부한 동어반복을 되풀이하는 구상미술이나 난해한 관념으로 위장하여 최소한의 환기력마저도 거부해온 추상미술, 현실성의 획득이란 명분 아래 지나친 사회의식을 강조하는 민중미술의 제모순을 반성적으로 극복하며 전향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이번 전시회는 상상력을 통한 세계인식이 결코 낯선 풍경이나 비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은폐를 통해 드러내는 상징적 진리가 여러 형태의 현실을 예시해 주고 있고 비판적 의식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고 본다. ■ 이준
『구상미술의 오늘, 꿈과 현실의 대결』展은 당시 책임기획자인 윤진섭님의 허락을 받아 복원된 것입니다. 참여작가님 중에 이미지의 보완 또는 삭제를 원할 경우 [email protected]으로 연락 주십시오. 즉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Vol.19920721b | 구상미술의 오늘, 꿈과 현실의 대결 2-구상회화의 재조명 시리즈展